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도주 (2)
“저……, 잠시만 자리 좀 비울게요.”
한설연이 아랫배를 한 손으로 감싼 채로 약간 민망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말하자 부조장이 얼른 대꾸했다.
“아……, 다녀오십시오.”
용변을 보고 오겠다는 뜻임을 알아챈 것이다.
한설연이 여전히 민망한 미소를 보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윽고 조원들의 시야를 벗어나 수풀 사이로 접어든 순간, 그녀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앉아서 많은 고민을 했다.
결론은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못 해보고 무기력하게 당하면, 결국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어 저들의 손에 놀아나게 될 터였다.
가만히 앉아서 그렇게 될 수는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뭐든 시도해야 했다.
죽음이든 삶이든, 적어도 스스로 선택할 기회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결정했다.
몰래 이들에게서 벗어나기로.
그렇다면 지금이어야 했다.
이제 점점 북쪽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터였다. 특히 청룡이 정찰을 나간 이 순간이 최고의 기회였다.
일이 잘못될 상황에 대비하여 오는 길에 지형들을 유심히 살폈었다. 혹시 도주하게 되면 다시 남쪽으로 향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일단 지금은 초반에 어떻게 이들에게서 벗어나느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그 계획은 방금 전에 세워두었다. 다만 청룡이 정찰을 핑계로 후방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며칠을 함께해본 바, 청룡조원들은 하나하나가 처음 봤을 당시의 연소운보다도 더 뛰어나 보였다.
따라서 일이 잘될 가능성보다는 잘못될 가능성이 더 컸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필시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여태껏 용변을 보러 다닐 때에도 최대한 청룡조의 기척에 집중했었다. 혹시 저들이 그런 순간에도 감시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결과적으로 감시를 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저들은 실력이 뛰어나니 자신이 눈치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저들에게서 불과 몇 걸음 떼지 않은 지금 이 순간에도 두렵기만 하다.
한설연이 그 두려움을 떨쳐내고자 이를 악물었다.
이왕 결심을 했으면 성사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단 한 번의 기회다. 두려움에 억눌려서 일을 그르치는 우를 범할 수는 없다.
혹여 일이 잘못되어 저들에게 붙잡힐 상황이 되면 주저 없이 자결할 것이다. 그편이 저들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휘둘리며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자결할 각오는 단유소와 함께할 당시에도 몇 번이나 했었다. 지금이라고 못 할 것도 없다.
만약 그간의 강호 경험이 없었다면 이런 시도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유소와 함께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겪다 보니 이런 용기도 생긴 것이다. 그래서 단유소에게 더욱 고마웠다.
‘제게 힘을 주세요, 단 공자님.’
유독 그가 많이 생각나는 밤이었다.
평소 용변을 보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시간은 짧으면 반각 남짓, 길면 일각 남짓이었다. 청룡조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봇짐을 자리에 놓고 온 건 보다 가벼운 몸으로 도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청룡조원들을 더욱 안심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게 약간의 시간을 더 벌어주긴 할 것이다.
고로, 몰래 저들을 벗어나기 위해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일각 반 정도일 터였다.
일행들에게서 벗어난 한설연은 빠르게 근처의 수풀을 뒤지고 다녔다. 누가 봐도 급하게 용변을 해결하기 위해 서두르는 모양새였다.
그녀가 적당한 수풀을 찾아 용변 보는 모양새를 취하기까지는 반의반각 정도가 걸렸다.
혹시라도 청룡조의 감시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그 상황에 대비한 움직임이었다. 조심할 건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그 상태로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한설연이 서서히 기척을 죽이며 쭈그리고 앉았던 다리를 폈다.
허리를 굽히고 몸을 낮춘 그녀가 이윽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너무 긴장되어 등줄기가 서늘했지만, 한설연은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제발……!’
만약 청룡조에게 발각된다 해도 지금은 아니어야 했다.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보고 허무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곧 그녀가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어 왼손에 쥐었다.
발각되는 순간,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심장을 찌를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고양이 걸음을 걸으며 청룡조에게서 어느 정도 멀어진 순간, 한설연은 서서히 이동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확실히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녀가 나는 듯이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한설연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현재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왔던 길과 방향은 비슷했지만 고스란히 그 길을 밟지는 않았다. 오면서 눈여겨봐 둔 지형들 중에서 눈에 띠지 않을 지형들만을 골라서 경로로 삼았다.
달리는 와중에도 한설연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어디로 향해야 청룡조와 적의 예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중이었다.
일단 안전할 수 있는 곳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청성파, 그다음이 사천당가였다. 이곳에서는 거의 같은 방향에 위치해 있다.
무조건 안전하고 가까운 곳으로 피신하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했다.
‘상황이 다급하니 내가 청성파 쪽으로 향할 것이라고 예측하겠지. 상식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기도 하고.’
청성파든 당가든 이곳에서는 남동 방향이었다.
‘두 번째 선택지는 무림맹 사천지부. 그쪽은 이곳에서 거의 동쪽 방향.’
그곳 또한 그들의 예측 범위 안에 있을 터였다. 상당히 높은 가능성으로.
‘세 번째는 아미산.’
아미산은 지금의 위치로부터 거의 정남향에 가까웠다.
아미산 또한 적의 예상 범위에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나마 현실적인 예측 가능성은 가장 낮은 곳이었다.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예상 범위에서 벗어나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달리는 와중에 잠시 고민하던 한설연의 눈동자에 한순간 결심의 빛이 섰다.
‘목표는 아미산. 하지만 정남방으로 가지 않고 서남쪽으로 우회하는 거야.’
그 방향이라면 왔던 경로와 유사하다. 지형이 눈에 익기도 했으니 나쁘지 않다.
서남쪽 방향에는 의지할 만한 곳이 아무 곳도 없다. 흔적을 살피며 추적하지 않는 이상, 그들도 자신이 그 방향으로 향했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가뜩이나 흔적을 살피며 추적하기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비가 오면 땅이 질척거려 흔적이 더 잘 남기도 하지만, 반대로 최대한 주의한다면 흐르는 빗물에 흔적이 씻겨 나가게 할 수도 있다. 단유소와 함께하면서 배웠다.
논길을 따라 달리는 한설연이 최대한의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허억, 허억, 허억…….”
출발한 후로 얼마나 흘렀을까.
발은 열심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한설연의 호흡은 매우 가빠져 있는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청룡조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으로 경공을 펼친 여파였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살피며 조금 더 나아가던 한설연의 눈앞에 개울이 나타났다. 며칠 전에 처음 청룡과 만났을 때 마주쳤었던 시내보다 두 배 정도는 폭이 넓은 물줄기였다.
물줄기를 따라 조금 더 달리다 보니 반대편과 연결된 다리가 나타났다. 한설연이 지체하지 않고 다리 아래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비로 인해 물이 불어 있는 상태였지만, 물가의 상단에는 앉아서 쉴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후우, 후우, 후우…….”
천천히 호흡을 고른 한설연이 눈을 감으며 등과 뒤통수를 뒤쪽에 기대었다.
낮에도 비를 맞는 상태에서 하루 종일 강행군이었는데, 거의 쉬지도 못한 채로 또다시 달린 탓에 더 힘겹고 고단했다.
이대로 반 시진, 아니 일각만이라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몸보다 더 힘든 건 정신이었다.
청룡조에게서 벗어난 후로 지금까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정신력의 소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정신력 소모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강호에 나와서 몸이 힘든 일도 많았고 마음이 힘든 일도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 정신이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이유는 굳이 깊게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단유소.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홀로 남겨져 보니 확실히 알 것 같다.
그가 없는 이 강호가 얼마나 막막한 강호인지. 얼마나 힘겨운 강호인지.
잠시 그 생각을 하던 한설연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단유소가 그립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대는 신룡대다. 그 어마어마한 신룡대다.
어느 정도는 따돌렸다는 생각에 이런 식으로 방심하고 있어도 될 상대들이 아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꺼내어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한설연이 몸을 일으켰다.
잘해야 반각 정도 쉰 것 같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만으로도 휴식은 충분했다.
한설연이 다리 밑에서 빠져나와 평지 위로 올라왔을 때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흐어어어어억!”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한설연은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놀랐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다리 위의 난간에 누군가가 여유로운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목소리를 통해서 이미 정체를 확인했지만, 그는 바로 청룡이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그는 대체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던 걸까.
그래도 추적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온 걸까.
청룡이 입을 열었다.
“한 소저께서 사라진 것을 알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볼일을 보러 가셨다고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시니, 혹시 그 와중에 적의 수중에 넘어간 건 아닌가 하고 엄청 걱정했습니다.”
정말로 걱정했다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가 지금처럼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지 않고, 실제로도 걱정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다면.
한설연이 여전히 놀란 상태로 말이 없자 청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무리 조사해봐도 적으로 추정되는 다른 이의 흔적은 없더군요. 반항한 흔적도 없고, 오로지 한 소저 한 사람의 흔적만 남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게 무얼 뜻하는 건지 진심으로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의아합니다. 말씀해주십시오. 이 상황을 대체 제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겁니까?”
그는 지금 몰라서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능청스럽게도 저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설연은 이 상황이 더더욱 무서웠다.
또다시 대답이 없자 청룡이 고개를 돌려 한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어? 대꾸가 없으시군요? 표정에도 여전히 경계심이 가득하고요. 그렇다면 설마……, 저희들이 싫어서 떠나신 겁니까?”
청룡이 한설연의 표정을 확인하며 다시 물었다.
“정말로 그런 겁니까? 아니,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너무나도 의아합니다. 저희들은 한 소저를 호위하는 사람들입니다. 여태껏 충분히 잘 지켜드렸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아쉽거나 서운한 점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만약 그랬다면 말씀을 하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저희들이 최대한 배려를 해드렸을 텐데요.”
“그만…… 하세요.”
떨리는 심정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났다. 아무리 진정을 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청룡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뭘 그만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건지……, 조장님도 이미 아시잖아요…….”
“통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에 한설연이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제가 이제부터 청룡조의 호위를 마다하겠다면……, 이대로 저를 보내주실 건가요?”
그러자 청룡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한 소저에게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최대한 호위 대상자의 뜻을 존중하라는 것이 신룡대의 지침이기도 합니다.”
적극적으로 수긍한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청룡의 입가에는 위험한 느낌의 미소가 가득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다만, 그렇게 되면 저는 적도들의 은밀한 활동이 의심되는 이곳에서, 정체가 매우 수상한 한 명의 여인을 만난 게 되겠군요.”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져 갈 때 청룡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소생은 무림맹에 소속된 무인입니다. 소저의 정체가 매우 의심되는 바, 소생과 함께 가셔서 본 맹의 조사에 협조해주셔야겠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와중에도 한설연은 왼쪽 소매에 감추고 있던 비수를 꽉 움켜쥐었다.
다리 건너편에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정체는 내가 보증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