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재회 (9)
제갈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아까도 말했듯 신룡대와 흑풍대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번에 신룡대가 흑풍대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은 드러날 겁니다. 진상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청룡과 그 일행들이 그 부분만큼은 감출 수가 없을 테니까요.”
제갈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백도 내에서 우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무리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격거리가 될 겁니다. 여기저기에서 일제히 우리를 질타하겠지요.”
오랜 세월 강호의 양대 축을 이루며 서로 싸워온 정과 마는 단순한 적대관계를 넘어서서 이념이 대립하는 관계였다.
특수한 상황에서 정마 간에 물밑 접촉을 하며 협상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그 또한 무림맹 수뇌부의 합의가 도출되었을 때에 한해서였다.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가 바로 천마신교와의 문제였다.
상황이 그러한데 묵룡조와 흑풍대 사이에 있었던 일이 밝혀진다면?
사실, 같은 백도라 해서 모두가 백리우를 지지하고 무림맹을 지지하는 건 아니었다. 무림맹이 본디 수많은 백도 세력의 연맹체이기에 동상이몽이 언제든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천하제일인인 백리우를 중심으로 짜인 역학 구도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지지하는 척하고 있지만, 명분만 생기면 언제든 여기저기에서 무림맹을 압박해올 수 있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던 백리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약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는 어떻게 될까?”
방금 전에 백리우가 말한 ‘그’는 바로 묵룡.
제갈윤이 대꾸했다.
“명문의 실세들로 구성된 특별 감찰단에 의해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되겠지요. 그들은 융통성이 없으니 원리 원칙만을 내세울 겁니다. 골치 아플 겁니다.”
“조사를 받게 되면 그는 성향상 대부분 진실을 얘기할 거야. 동료들을 대신해서 혼자 죄를 뒤집어쓰려고 하겠지. 그러면 어떻게 될까.”
“최대한 우연이었다는 점을 강조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그간의 공로가 크니 투옥되는 정도로 끝나겠지요.”
“투옥이라…….”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는 백리우는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는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듯했다.
제갈윤이 백리우를 방해하지 않으니 방 안에서는 한동안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이윽고 백리우가 고민을 끝낸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그런 거 밝혀져서 이래저래 골치 아파지기 전에 이 짓도 때려치우는 게 나으려나?”
그러자 제갈윤이 웃으며 대꾸했다.
“확 그래버릴까요?”
서로가 농담인 것을 알고 빙그레 웃었다.
만약 그만둔다 해도 그게 이 시점일 수는 없다. 그건 무책임한 짓이니까.
“에잇, 몰라! 그때 가서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그 말에 제갈윤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저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백리우의 속내는 다를 것이다. 막상 그때가 되면 무리수를 둬서라도 개입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묵룡이 관계된 일이니까.
“그래서, 청룡을 포함한 세 명을 빼고 나머지 적들은 다 보내준 겁니까?”
“죽였지.”
“도망친 자들이 열 명도 넘는다면서요. 그들이 산개하여 도망쳤다면 아무리 표 호위라 해도…….”
“그들을 처리한 건 백혼대(百魂隊)였어.”
그 말에 제갈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수많은 문파와 세가들이 각자의 정예 무인들을 보유하고 있다.
백리우는 무림맹주인 동시에 백리세가의 가주다. 백리세가는 강호 팔대세가로 꼽힌다.
그 백리세가의 정예는 백영대(百影隊)다. 그들은 다른 문파나 세가의 정예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외부에 알려진 사실일 뿐 실제는 다르다.
백리세가는 근래에 천하제일인을 두 번이나 배출한 가문이다. 백리우의 조부가 천하제일인이었고 백리우의 부친은 천하 삼대 고수로 꼽혔다. 그리고 또다시 백리우가 천하제일인으로 꼽히고 있다.
삼대에 걸쳐 그런 사람들이 가주였던 만큼, 백리세가 정예들의 수준도 다른 곳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최정예들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들이 바로 백혼대다.
백리우는 무림맹의 일에는 절대로 사적인 전력들을 투입하지 않는다. 무림맹의 일은 무림맹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 또한 공사 구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리우가 무림맹의 일에 백혼대를 투입했던 예가 있었다. 이전에 한 번 있었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그 두 번 모두 묵룡이 관계되어 있고.’
제갈윤이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백리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도망치던 놈들 중에서 가장 강해 보이는 놈들로 세 놈은 살려뒀다. 그리고 중간에 다른 백혼대원들에게서도 연락이 왔어. 청룡조원들 전원을 사로잡았다고.”
“오오!”
“너한테 덜 혼나려고 나도 노력 많이 했다니까.”
“혼자 켕겨서 그러셨겠죠. 어쨌거나 그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최대한 빨리 복귀한 거고, 그들은 백혼대가 호송 중이야.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으니 도착하려면 시간은 좀 걸릴 거고.”
“잘하셨습니다. 이제 적들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고, 특히 변절한 자들은 뭐가 그렇게 아쉬웠다는 건지도 알아낼 수도 있겠군요.”
제갈윤이 그렇게 말하더니 표익에게 물었다.
“더 이상 보고할 건 없는가?”
“예, 문상 어른.”
표익이 대꾸하자 제갈윤이 백리우에게 말했다.
“저는 가서 단목 곡주께 교월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그 영감님 얼굴 좀 펴겠군.”
“묵룡의 소재가 파악되었으니 투입되었던 천무단의 정예들과 비조대에게도 복귀를 지시하겠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물었다.
“성도에 우리 안가가 몇 군데나 있지?”
“본 맹에서 성도에 상시로 유지하는 안가의 숫자는 다섯 군뎁니다.”
안가라는 게 원래 위치가 발각되거나 그럴 위험이 있을 경우 수시로 옮기게 되어 있다. 그러는 와중에도 다섯 군데는 유지시킨다는 말이었다.
“다섯 곳 모두 당장 사용 가능해?”
“글쎄요. 그건 가서 알아봐야겠지만 서너 군데는 가능할 겁니다. 근래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임시로 서너 곳 더 추가해놓으라고 지시하긴 했는데, 지금쯤이면 그곳들도 사용이 가능하긴 할 겁니다.”
“오! 그랬어? 역시 윤이라니까.”
“그런데 갑자기 안가는 왜요?”
“투입되었던 천무단의 인원들 중에서 반만 복귀하게 하고 반은 안가에 나누어 배치시켜. 비조대도 각 안가마다 두세 명씩 배치시키고 나머지는 불러들이고.”
그러자 가만히 백리우를 바라보던 제갈윤이 말했다.
“묵룡을 지원하기 위해서군요.”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보니까 남쪽으로 가더라고. 청성파나 성도 쪽을 거쳐서 올 생각인 거지. 그의 입장에서는 그게 더 안전할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거고.”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처리해 놓지요.”
제갈윤이 돌아서서 방을 벗어나려 할 때였다.
“윤아.”
백리우의 부름에 제갈윤이 멈춰서 고개만 돌렸다.
“얼른 일 처리하고 와. 간만에 술이나 한잔하자.”
“뜬금없이 웬 술 타령이십니까? 게다가 이런 민감한 시점에요?”
“토 좀 달지 말고 형이 한잔하자면 그냥 못 이긴 척 받아주면 안…….”
탁!
미처 백리우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방문이 닫혔다. 말하는 중간에 제갈윤이 이미 나가버린 것이다.
그러자 백리우가 옆에 있던 표익에게 말했다.
“술상 준비해둬.”
“예.”
표익이 웃으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제갈윤이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 *
“네. 정말 신기할 정도였어요. 적들은 우리가 어딜 가든 금세 알아내어 공격해왔죠. 어쨌거나 그 길로 곧바로 인근의 나루터로 이동해서 배에 탔어요. 그리고 배 위에도 혹시 적의 이목이 있을까 봐 어쩔 수 없이…….”
한설연이 묵룡조와 함께한 후로 벌써 사흘이 흘렀다.
이 정도의 시간이 흘렀으면 분명히 적들과 조우했을 법도 한데, 희한하게도 지난 사흘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유소조차 의아해할 정도였다.
지금은 땅거미가 지는 시각.
이곳은 청성산에서 한 나절쯤의 거리에 있는 작은 현이었다.
저자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은 알맞은 객잔을 찾아 넓은 객실을 하나 잡았다. 객실 안에 따로 작은 방 하나가 딸려 있는 구조였기에 한설연과 함께 머무르기에 나쁘지 않았다.
저녁 식사 전에 단유소는 필요한 물품들을 구해 오겠다며 객잔을 벗어났다. 연소운과 함께였다.
두 사람이 객실을 벗어나자마자 시작된 대화였다.
한설연이 방금 전에 이야기한 부분은 예전에 단유소와 함께 객잔에 머물렀다가 다음 날 새벽부터 자객들과 싸웠던 때의 일이었다. 그 후에 배를 탔고 그 배에서 위지척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 배에 타던 당시의 이야기를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사흘간 짬짬이 계속된 이야기가 이미 그 부분까지 진행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서백풍이 추임새를 넣어주자 한설연이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단 공자님과 저는 연인 행세를…… 해야 했어요.”
한설연이 살짝 부끄럽다는 투로 그렇게 말하자 그녀의 정면에 앉아 있던 서백풍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건 호위 대상이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일 경우에 흔히 쓰는 방식입니다. 아무래도 남녀 둘이 함께하는데 서로 딱딱한 관계로 보이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참고로 호위 대상이 남성인 경우에는 친구나 형제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아……! 그랬군요.”
지난 사흘간 한설연은 묵룡조와 많이 친해졌다.
일단 묵룡조는 든든했다. 단유소 한 사람만으로도 그렇게나 든든했는데 조원들 모두가 함께하니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마음이 편안하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겁니다. 평범한 가정을 꾸려서, 소중한 사람들과 더불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지요.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요.”
예전에 주선연을 할 당시에 단유소가 했던 말이었다.
그때 단유소가 말했던 소중한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라는 걸 이제는 한설연도 알고 있었다. 그렇듯 단유소가 믿는 사람들이니 의심할 필요가 없고, 그러다 보니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묵룡조원들은 자신을 어렵게 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친근한 척하며 도를 넘지도 않았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알아서 배려해 주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방금 전에 서백풍이 했던 말도 그런 차원이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끔 배려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백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그 방식이 항상 쓰이는 건 아닙니다. 호위 대상이 자연스럽게 보조를 맞춰줄 만한 사람이어야 가능한 방식이니까요. 저희들이야 그런 부분에 있어서 훈련이 잘되어 있지만 호위 대상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한설연이 봐온 서백풍은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을 더 열게 되는 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렇겠네요.”
한설연이 대꾸하자 이번에는 곽승추가 물었다.
“연인 행세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걸 조장님이 미리 말씀하신 건지요? 아니면 그때 즉흥적으로 이뤄진 건지요?”
곽승추는 종종 이렇게 세부적으로 궁금한 사안들을 묻곤 한다. 한설연이 보니 그는 특히 서백풍과 죽이 잘 맞는 느낌이었다. 종종 두 사람이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고로 진평은 묵묵히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한설연이 기억을 되뇐 후에 대꾸했다.
“둘 다 아니었어요. 그때 단 공자님은 벽에 기댄 채로 앉아서 눈을 감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보아하니 승객들의 이목이 우리 쪽에 많이 집중된 분위기여서……, 제가 먼저 자연스럽게 연인인 척 보이려 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