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재회 (4)
머리가 띵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현실 같지 않은 이 모든 상황들 중에 지금이 가장 현실 같지 않았다.
그 즈음,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벌벌 떨고 있는 청룡을 향해 백리우가 말했다.
“오랜만에 얼굴 좀 제대로 보자.”
청룡이 손을 벌벌 떨며 자신이 쓰고 있던 복면과 죽립을 벗어서 한 손에 들었다.
그러자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보고 싶었다.”
그 말에 청룡이 더 심하게 몸을 떨었다.
맹주가 노기를 드러냈다면 그나마 덜 무서웠을 것이다. 분노하여 쳐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면 차라리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면 되니까.
그런데 맹주는 진심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다정한 어조였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맹주가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즉, 쉽게 죽이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결국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확실하게 죗값을 치르게 할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백리우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보인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젠 나를 보고 예를 취하지도 않는구나. 그래도 아직은 명부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았으니 현재까지는 너도 맹의 일원이 아니냐.”
비꼬거나 비아냥대는 어조가 아니었다. 그저 점잖게 타이르며 권하는 어조였다.
그 말에 청룡이 여전히 벌벌 떨며 대꾸했다.
“제, 제, 제가 무슨 자격으로 매, 매, 맹주님께 예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무, 무슨 낯으로 맹주님께 예를 취하며…… 그 구호를 외칠 수 있겠습니까.”
“괜찮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오랜만에 네 인사나 한번 받아보자.”
맹주의 어조는 여전히 다정했다.
누가 봐도 배신한 수하를 대하는 그 주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지, 지,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요…….”
“너라면 내 말의 진심과 가식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지 않으냐. 참, 검례(劍禮)로 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몇 번 얘기했었지? 검례를 취하는 자세만큼은 온 맹을 통틀어 네가 가장 멋지다고.”
그러자 청룡이 눈을 크게 뜨며 대꾸했다.
“자, 자진을……, 명하심입니까.”
백리우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러자 어쩔 줄 몰라 하던 청룡이 이윽고 표정을 바르게 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후들거리는 무릎도 애써 곧게 모아 곧게 폈다.
그리고 그가 검을 뽑았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스릉―
청룡이 뽑아 든 검을 수직으로 세우며 몸의 한가운데에 위치시켰다. 그 직후, 검을 이용하여 허공에 곡선과 직선들을 만들어냈다.
쉭― 휘익― 쉭쉭― 휘이익―
기운을 주입하지 않은 채 휘두르는 검에 빗방울들이 부서져 나갔다.
휘리릭― 처억!
마지막 순간, 청룡이 검으로 우아한 곡선을 그리더니 역수검의 형태로 검을 쥐며 검면(검의 날이 아닌 평평한 면)을 하박(下膊, 팔꿈치에서 손목까지의 부분)에 대었다.
이윽고 그가 죽립을 든 왼손을 등 뒤로 옮기며, 검을 쥔 오른쪽 주먹을 가슴에 대었다. 그러면서 외쳤다.
“충!”
그게 바로 무림맹의 최고 예법인 검례였다.
누가 봐도 절도 있고 멋스러운 동작.
기실 청룡이 허공에 대고 검을 이용해 만들어낸 직선과 곡선들도 ‘충(忠)’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러자 백리우가 홍의 사내와 자의 사내의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러더니 그도 자세를 바르게 하며 쓰고 있던 죽립을 왼손으로 벗어 등 뒤로 감추었다. 이윽고 백리우도 청룡처럼 오른손 주먹을 가슴에 대었다.
그 상태로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리우는 따뜻한 느낌의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청룡의 눈에서는 왜인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말없이 마주 보기만 하던 중에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백리우였다.
“좀 야윈 듯하구나. 끼니는 제대로 챙겨 먹고 다니는 게야?”
염려가 가득 담긴 어조였다.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담긴 미소를 지은 채였다.
청룡은 여전히 예를 취한 자세로 말이 없었다. 사실, 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상태였다.
흐르는 눈물로 인해 목이 메어왔기 때문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충’이라는 글자를 허공에 새기고 입으로 외칠 때부터, 왠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올랐던 것이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예를 취한 자세 그대로였다.
“어디에서 무얼 하더라도 끼니는 꼭 챙겨야 한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냐.”
“…….”
청룡이 대꾸는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여 보였다.
그러자 백리우가 따뜻한 눈빛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봐도 네 검례 자세가 맹에서 가장 멋지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 최고의 예법으로 나를 대해주어 고맙다.”
청룡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양이 더 많아졌다.
마지막 순간이라 했다.
말인즉, 맹주가 더 이상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할 일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 취급은 여기에서 끝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눈물이 흐르는 건 앞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는 게 안타까워서도 아니었다.
청룡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추측건대, 적어도 검례를 취하던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던 자신의 마음에, 맹주도 진심을 다해서 답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배신자인 자신에게.
백리우가 가슴에서 주먹을 떼었다.
그러자 청룡도 검을 쥔 채로 가슴에 대었던 주먹을 떼었다.
백리우는 다시 죽립을 썼지만 청룡은 쓰지 않았다.
백리우의 입술이 열렸다.
“익.”
청룡을 비롯한 세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의아해할 때, 백리우의 뒤쪽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예!”
생소한 목소리에 청룡을 포함한 세 사람의 눈동자가 다시금 휘둥그레졌다.
목소리가 들린 위치는 멀지 않았다.
잘해야 예닐곱 걸음 정도?
누군가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그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건은 준비되었는가?”
“예!”
“결과는?”
“모두가 맡은 바를 제대로 수행했습니다.”
“가져오게.”
그러자 뒤쪽의 어둠 속에서 흑의에 죽립을 쓴 한 명의 사내가 다가왔다. 한 손에 큼지막한 보따리를 든 채였다.
그런데 놀라운 건, 전혀 내공을 쓰는 느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발자국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분명히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시야에 있는데도, 기척 또한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바로 백리우의 비밀 수호위인 표익임을 청룡조차도 알지 못했다.
백리우가 턱짓하자 표익이 들고 왔던 보따리를 그 앞에 쏟았다.
그리고 그 내용물이 드러난 순간, 청룡을 비롯한 세 사람의 눈동자가 또다시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것은 여덟 개의 수급이었다.
세 사람이 놀란 이유는, 그 수급들이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백리우가 나타나기 직전에 도망쳤던 복면인들의 수급이던 것이다.
빠르게 세어보니 수급의 숫자는 도망친 인원들의 숫자보다 세 개가 적었다. 그나마 세 명은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었다.
백리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여태껏 정과 협을 위한다며 살아왔으나 실제로도 지난 모든 삶이 정정당당하고 정의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색이 정파의 수장인데, 동료와의 의리를 저버린 자들은 살려두고, 동료와의 의리를 지킨 자들만을 오히려 핍박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백리우가 다시 청룡에게 말했다.
“보아라. 평소에는 함께하는 척 하다가도 정작 상황이 어려울 때에는 동료를 버리고 달아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너는 그런 자들 사이에서 잘 해낼 수 있겠느냐?”
이 상황이 두려운 와중에도 청룡은 의아했다.
맹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마지막의 질문은 대체 무슨 의미인 걸까.
백리우가 다시금 홍의 사내와 자의 사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그래. 물론 이 친구들 둘은 남았지. 이들이 무슨 생각으로 남은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만 중요한 건, 한 번 배신했던 자들을 네가 믿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이들도 네게 똑같은 의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국 서로 그런 상황이면 진심도 의심으로 변할 것이다. 너는 그런 상황에서 버틸 수 있겠느냐?”
청룡은 더욱 의아했다.
이미 끝난 상황에서 맹주는 왜 자꾸 저런 식으로 묻는 걸까?
청룡의 표정을 보며 백리우가 빙그레 웃었다. 마치 그 속내를 짐작하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백리우가 말했다.
“들어라. 너는 오늘부로 실종 처리될 것이다.”
청룡의 눈매가 좁아졌다. 맹주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그 뜻이 파악되자, 그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 갔다.
“가거라.”
맹주가 뜻을 확인시켜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룡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백리우가 빙그레 웃었다.
“그것 봐라. 의심스럽지? 앞에서는 보내준다고 해놓고, 막상 출발하고 나면 잠시 후에 저 수급들 신세가 될 것 같지? 그러나 나는 진심이다. 이곳에서 너를 본 순간부터 진심이었고, 지금도 진심이란 말이다. 결국 너부터가 내 진심을 의심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자 청룡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대, 대체 왜…….”
“그래. 아까도 말했듯 나는 신의를 저버린 자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전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생각으로 사는 평범한 사람이기도 하다.”
놀란 청룡의 눈빛을 차분한 미소로 응시하며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물었으니 그 개를 때려잡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내가 기르는 개가 아니라, 내 새끼다. 내 새끼가 내 품을 떠나고 싶어 한다는 건 내게도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지. 그러니 가거라.”
이어서 백리우가 홍의 사내와 자의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친구는 정사지간 출신인 것 같고 친구는 흑풍대 출신인 것 같군. 친구들도 보내줄게. 이유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는 내 새끼와의 의리를 지킨 보답으로. 그리고 이건 우리들 넷만의 비밀이야. 명심해.”
그 말이 끝난 직후, 두 사람이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장시간 막혀 있던 혈이 풀리자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것이다.
그 후, 백리우가 돌아서더니 뒷짐을 지고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방향은 동쪽이었다.
청룡이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지만, 저 거인의 등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주의 전음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다시 만나게 될 때 건강한 모습이길 빈다. 아까도 말했지만 끼니는 잘 챙겨 먹거라.]
청룡의 눈자위에 또다시 물기가 가득해졌다.
한동안 혼자서 말없이 걷던 백리우가 입을 열었다.
“익. 나와서 함께 걷자. 왠지 쓸쓸해서 말이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표익이 백리우의 바로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함께 걷기 시작한 후로도 백리우는 말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뒤쪽에서 표익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렇게 보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멋있지 않았나? 그 얼마나 무림맹주다운 모습이냐. 협객들의 지도자라면 그 정도 배포는 보여줘야지. 암.”
백리우가 스스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표익이 미세하게 웃었다.
“그래도 배반자를 그렇게 보낸다는 건 좀…….”
“그러니 너도 안심하고 배반해. 너라면 말도 한 필 내어 줄 의향이 있으니.”
그 말에 표익이 또다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게 아니오라, 문상 어르신도 결국 이 일을 알게 될 텐데, 어떻게 하실 작정인지를 여쭌 거였습니다.”
“뭘 어떻게 해. 혼 좀 나고 마는 거지 뭐.”
“크게 혼나실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래서 아까 도망쳤던 놈들 중에 세 놈은 생포한 거 아니냐. 그 정도면 윤이도 적당한 선에서 마음 풀 거야.”
“부디 그러시길 빕니다.”
잠시 후에 표익이 또다시 물었다.
“이대로 계속 가시면 묵룡조장 쪽에서 멀어집니다.”
“사천지부로 갈 거야.”
“묵룡조장을 더 따라가시지 않고요?”
“무사한 거 봤으니 됐어. 영약발이 제대로 받았는지 그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고. 그런데 그 녀석, 흑풍대주랑은 또 언제 인연을 맺었대?”
신룡대 최고의 고수가 흑풍대주와 교통한다는데, 무림맹주가 그 사실에 대해 염려하기는커녕 오히려 대견스러워한다.
그런데 문제는 표익도 비슷한 표정이라는 점이었다.
표익이 대꾸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맹주님과 쌍벽을 이루는 분이 아니시겠습니까.”
“아니야, 틀렸어.”
백리우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녀석이 나보다 더 뛰어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