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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73화 (73/200)

73화. 묵룡조 (4)

“불편한 점은 없으신지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어둑한 시각.

쉬고 있는 한설연의 뒤쪽에서 다가오며 그렇게 물은 사람은 바로 청룡이었다.

한설연이 바로 일어서며 대꾸했다.

“아! 예, 조장님. 모두들 너무 잘해주셔서요. 정말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러자 청룡이 다가와서 한설연이 앉아 있던 바위의 옆에 앉았다. 한설연도 앉자 청룡이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도착해야 하기에 걸음을 서두르고 있는 건데, 따라오기가 힘들지는 않으시고요?”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최대한 제 걸음에 맞춰주고 계시잖아요. 배려에 감사드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걸음이 느려서 송구할 따름이에요. 아직 실력이 일천하여…….”

단유소와 헤어진 후로 이틀째 되는 저녁이었다.

그간 청룡조는 서둘러 이동했지만, 한설연이 힘들다고 하면 꼬박꼬박 휴식을 취하게 해주었다.

“아이고,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 소저께서도 충분히 빠르십니다.”

한설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청룡이 말했다.

“그는 어땠습니까? 불편함 없게 잘해줬습니까? 같은 조직에 속해 있긴 한데 만나기가 힘든 사람이거든요. 우리 조직 안에서도 최고로 통하는 그는 평소 어떤 식인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단유소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고 한설연이 대꾸했다.

“음……. 일단 정말 고마운 분이신 건 확실한데…….”

“한데?”

한설연이 주저하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좀……. 무뚝뚝한 분이셨어요.”

“역시 그답군요. 하하!”

그러자 한설연이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청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뭘 물어봐도 짧게만 대꾸해주시고. 친절한 느낌은 아니셨죠.”

“하하. 이해합니다.”

“그분에 비하면 조장님과 청룡조원들은 완전 친절하신 거예요.”

“한 소저에게서 인정을 받으니 이거 영광입니다. 묵룡에 비해 실력이 달리는 건 사실이니, 이런 거라도 잘 해야지요.”

“무슨 말씀이세요. 물론 묵룡조장님이 최고의 실력자라는 소문이야 널리 퍼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룡조장님이나 다른 조장님들이 부족하신 건 절대 아니죠.”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아주 힘이 팍팍 솟는데요?”

청룡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강호에 나와서 보니 조장님처럼 강한 분들을 보면 정말 부러워요. 저는 이렇게 약해 빠져서 항상 민폐만 끼치고…….”

“이번이 초출이라고 하셨지요?”

“네.”

“처음에는 다 그렇습니다. 다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서 조금씩 강해지는 겁니다. 현실을 보고 나면 동기부여가 확실하게 되니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도 처음에는 실수투성이에 엉망진창이었습니다. 하하. 오히려 한 소저께서는 잘 해내고 계신 겁니다.”

단유소도 저런 말을 했었기에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설연은 짐짓 놀란 척하며 대꾸했다.

“설마요! 조장님처럼 강한 분이 그러셨을 리가……!”

“처음에는 누구나 그런 겁니다. 최고라 불리는 묵룡에게도 아마 그런 시절이 있었을 거고요.”

“쉽게 믿어지지는 않지만 믿어야겠죠?”

“그럼요. 이 강호가 제게 가르쳐준 수많은 교훈들 중에 제가 가장 중요시하는 교훈은, 고수가 하는 말을 들어서 손해 볼 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하. 그렇군요. 저도 조장님의 말씀을 더 명심해야겠는데요?”

“소저께서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십니다.”

두 사람이 빙그레 웃었다.

잠시 말이 오가지 않던 중, 청룡이 갑자기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었다.

한설연이 보니 작은 가죽 주머니였다.

청룡이 가죽 주머니를 한설연 쪽으로 내밀더니 말했다.

“드시겠습니까?”

“뭔데요?”

“술입니다.”

“아…….”

잠시 머뭇거리던 한설연이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딱히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단유소가 들었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러시군요.”

어쨌거나 청룡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가 마개를 열고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크으.”

잠시 기분 좋게 인상을 찡그리던 청룡이 한설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임무 중에도 간혹 술 생각이 날 때가 있어서 이렇게 몰래 두세 모금씩 마시곤 합니다. 물론 한 소저를 호위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청룡 정도의 고수라면 체질적으로 아무리 술이 약해도 두세 모금 정도의 주독은 금방 배출해낼 수 있다.

“조장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조절하시겠어요. 편하게 드세요.”

“그리고 이건, 공식적으로는 비밀입니다.”

“물론이죠.”

그러자 청룡이 술을 다시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후에 고개를 돌리더니 물었다.

“그는 술 안 먹던가요?”

“예. 한 번도요. 사실, 술을 준비하거나 마실 만한 여유가 별로 없기도 했고요.”

단유소를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러자 청룡이 말했다.

“그는 정말 대단하군요. 역시 최고라 그건가? 저는 긴장감이나 중압감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되던데.”

청룡이 그렇게 말한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설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룡대의 대단함에 대한 소문은 수도 없이 접했었어요. 실제로 겪어보니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다는 걸 느끼게 돼요. 그런 한편으로…….”

청룡이 다음 말을 기다리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많은 고충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묵룡조장님도 한 번씩 힘들어하는 느낌이었어요. 지금 보니 청룡조장님도 그런 것 같네요.”

그러자 청룡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조직 생활이라는 게 다 그렇지요. 큰 그림을 그리는 분들의 더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사실, 구성원들이 수고하는 것에 비하면 보상은 그야말로 겨우 먹고살 정도이니, 일방적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한설연이 묵묵히 있을 때 청룡이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인간이 모인 곳이면 어디나 다 비슷할 겁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 강자를 위한 약자의 희생. 그런 것들이 당연하다는 듯 주입시키고, 상황이 되면 그러한 희생들을 자연스럽게 강요하는 거지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어디나 비슷할 겁니다.”

청룡이 또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 제가 괜히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렸군요. 저 같은 칼잡이가 뭘 알겠습니까. 다만 조직 생활이야 어디든 비슷하니, 다소 힘든 상황이 있어도 그렇거니 하고 넘어가는 게 이롭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 즐기면서 말이지요.”

잠시 묵묵히 있던 한설연이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이라고는 고작, 힘내시라는 말씀 정도밖에 없네요.”

“하핫. 사실, 힘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문제입니다만, 그래도 한 소저께서 응원해주시니 기분은 좋은데요?”

한설연이 웃어 보이자 청룡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의 이목을 속이려면 밤을 이용하는 게 좋으니, 앞으로 이곳에서 한 시진 반 정도 쉴 겁니다. 그때까지 기력 보충하고 계십시오.”

“예, 조장님.”

“아! 그리고 경로를 약간 수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원래 우리가 잡은 경로가 비교적 안정적인 경로이긴 하나, 적들도 그 사실을 예측하고 있을 겁니다. 제가 방금 전에 일대를 둘러보며 정찰을 좀 해본 결과, 위험성이 다분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한 소저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그러자 한설연이 민망해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송구하게도……, 제가 뭘 아는 게 없어서요. 조장님이 전문가이시니 조장님의 뜻에 맡기겠습니다. 그저 수정하려는 경로가 대강 어떤 길인지 정도만 알려주시면…….”

“원래 아미파산과 청성산의 중간 지역을 경유하려고 했다는 건 알고 계시지요?”

“예.”

“적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려면 아예 청성산의 북쪽으로 이동하여 성도에 진입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후, 성도에서 사천지부까지는 확실히 안전할 수 있는 경로라서 말입니다.”

“아하.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조장님 뜻에 따를게요.”

“예, 소저. 그럼 쉬고 계십시오.”

청룡이 멀어졌을 때쯤, 한설연의 눈동자는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지난 이틀간 청룡과 청룡조원들은 자신을 그야말로 극진하게 모셨다. 덕분에 편안한 여정이었다. 청룡조의 배려가 참으로 고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단유소가 해준 조언 때문이었다.

“이 강호에서는 과도한 친절을 보이는 사람들을 특히 조심해야 해. 그게 적이든, 아군이든.”

그 말을 기억하며 적당한 선에서만 청룡조에게 맞춰주며 스스로를 감췄다. 청룡과 청룡조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단유소의 말처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여전히 적의 낌새는 없어.’

일단 그게 이상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그랬다.

분명히 그저께 단유소와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적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한데 단유소와 헤어진 후로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일행은 단 한 번도 적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지난 이틀간의 이동 경로는 평지에 자주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경로였다. 적의 이목을 속이기가 힘든 지형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아니고 이틀간이나 적과 마주치지 않은 것이다. 여태껏 겪어본 적들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벌어졌어야 할 시간과 상황임에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청룡조를 의심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실제로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고, 적들이 철저하게 준비하는 단계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방금 전에 청룡의 말을 들으니 또다시 이상하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경로를 바꿀 수는 있다. 그런데 굳이 청성산의 북쪽을 경유할 필요는 없었다. 여러모로 남쪽을 경유하는 게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적의 예측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는 건 대화를 나누던 중에 청룡이 풍기던 느낌 때문이었다.

조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의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아니, 또렷함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있었다.

묘한 이질감이 든 건 그때부터였다.

근거도 없고 불확실하지만, 그래서 육감에 불과하지만, 위험한 느낌의 눈빛이었다. 아직까지도 그 눈빛의 느낌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방심하지 말자, 한설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었다.

문득 단유소의 얼굴이 떠올랐다.

없으니 알 것 같다. 그가 얼마나 든든하고 큰 존재였는지.

하지만 이제는 단유소가 없다.

어떤 상황이든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한다.

마음을 다잡은 한설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검을 뽑았다.

이윽고 그녀가 기운을 이동시키며 천천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약간씩 엉성해 보이는 검술이었다. 청룡조원의 이목을 생각한 검술이었다.

픽! 픽!

한설연의 검극이 이따금씩 나무의 기둥을 살포시 찔렀다. 그러다가 운기조식을 취하고, 다시 검술을 수련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휴식 시간이 흘러갔다.

* * *

묵룡조는 먼 하늘 위를 날아가는 청비를 보며 이동하는 중이었다.

청비가 비교적 낮게 한 방향으로 날면 빠르게 그 뒤를 쫓았고, 청비가 허공 위로 높이 떠올라 멀리 선회하기 시작하면 휴식을 취했다. 그 과정의 반복이었다.

자정을 훌쩍 넘겨, 인시초(새벽 3시)에 가까워지는 시각.

한동안 청비의 뒤를 따라 달리던 묵룡조원들이 일제히 근처의 숲으로 들어섰다. 청비가 시야에서 사라졌으니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하아. 그놈의 청룡조 녀석들, 누가 신룡대 아니랄까 봐 따라잡기도 참 골치네요.”

서백풍의 말이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긴 할 텐데…….”

곽승추가 그렇게 대꾸했다.

한설연과 헤어진 뒤로 이틀이 지났다. 빠르게 달려온 터라 슬슬 뒤를 밟을 정도가 된 듯한데, 아직까지는 방향만 잡고 있을 뿐, 확실한 종적을 찾지는 못했다.

진평이 말했다.

“쉬기 전에 할 일들 해야지. 막내야, 가자꾸나.”

“예!”

진평이 연소운과 짝을 지어 한 방향으로 사라지자, 서백풍과 곽승추도 짝을 지어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인근의 숲과 은신처를 살피며 청룡조나 한설연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두 명씩 짝을 짓게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일각 안에는 돌아오게 했다. 단유소는 중간에서 대기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역할이었다.

네 사람이 사라지고 약 반 각쯤이 흘렀을 때, 진평과 연소운이 돌아왔다. 평소에 비해 복귀가 상당히 빨랐다.

“조장님, 저쪽에서 어떠한 흔적 같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뭔데?”

“누군가가 무공을 수련하며 나무를 조금씩 찌른 흔적입니다.”

그 말에 단유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향이 어디지?”

“남동쪽 방향에 있는 작은 숲입니다. 이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가볼 테니 백풍과 승추가 복귀하면 데리고 와.”

“예.”

그 직후, 단유소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진평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뜩이나 빨랐는데 영약 드시더니 이젠 아예 바람이 되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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