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83화 (83/200)

83화. 재회 (8)

탁자 옆에 선 제갈윤은 펼쳐진 서찰 하나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백리우에게 확인시키듯 들고 있는 모양새였다.

당연하게도 백리우는 그 서찰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떠나기 전에 남겼던 서찰이었다.

백리우가 난처함 가득한 미소를 지은 채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하하. 유, 윤아. 그, 그, 그게 말이야…….”

그러자 제갈윤이 펼쳐서 들고 있던 서찰의 아랫부분을 촛불에 가져다가 대었다.

스스스― 화르륵!

서찰이 금방 불에 타올랐다.

“야! 너! 그, 그게 무슨 짓……!”

백리우가 깜짝 놀라서 외치자 제갈윤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잘도 타네요.”

제갈윤이 여전히 고저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마치, 근 며칠간 시커멓게 타들어간 제 속처럼 말이지요.”

그러자 백리우가 사정하듯 말했다.

“야아아아…….”

제갈윤이 묵묵히 백리우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끼니는 잘 챙겨 드시고 다닌 겁니까.”

“응? 으응. 머, 먹었지.”

“그나마 다행입니다.”

“고맙다. 걱정해줘서.”

“형님이라도 잘 챙겨 드셔서.”

그 말에 백리우가 흠칫했다. 제갈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

“저는 며칠째 굶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더군요.”

“아, 아니 그래도 밥은 먹어야…….”

그 이후로 방 안에서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백리우는 여전히 난처한 표정이었고 제갈윤은 처음과 같은 무표정이었다.

그 상태로 잠시 서로를 응시하던 중에 제갈윤이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을 확인한 백리우도 웃었다. 제갈윤이 이런 식의 소모적인 감정 대립을 오래 끌 리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갈윤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재미는 있으셨소?”

음성에 고저도 돌아와 있었다.

백리우가 대꾸했다.

“재미는 무슨. 놀러 나갔냐. 개 발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그보다도 너……!”

“네.”

“방금 전처럼 그러지 좀 마라. 니가 한 번씩 그럴 때마다 아주 무서워 죽겠다고! 차라리 화를 내라고!”

“무섭기는, 무슨. 이 강호 전체가 덤벼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양반이.”

“내가 늘 말하잖아! 그런데도 너는 무섭다고!”

“허허.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제갈윤의 말에 백리우의 눈매가 좁아졌다.

“뭐? 노, 놈? 너, 억지로 그런 거지?”

“그냥 비유 아닙니까, 비유.”

“그래도 방귀 뀐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억지로 놈이라고 한 거잖아!”

“사람이라고 하면 맛이 안 살잖아요, 맛이. 날씨가 미친년 널뛰듯 한다고 해야 맛이 살지, 날씨가 정신이 이상한 여인 널뛰듯 한다고 하면 맛이 사냐고요.”

“끄응……. 저거 말이나 못하면.”

제갈윤이 빙그레 웃더니 허공에 대고 말했다.

“표 호위.”

그러자 창문 쪽에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예.”

“잠시 들어오시게. 내, 듣고 싶은 게 많네.”

“충!”

대꾸가 들리자마자 창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흑의 무복을 입은 표익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제갈윤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문상 어른.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 너는 내 수호위라고! 설령 벌을 내릴 일이 있어도 내가 내리는 거라고!”

제갈윤이 아랑곳하지 않고 표익을 향해 점잔은 어조로 말했다.

“벌은 무슨. 그게 어디 자네 탓이었겠는가.”

“문상 어른의 선처에 감사드립니다.”

“일단 자세부터 풀게나.”

그러자 표익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섰다.

두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백리우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인간들 둘만 만나면 아주 내가 혈압이 올라서…….”

역시 백리우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제갈윤이 표익에게 물었다.

“자세한 보고를 듣기에 앞서, 먼저 급한 것부터 묻겠네. 그녀는 무사한가?”

제갈윤이 말하는 그녀인즉 한설연이었다.

“예, 무사합니다.”

표익의 대답에 제갈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물었다.

“그도 무사한가?”

제갈윤이 말하는 그는 묵룡.

이번의 대답은 백리우가 했다.

“응. 무사하더라. 무사한 걸 넘어서 아주 펄펄 날더라.”

이번에도 제갈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설연도 무사하고 묵룡도 무사하다. 백리우도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다행이었다.

제갈윤이 표익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그간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해보게.”

“예.”

표익의 보고가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가던 그가 다리 위에서 묵룡과 청룡이 대치하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뭐라고 했나? 십여 발의 화살? 즉, 그의 뒤에 열 명이 넘는 조력자가 있었다는 뜻인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조력자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아냈나?”

그러자 표익이 슬쩍 고개를 돌려 백리우의 눈치를 살폈다. 제갈윤도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비격뢰 전용 화살들이었다.”

그 말에 제갈윤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럼 조력자가 흑풍대였단 말입니까……?”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제갈윤이 다시 물었다.

“아니, 어떻게요?”

백리우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

그러자 제갈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여부를 다 떠나서,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신룡대와 흑풍대가 서로 돕는 관계에 있다는 소문이 나면, 이 강호에는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올 겁니다.”

“그렇겠지.”

“그 경우, 천마신교 쪽은 별로 안 다칩니다. 다치는 건 본 맹입니다. 다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근간이 흔들릴 겁니다.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윤이 말했다.

“지금 중요한 건, 이 일을 또 누가 알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형님이 보시기에 이 소문이 퍼질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말에 백리우가 눈을 감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어질 표익의 보고를 들어보고 네가 판단을 내리는 게 좋겠다. 이런 종류의 판단력은 네가 더 낫잖아.”

* * *

“지, 지금 뭐라고 했나?”

이어지는 표익의 보고를 묵묵히 듣던 제갈윤이 순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표익이 난처함 가득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제갈윤이 서둘러 백리우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정말입니까? 생포할 수 있었던 청룡을 놓아주셨다는 말이?”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갈윤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배신한 수하를 그냥 놓아주다니요? 대체 왜요?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좀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백리우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제갈윤은 답답함이 가득한 표정이었지만 그 이상은 채근하지 않았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후에야 백리우가 말했다.

“원래는 생포고 뭐고, 이유 따위도 묻지 않고 단칼에 쳐 죽일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의 변절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까.”

“차라리 그러지 그러셨습니까. 설마 그의 검례를 보고 나니 옛정이 떠올라 마음이라도 약해지신 겁니까?”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은 아니었고.”

백리우가 그렇게 말한 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가 그 상태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대체 내 새끼들이 나를 떠나려고 한 이유가 뭘까. 그에 동조한 아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인데 그 이유는 또 뭘까. 단순히 외부의 유혹이 너무 달콤해서였을까?”

백리우의 말이 조용히 이어졌다.

“내가 맹주가 되기 전부터 신룡대는 무림맹과 맹주의 가장 강력한 검이었지. 내가 맹주에 오른 이후에도 그랬다. 그들은 언제나 용맹스러웠고 충성스러웠지. 그들은 늘 위험하고 어려운 임무에도 목숨을 걸고 뛰어들었고, 대부분 완수해냈다. 무림맹과 나를 위해.”

코로 한 차례 한숨을 내쉰 백리우가 독백하듯 말을 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무림맹은 뭐였을까. 또, 그 수장인 나는 대체 그 아이들에게 있어 뭐였을까. 언제나 그들이 묵묵히 모든 것을 다해주니,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모든 수고를 그저 당연하게만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들에게 명분만을, 충성심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건 아닐까. 정작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귀를 닫고 살았던 게 아닐까.”

백리우의 표정과 어조에 회한이 엿보였다.

“그들에게 어떠한 불만이 있었다 해도, 그래서 뭔가를 바랐다 해도, 그다지 대단한 것들이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제갈윤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백리우가 말한 부분들이야말로 조직의 생리였다.

조직은 늘 구성원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 구성원들이 느끼기엔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다. 구성원들은 조직에 늘 불만이 있다.

그걸 조율하고 관리하는 게 바로 책임자들의 역할이다. 그리고 신룡대의 책임자가 바로 백리우와 자신이었다.

백리우와 함께 이 무림맹의 일을 직접 맡게 되기 전부터도 신룡대는 언제나 최고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해왔다. 늘 그 자리에서.

당연하다는 듯 그 자리에 있기에 자칫 간과하기 쉬운 문제들이 있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자신들도 실제로 간과해온 면이 있다.

그렇기에 제갈윤은 백리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백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이나 우정에도 유효 기간이 있다고들 하는데 충성심이라 해서 다를까. 세상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변하고 있고, 결국 사람의 의식이나 가치 같은 것들도 비슷한 속도로 변해갈 텐데, 우리는 선대가 그 아이들을 관리해왔던 예전 방식대로만 대해왔지.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백리우와 자신은 각자의 부친들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대로만 신룡대를 관리해왔다. 백리우의 말마따나 그 시절과 지금은 강호의 상황도,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한 신룡대를 관성적으로만 대해온 것이다.

백리우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제갈윤이 서서히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형님의 말씀, 깊이 공감합니다. 또한 당시에 형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도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형님은 그런 분이니까요. 그게 바로 제가 형님을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요.”

제갈윤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이 그들의 변절을 정당화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형님이 청룡을 그냥 보내준 일 또한 잘하셨다 말씀드릴 수가 없는 겁니다.”

백리우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제갈윤이 다시 말했다.

“상황이 대충 어떠한지는 알겠습니다. 일단 이 일은 우리 외에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됩니다. 언급조차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시겠지요?”

백리우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제갈윤이 입을 열었다.

“정리를 하자면 우선, 청룡을 놓아준 일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청룡은 그때의 일에 대해 소문을 낼 정도로 바보가 아니니까요. 그와 함께하고 있다는 나머지 두 명도 굳이 그 일을 발설하지는 않을 겁니다. 소문을 내봐야 본인들에게만 더 좋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을 이해한다는 듯 백리우가 대꾸했다.

“너, 만약 그런 소문이 백도에까지 퍼지면 청룡 녀석을 이중첩자로 몰아가려는 거구나?”

“그렇습니다. 만약 소문이 퍼졌을 경우, 적당한 시기를 봐서 형님이 청룡을 이중첩자로 심은 거라고 밝히면 끝날 일입니다. 그러면 역으로 청룡 본인만 더 힘들어지지요. 청룡이 그 정도의 계산도 못 할 리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 일이 밝혀지면 그와 함께하는 두 명도 결국 무림맹주가 살려줬다는 게 밝혀지게 되니 소속된 곳에서 의심을 받을 겁니다. 상식적으로 그 상황에서 무림맹주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사람을 살려줬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요. 그러니 그들 또한 굳이 소문을 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역시 윤이라니까? 내 뜻을 딱 아는구나! 사실은 나도 똑같은 생각으로 청룡 그 아이를 놔줬던 거거든.”

그 말에 제갈윤이 인상을 찌푸리며 째진 눈으로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거, 이제 와서 은근슬쩍 짜 맞추지 좀 마십쇼.”

백리우가 흠칫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