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74화 (74/200)

74화. 도주 (1)

진평을 비롯한 모든 묵룡조원들이 도착했을 때, 단유소는 한 그루의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까 얼핏 보니 나무에 생긴 검흔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시진 지나지 않은 흔적으로 보였습니다.”

진평이 그렇게 말하자 서백풍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나무에 생긴 상흔과 나무 아래의 발자국을 보니 누군가가 이곳에서 검술을 수련했겠군요. 발자국의 크기, 평균 보폭, 검흔이 생긴 높이 등으로 볼 때 여성이었던 게 확실합니다. 성인 여성이거나, 성인 여성에 준하는 신장의 소녀였을 겁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곽승추가 입을 열었다.

“발자국이 일정한 법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보법의 흔적이니 무공을 익힌 여성이었을 겁니다. 다만 무공 실력 자체는 어설픈 수준으로 보입니다.”

“나무에 생긴 상처가 매우 얕습니다. 나무를 최대한 상하지 않게 하려고 신경 쓴 느낌입니다. 맹렬하게 검술을 수련했던 것 같지는 않고, 초식 단련 위주로 수련을 했던 모양입니다.”

연소운이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을 보탰다. 조원들 모두가 각자 관찰한 바와 느낀 바를 차례로 말한 것이다.

그러자 묵묵히 조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유소가 연소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소운이는 좀 더 관찰해봐. 발자국 위주로.”

“아, 예…….”

연소운은 의아했다. 그러나 곧 나무와 주변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단유소가 저러는 데에는 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던 어느 순간, 연소운이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가 곧바로 단유소를 향해 말했다.

“알 것 같습니다.”

단유소가 미소 띤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연소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보법은 한설연 소저의 보법입니다.”

“정말이냐?”

진평이 놀라며 묻자 연소운이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한 소저와 비무를 많이 해봤기에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발자국을 유심히 보다 보니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장님도 제게 더 관찰하라고 하셨을 거고요.”

그러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앞으로는 더 빨리 알아채야 한다.”

“알겠습니다.”

곽승추가 고개를 갸웃하며 연소운에게 물었다.

“그런데 한 소저의 무공이 이 정도로 엉성하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훌륭한 실력입니다.”

“한데 왜…….”

곽승추가 고개를 갸웃하자 진평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수련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조원들의 눈동자에 놀람이 담길 때 단유소가 말했다.

“진평의 말이 맞아. 한 소저가 표식을 남긴 거야.”

그러자 진평이 단유소에게 대꾸했다.

“나무를 기준으로 남서쪽 방향에서 북동쪽으로 검을 찔렀습니다. 아마도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이동한다는 뜻일 겁니다.”

“내 생각도 그래.”

“그리고 표식을 남겼다는 건 아마도…….”

“그녀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는 뜻이겠지.”

단유소가 그렇게 대꾸하자 이번에는 서백풍이 말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청룡조 앞에서는 엉성한 척하고 있다는 거군요. 제법인데요?”

그 말에 단유소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단유소의 표정을 확인하던 서백풍의 눈동자가 이채를 발했다. 단유소가 그러도록 유도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그러자 진평이 정리하듯 말했다.

“한설연 소저 자신에게 불미스러운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그 경우에 대한 대비인 거군요.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을 경우, 이번 일에 대해서 잘 아는 조장님이 어떤 식으로든 투입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조장님이라면 이 표식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평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시죠. 쉴 만큼 쉰 듯한데.”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쯤, 청비를 비롯한 묵룡조의 매들이 하늘 위에 나타났다.

“이번엔 녀석들이 늦었군요.”

서백풍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단유소가 경공을 펼치며 튀어 나갔다. 북동쪽 방향이었다.

서둘러 그 뒤를 쫓으며 곽승추가 말했다.

“부조장님, 조장님한테 천천히 좀 가시라고 해요. 따라가기가 아주 죽을 맛이라고요. 영약 못 먹은 사람은 이거 서러워서 살겠어요?”

진평이 알겠다는 듯 빙그레 웃을 때 그 뒤에서 달리던 서백풍이 곽승추에게 말했다.

“모르겠냐? 조장님이 저러시는 건 한설연 소저를 매우 염려하고 있다는 뜻이야. 둘 사이에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

“아……! 그렇구나! 역시 형님!”

조원들 모두가 속도를 배가할 때 청비를 비롯한 묵룡조의 매들도 같은 방향을 향해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 * *

또다시 하루가 지난 저녁.

한설연은 청룡조원들과 어울려서 사소한 대화들을 주고받으며 육포를 뜯고 있었다. 저녁 식사였다.

“저를 좋아해주시는 거야 정말 감사한데……, 제 입장에서는 그게 또 민망한 일이기도 하거든요. 그분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는데 결국 저 때문에 그러고 계신 거니 죄송스럽기도 하고요. 곡에서도 제발 돌아가시라고 열심히 권고하는데, 도통 듣지를 않으셔서…….”

어쩌다가, 현월곡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교월 친위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청룡조원들이 관심을 보이는 통에 그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청룡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렇다고 해서 강제로 내쫓을 수도 없는 일이니 정말 난감하시겠군요.”

“예. 강제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죠. 그분들이 계신 곳은 현월곡 소유의 땅도 아니니, 우리가 그럴 권리도 없고요.”

“한 소저의 잘못도 아닌데 괜히 미안해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갑니다. 괜히 그 사람들 때문에 괜히 한 소저께서 욕을 듣는 경우도 있으니 그때마다 마음이 더 안 좋으실 것이고…….”

청룡의 말에 한설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부조장이 말했다.

“그 사람들도 참……, 적당히 좀 할 것이지. 도를 넘으니 사내 망신 소리를 듣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원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부조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제법 이름난 청년 고수나 명문의 후기지수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어, 그들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잖습니까. 간혹 한 소저에 대해 들리는 악소문은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들 때문일 겁니다. 그 가족이나 지인들 눈에는 얼마나 더 한심해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한 거겠지요. 하여간 이래저래 한 소저만 힘드시겠습니다.”

그러자 한설연이 대꾸했다.

“예전에는 제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왜 욕을 들어야 하는지 억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괜찮아요. 다만, 그분들이 제발 저 같은 사람 때문에 인생을 낭비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고 있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청룡이 대꾸했다.

“심정이야 이해가 갑니다만 너무 마음 쓰지는 마십시오. 그런 걸로 자꾸 신경 쓰면 한 소저 본인에게 해롭습니다.”

“예, 조장님. 염려해주시고 위로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위로 말씀 몇 마디 드린 것뿐인데 이게 뭘 대단한 거라고요.”

한설연이 빙그레 웃어 보인 후에 물었다.

“이곳에는 얼마나 머무실 건가요?”

“오늘 하루, 이동이 고되기도 했으니 두 시진쯤 머물 계획입니다.”

“알겠어요. 이따가 또 이동해야 하니 저는 운기조식을 좀 하면서 쉬어야겠어요.”

“그러십시오.”

한설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의 나무 아래로 향했다.

어제는 조원들의 시야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서 휴식을 취했지만 오늘은 일부러 그들의 시야에 닿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누가 봐도 어제보다 청룡조를 더 신뢰하고 있다는 표정과 태도였지만 한설연의 속내는 달랐다.

‘예상보다 훨씬 더 북쪽으로 이동했어.’

그 과정에서 청룡은 적의 매복을 피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댔다.

물론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건 방향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났다. 북쪽은 적의 영역이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다. 무림맹 사천지부로 향한다고 보기엔 너무 말도 안 되는 방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도 적의 낌새는 없었다.

물론 애초에 청룡이 알아서 적을 피하고 있기에 자신이 적의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수는 있다. 그게 청룡과 자신의 실력 차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가 뛰어나다고 해도 단 공자님보다 뛰어날 수는 없어.’

사천은 중심부로 갈수록 평지이다. 이런 지형에서라면 설령 단유소라 해도 적의 이목을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흘간이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상식적으로 매우 낮다. 여태껏 겪어온 적의 성향을 생각해볼 때 분명히 그렇다. 가뜩이나 언제 청성파나 당가가 개입될지 모르니, 적들도 서둘러서 일을 처리했어야 옳다.

그런데 청룡은 아무런 위기도 겪지 않고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니 한설연으로서도 더욱 청룡조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점점 두려워졌다.

아직 심증만 있고 실제적인 증거는 별로 없는 상황이지만, 만약 청룡이 이상한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은 빼도 박도 못 하고 저들에게 붙들리는 상황이 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두렵고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도 두렵다. 그런 자신의 신세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입게 되는 건 아닌지도 두렵다.

자신을 인질 삼아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두려운데도 불구하고 청룡조에게 더 친밀한 척하고 더 신뢰하는 척하는 건, 그들이 자신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의 상황을 생각해서 오늘도 이동하는 와중에 이따금씩 표식을 남기긴 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들킬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었는지 모른다.

‘눈치채지 못했겠지?’

제발 그러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며, 한설연이 운기조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에는 새벽부터 해가 나지 않는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처럼 장대비는 아니었지만 빗줄기는 굵어졌다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하루 종일 내렸다.

이 정도 내렸으면 그칠 법도 한데, 빗줄기는 저녁 무렵이 되어서도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굵어지는 모양새였다.

청룡조는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은신처를 찾기가 애매한 평지 지형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다소 힘들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일단 안전하게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합니다.”

청룡이 그렇게 말한 후로도 반 시진 이상을 더 달려서야 야산이 이어지는 지형이 나왔다.

산으로 진입한 후에도 청룡조는 한동안 은신할 만한 곳을 찾아 다녔다.

일행은 결국 적당히 비를 피할 수 있으면서도 몸을 숨길 만한 빽빽한 나무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 정도에서 만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룡의 말마따나 어쩔 수 없었다.

청룡조원들과 한설연은 최대한 비를 덜 맞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저녁 식사를 겸한 육포를 뜯었다.

피풍의를 여민 채로 육포를 뜯고 있는 한설연을 향해 청룡이 말했다.

“이 상황에서는 어차피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약간의 휴식을 취한 후에 또 이동을 시작해야 할 듯합니다. 그러니 되도록 많이 드셔두는 게 좋을 겁니다.”

“예, 조장님.”

그러자 청룡이 자신이 걸치고 있던 피풍의를 벗어서 한설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추운 모양인데 일단 이것도 걸치고 계십시오.”

“그, 그렇게까지 춥지는 않은데…….”

“그래도 걸치고 계십시오. 최대한 체온을 유지해두는 편이 나을 겁니다.”

한설연이 결국 청룡의 피풍의를 받아서 자신의 피풍의 위에 걸쳤다.

“그럼 저는 잠시 인근을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조심히 다녀오세요.”

한설연이 걱정 가득한 투로 그렇게 말하자 청룡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윽고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한설연은 눈을 감으며 나무에 뒤통수를 기대었다.

오늘도 청룡조는 거의 북쪽으로만 이동했다. 간혹 동쪽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저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도에 불과했다.

이쯤 되면 확실해졌다고 봐야 했다.

‘청룡조는 지금 무림맹 사천지부로 향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현재 청룡조가 향하고 있는 북쪽은 적의 영역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의 결론만 남는다.

청룡조가 어떤 식으로든 그들과 긴밀한 관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

그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두려워하며 절망이나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청룡조 모두가 적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나름의 대책을 세워야 할 때였다.

‘당황하면 안 돼, 한설연. 차분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