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재회 (1)
한설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실제로도 믿기가 힘들었다.
이게 현실일 리가 없었다.
어떻게 저 목소리가 이곳에서, 지금 이 순간에 들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다리 건너편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은 분명,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여전히 믿어지지는 않지만.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너무 크게 놀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감격에 겨워 목이 메어온 탓이 더 컸다.
“묵……?”
청룡이 내뱉은 짧은 한마디에도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도 믿을 수 없다는 어조였다.
그랬다.
청룡의 말마따나 그는 단유소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던 연소운은 곁에 없고, 달랑 그 혼자였다.
단유소가 청룡에게 대꾸했다.
“우린 근래 다리를 마주하고 자주 만나게 되는군.”
“그러네.”
단유소도, 청룡도 서로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청룡이 물었다.
“그런데 이곳엔 웬일이야? 당신은 지금쯤 귀주에 있어야 정상 아닌가?”
청룡이 능청스러운 어조로 그렇게 묻자 단유소가 대꾸했다.
“가다가 중간에 발길을 돌렸어.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우리 애들이 위기에서 벗어났다더군. 대견한 녀석들이지.”
“그러네. 대견하네. 그래서 이곳에는 웬일이야? 우리와 합류해서 다시 한 소저를 호위하라는 임무라도 받은 거야?”
“응.”
“명령받고 좋았겠네? 전에 보니까 두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았거든. 어때? 다시 보니까 좋아?”
“응.”
연이어 짧게 대꾸한 단유소가 청룡에게 물었다.
“그보다도 지금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
단유소의 말에 청룡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아, 약간의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그 사정을 듣고 싶은데.”
단유소의 말에 청룡은 또다시 씩 웃어 보일 뿐,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말 못 할 사정인가 보군. 뭐,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으니 그렇다 치지. 어쨌거나 마지막에 살짝 들어보니 그녀가 당신의 호위를 받지 않겠다고 하던데. 그럴 경우에는 당신 말대로 대상자의 뜻을 존중하게 되어 있고. 그러니 이쯤에서 그녀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겠어.”
단유소가 곧바로 한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 소저는 지금 그러니까, 무림맹 차원의 호위 자체를 거부하겠다는 뜻이야?”
한설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청룡조의 호위에 한해서만 거부하겠다는 뜻이야?”
그러자 한설연이 살며시 고개를 돌려 청룡의 눈치를 살폈다. 단유소는 멀리에 있고 청룡은 지척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현재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건 청룡이니까. 한마디로 자신은 현재 인질인 상황이니까.
한설연이 또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다시 한번 물었다.
“그렇다면 내 호위는?”
이번에도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단유소가 청룡에게 말했다.
“확인했지? 이쯤 되면 얘기는 끝난 것 같은데.”
청룡이 씩 웃으며 물었다.
“역시, 둘 사이에 뭐 있지?”
단유소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현 시간부로 현월곡의 한설연 소저에 대한 호위 임무는 내가 다시 맡도록 하지. 이상.”
말을 마친 단유소가 걸음을 옮기며 한설연 쪽으로 다가갈 때였다.
“정지.”
청룡이 짧게 말하자 단유소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러지?”
“미안하지만 그녀를 넘겨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이유는?”
“나한테 그녀가 필요하거든.”
그러자 단유소가 고개를 살짝 비틀며 되물었다.
“알아듣게 설명을 좀 해주겠나?”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확실한 건 그거야. 나는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서로 힘들게 고생만 해온 삶이라는 걸 너무 잘 알거든. 게다가 전에도 얘기했지만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 그래서 더더욱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적어도 지금은.”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고 당신이 한 말들도 이해가 안 되는군.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왜 한 소저를 핍박하려 하고, 왜 나를 다치게 하네, 마네 하는 소리들을 하는 건데?”
“굳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결론은 간단해. 당신은 그저, 내가 하지 말라면 안 하면 되는 거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마저도 무사하지 못해. 난 그게 싫다고.”
그러자 단유소가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청룡에게 물었다.
“누구한테서? 당신한테서? 아니면 당신의 뒤쪽에 몸을 숨기고 있는 저 사람들한테서?”
“둘 다에게서.”
청룡이 히죽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단유소도 그를 보며 웃었다.
한설연의 시선은 단유소에게 고정된 상태였다.
겨우 며칠 못 본 것뿐인데, 실로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도감이 들었다.
단유소라는 존재는 그런 존재였다. 그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시야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존재였다. 적어도 자신에게만큼은.
이 상황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여한이 없다. 영영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으니까.
이어서 든 감정은 미안함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게 되어 또다시 그에게 짐을 지운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지웠던 짐만 해도 너무 많아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인데.
‘이번엔 결코 단 공자님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 다쳐도 내가 다치고, 죽어도 내가 죽을 거예요.’
한설연이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였다.
[잠자코 잘 들어, 한 소저. 지금부터 내가 물어보는 말에 육성이나 전음으로 답하면 안 돼. 오로지 신호로만 대답해야 해. 눈을 짧게 깜빡이는 것은 긍정, 눈을 길게 깜빡거리는 것은 부정이야. 내가 설령 부정형으로 물어봐도 그게 맞으면 눈을 짧게 깜빡이는 거야. 잘 모르겠으면 눈을 여러 차례 깜빡거려. 알았어?]
단유소의 전음이었다. 입술을 전혀 달싹거리지 않는 특유의 방식이었다.
그는 현재 청룡과 대화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따로 전음까지 보낸 것이다.
한설연이 눈을 짧게 한 번 깜빡거렸다. 단유소가 바라는 방식으로 답한 것이다.
그러자 단유소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잘했어. 먼저, 다친 덴 없어?]
한설연이 눈을 짧게 깜빡거렸다.
그 후에 단유소는 또다시 청룡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와중에 그의 전음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다면 혹시 그가 당신의 혈도를 제압했어?]
이번에는 한설연이 눈을 길게 깜빡거렸다.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는 거지?]
한설연이 눈을 짧게 깜빡거리자, 단유소가 청룡을 바라보는 상태에서 다시 전음으로 물었다.
[당신, 왼쪽 소매에 감추고 있는 거, 혹시 단검이나 비수야?]
한설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마따나 자신은 현재 역수의 형태로 비수의 손잡이를 잡은 채 그것을 소매 안에 감추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청룡을 상대로 기습이 통할 리는 만무하니, 만약의 상황이 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한 용도였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대체 어떻게 알아챘단 말인가.
한설연이 짧게 눈을 깜빡이자 단유소가 다시 전음으로 물었다.
[그에게 들켰나?]
현재 단유소는 자신의 좌전방에, 청룡은 우측에 있는 상태였다. 즉, 청룡은 자신의 왼손을 볼 수 없는 위치에 있지만 단유소는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들키지 않은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를 일이었다. 고수들은 무기가 발산하는 예기를 느끼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리고 청룡도 고수였다.
결론을 내린 한설연이 눈을 짧게 여러 차례 깜빡거렸다. 잘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확실치 않은 정보를 주는 건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였다.
[알았어. 일단 대기해. 절대로 섣불리 움직이거나 반항하지 말고, 괜한 얘기를 해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도 마. 알겠지?]
한설연이 짧게 눈을 깜빡였다.
그 후로는 한동안 단유소와 청룡의 대화가 이어졌다.
단유소는 호위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만 청룡에게도 보이게끔 의사를 표현하라 했을 뿐, 그 외의 다른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다.
그 후, 다리 위로 걸어오던 단유소를 청룡이 멈추게 했을 즈음이었다.
[이따가 내가 신호하는 즉시, 쥐고 있는 비수를 그대로 놔. 절대로 그를 향해 던지거나 하지 말고, 떨어뜨린다는 개념으로 그냥 놓기만 해. 동시에 바로 옆의 난간으로 낮고 빠르게 도약해서 입수하는 거야.]
단유소의 전음이 바로 이어졌다.
[물살이 세니까 다칠 수도 있어. 그러니 각오하는 게 좋아. 떠내려가다 보면 저 아래쪽에 수면 위로 밧줄이 보일 거야. 그러니 집중해서 꼭 그 밧줄을 잡아. 그곳에 소운이가 대기하고 있으니, 이후에는 녀석의 말에 따르면 될 거야.]
단유소의 전음은 거기에서 끝났다.
한설연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 묻고 싶었다.
‘그러면 단 공자님은요?’
단유소와 청룡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이곳에는 청룡 말고도 다른 조력자들이 있는 듯했다. 아까 단유소가 말하는 투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그 조력자들이 청룡조원들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다른 적들이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단유소가 위험해질 것이다. 적들이 얼마나 무서운 자들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섣불리 수긍의 뜻을 표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식이면 결국 또다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그를 사지로 몰아넣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까.
‘아아…….’
이게 아니었는데. 그를 힘들게 할 거면 차라리 자신이 죽는 편이 나은데.
한설연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시금 단유소의 전음이 들려왔다.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대강은 알겠는데,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다면 거기까지만 해. 알다시피 당신만 무사히 빠져나가면 나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어. 그리고 시간 없어.]
결국 한설연이 쓰라린 심정으로 눈을 짧게 깜빡였다.
단유소가 씩 웃으며 청룡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하면 만족하겠어?”
“뒤돌아서 그냥 가. 진심으로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그 말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현명한 선택이야.”
“당연하지. 신룡대에 여자 하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포기할 등신도 있나?”
청룡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한 발을 뒤로 뺐다. 그 상태로 신형을 반쯤 돌리던 그가 고개를 돌려 한설연에게 말했다.
“인생에는 때때로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있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단유소의 전음이 한설연의 뇌리를 때린 건 바로 그때였다.
[지금!]
그러자마자 한설연이 비수를 쥐고 있던 손을 폈다.
동시에 그녀가 상체를 비틀며 난간 쪽으로 낮게 도약했다.
“이런……!”
청룡이 깜짝 놀라며 한설연을 향해 움직일 때였다.
슉―
짧은 파공음이 들렸다 싶은 순간, 날카롭고 강력한 무언가가 청룡의 가슴을 향해 빠르게 짓쳐들었다.
한설연이 들고 있던 비수였다.
청룡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커졌다.
‘강기……!’
단순히 비수가 강기를 머금고 있기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강기야 자신도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니까.
문제는 가뜩이나 가까운 거리인데 비수가 날아오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날아오는 방향이 오묘하여 흘리거나 피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막을 수밖에 없는 공격인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공간을 격한 채로, 비수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니.
‘이게 묵룡의 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