85화. 청성 괴사 (1)
서백풍이 말했다.
“아마도 조장님은 그 배 위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셨던 모양입니다. 딱히 신경 쓸 만한 기운을 못 느끼신 거겠지요. 평소라면 귀찮아하며 무시했을 텐데, 결국 조장님이 수긍하신 모양이군요?”
“전음으로 살짝 핀잔을 주긴 했는데 무시하진 않으셨어요. 상황을 보더니 자연스럽게 맞춰주셨어요.”
그 말에 서백풍과 곽승추 그리고 진평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들의 눈동자가 하나같이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있었다.
워낙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던 탓에 한설연은 그들의 시선 교환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가뜩이나 세 사람은 수많은 작전들을 수행하며 생사를 함께해온 사이였다. 한설연에게 들킬 정도로 미숙할 리 없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죠?’
스쳐 지나간 서백풍의 시선에 담긴 의미는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진평과 곽승추도 공감하고 있었다.
단유소는 굳이 역할이 필요치 않은 상황에서 쓸데없이 호위 대상의 보조를 맞춰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설연에게는 한 것이다.
‘두 사람, 확실히 뭔가 있어.’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일단 한설연에게는 단유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넘어선 그 무언가가 확실히 있어 보였다. 단일 호위 임무의 경우, 호위 대상자가 호위무사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는 일은 사실 특별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한설연의 입장은 그렇다 칠 수 있다.
의외인 건 단유소였다.
지난 며칠간 한설연을 통해서 들은 단유소의 모습은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부분이 많았다. 그녀를 통해 세세하게 들어본 바, 단유소가 그녀를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해줬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사실, 호위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한설연 만큼이나 불쌍한 처지에 처한 사람들은 많고도 많다.
그렇기에 대상의 감정에 휘말려 들지 않는 것이야말로 호위 임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단유소는 그런 부분에 있어 말이 필요 없는 전문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한설연에게만 그런 모습을 보였던 걸까.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강호의 여인들과 교류하기를 매우 꺼리는 단유소가 한설연에게만큼은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며칠간 함께 지내면서도 몸소 경험했다.
한설연이 배 위에서 위지척과 있었던 일에 대해 한참 이야기할 때쯤, 단유소와 연소운이 양손에 보따리들을 들고 돌아왔다.
“올라오면서 식사도 주문했다.”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이니 한 상 푸짐하게 먹기로 이미 계획된 상태였다. 모두의 얼굴이 환해질 때 한설연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이런 날 술도 한잔할 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물론 기분 낼 정도로만 적당히.”
그 말에 조원들 모두가 피식 웃었다.
조원들끼리 몰래 마시는 건 모르겠지만 임무 중에 호위 대상자와 술을 마시는 일 따위,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런 전례도 없거니와, 더군다나 그녀가 묵룡조의 정체를 아는 상황이니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런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단유소도 피식 웃고 있었다. 그가 한설연에게 대꾸했다.
“하여간 저 술꾼. 아주 기회만 되면 마셔대려고 하네.”
그 말에 조원들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술꾼……?’
단유소의 말하는 모양새가 마치 그전에도 함께 마셔봤다는 투가 아닌가.
그러자 한설연이 말했다.
“이번 일을 겪다보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행복하게 보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것 같더라구요. 물론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는 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러니 그 힘든 현재 속에서도 순간순간에 찾을 수 있는 행복은 찾아가면서…….”
“그만, 그만.”
단유소가 한설연의 말을 끊더니 말했다.
“그 일 한 번 겪더니 아주 틈만 나면 ‘이 순간’ 타령이시군. 안 그래도 당신이 술 얘기 할까 봐서 각 일 병씩, 여섯 병 주문해놨어. 그 정도면 각자 충분히 기분 낼 정도는 될 거야. 그러니 이제 그 소리는 그만.”
단유소가 그렇게 말하더니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우와아아!”
한설연의 얼굴에 함박꽃이 필 때, 이미 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단유소가 말했다.
“좋댄다.”
묵룡조원들은 크게 놀라고 있었다.
‘술을…… 마신다고?’
‘임무 중에 호위 대상과……?’
‘조장님이……?’
순간적으로 진평, 서백풍, 곽승추가 시선을 교환했다. 이제 그들의 눈빛에는 놀람 대신 의미심장함이 담겨 있었다.
그때 한설연이 말했다.
“그럼 저는 식사가 준비되기 전에 좀 씻고 올게요.”
한설연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점소이들이 와서 식탁 위에 풍성한 음식을 차려놓고 나간 직후였다.
“어서 와서 앉으십시오, 한 소…….”
그렇게 말하며 한설연 쪽으로 고개를 돌리던 서백풍이 결국 말을 맺지 못했다. 다시 나타난 한설연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움직임과 함께 말도 멈춰버린 것이다.
서백풍뿐만이 아니었다. 진평과 곽승추의 반응도 똑같았다. 장승이라도 된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설연이 인피면구를 벗고 나타난 탓이었다.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그냥 멍했습니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셨습니다.”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일전에 연소운에게 한설연의 본래 용모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연소운이 했던 대답이었다.
그 말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는 아름다움이었다.
심장이 떨리는 걸 넘어서 몸이 떨릴 정도였다. 미녀들 깨나 만나고 다닌 서백풍조차도 그랬다.
여태 호위하고 있던 여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화 속에서나 나오는 선녀의 아름다움이 저럴까 싶었다. 그녀 자체적으로 빛이 나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천하제일미라는 그녀의 명성이 이제야 제대로 와 닿았다. 시대마다 있었던 천하제일미들을 다 모아놓는다 해도, 지금의 한설연이라면 그중에서도 무조건 으뜸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들 쳐다보고 앉아.”
단유소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세 사람이 정신을 차렸다.
“죄, 죄송합니다.”
진평이 서둘러 한설연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서백풍과 곽승추도 얼른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한설연이 배시시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녀의 웃는 모습이 또다시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이 넓은 방 전체가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 나자 한설연이 단유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식전에 첫 잔은 쭉 들이켜고 시작해야죠?”
“그래. 술꾼이 하자는 대로 해야지.”
“피! 자꾸 술꾼, 술꾼.”
“그럼 더 확실하게 술주정꾼이라고 해줄까?”
단유소의 말에 한설연이 입술을 삐쭉거리며 눈을 흘겼다.
그 모습조차도 너무 아름다워서 서백풍 등의 입술이 벌어질 때, 단유소가 먼저 술병의 마개를 땄다. 그러자 모두가 각자의 앞에 놓인 술병을 땄다.
그때 한설연이 말했다.
“잠깐만요.”
그러자 단유소가 귀찮다는 듯 물었다.
“또 왜?”
“첫 잔은 제가 따라드리고 싶어서요. 감사의 의미로. 기념하고 싶기도 하고요.”
“기념할 것도 많다. 그리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당신이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쯤, 이 친구들도 다 알아. 그러니 얼른 먹기나 하자고. 지금 다들 배고파서 그런 거 신경 쓰고 싶지 않을 테니까.”
단유소가 그렇게 말했을 때, 진평이 단유소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조장님, 저는 한 잔 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감사를 표하시고 싶다는데 굳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백풍 형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허, 허락하신다면 저도…….”
서백풍과 곽승추, 심지어는 연소운까지도 연달아 한마디씩 했다. 그러자 단유소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기념은 네놈들이 하고 싶은 거로군.”
이어서 단유소가 포기한 표정으로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짓하니, 조원들의 표정이 동시에 환해졌다.
* * *
객잔의 뒷마당에 홀로 앉아 있는 단유소를 향해 진평이 다가왔다.
즐거운 분위기에서 배불리 먹고 술도 마셨다.
다만 상황이 상황이라 휴식이 중요하니 자리는 최대한 짧게 끝냈다. 얼마나 빨리 끝냈는지 아직 해시초(亥時初, 밤 9시)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주무시지 않고 혼자서 무슨 분위기를 그렇게 잡고 계십니까.”
단유소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옮겼다. 진평에게 자리를 권한 것이다.
진평이 거절하지 않고 옆에 앉자 단유소가 물었다.
“애들은?”
“다들 주독을 배출한 후에 곯아떨어졌습니다. 방으로 들어간 한 소저도 이미 잠든 모양이고요.”
단유소가 고개만 끄덕였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한동안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아직은 객잔의 일 층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로 인한 왁자지껄한 소리가 정적을 메울 뿐이었다.
둘 사이에서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지만 어색한 침묵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겉으로는 상관과 부하의 관계이지만 속으로는 마음을 나누는 벗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 침묵은 편안한 침묵이었다.
진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이더군요.”
굳이 묻지 않아도 한설연에 대한 말임을 단유소가 모를 리 없었다.
단유소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보였나?”
“매사를 대하는 태도라고 해야 할까요? 활발하고 적극적이지만 정도를 지킬 줄도 아는 모습이 마음에 들더군요.”
단유소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진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에 따라 적절히 상대에게 맞춰줄 줄도 알고. 어쨌든 의외였습니다.”
“의외라?”
“싸가지 없고 건방질 것이라 생각했었거든요.”
“푸훗!”
“원래 어렸을 때부터 유명세 깨나 날린 후기지수들은 예외 없이 다들 그렇잖습니까. 젊어서 성공한 청춘들도 대부분 그랬지요. 독선적이고 자존심 세고. 세상이 다 자기 것인 양 오만하고. 그 유명한 현월곡의 교월이라면 충분히 그 범주 안에 있을 법 하잖습니까.”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는 투였다. 그러자 진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식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나 예쁘고 똑똑한데 성격까지 좋다? 조장님도 겪어봐서 아시겠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잖습니까. 예쁘면 얼굴값 했고, 똑똑하면 지랄 맞았지요.”
임무 중에 함께한 여인들에 대한 얘기였다. 그리고 진평의 말마따나 실제로도 그랬었다.
“그래서 계속 유심히 지켜봤는데 아무리 봐도 가식이나 내숭은 아니더군요. 그래서 일차적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한 소저는 좋은 사람이자 매력적인 여자라고.”
그 말에 단유소는 뜻 모를 미소만 지어 보였다.
수긍한다는 의미인지, 대충 그런 셈 치자는 의미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상태로 또다시 말이 오가지 않던 중에 진평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조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뭐야? 애들을 대표해서 떠보러 온 거야?”
“아니요. 벗으로서 떠보는 겁니다.”
그 대답인즉 이 자리에서 알게 된 사실을 조원들과 공유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고로 더 확실한 대답을 원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진평이 말을 이었다.
“그럴 만도 하잖습니까. 평소에 호위 대상을 대하던 조장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쯤, 스스로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저희들 앞에서도 그런 모습 이미 다 보여주셨고요. 이유가 뭡니까? 그녀는 뭐가 다른 겁니까?”
“글쎄.”
단유소가 짧게 대꾸하며 또다시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평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한 젊은 후기지수들처럼 그녀도 오만하고 건방졌지. 세상 무서운 거 모르는 애송이에 헛똑똑이였고, 철도 없었고, 개념은 더 없었지. 그래서 귀찮고 짜증스러울 뿐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