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묵룡조 (2)
거짓말이 제대로 통하게 하려면 많은 것을 준비해야 한다.
상대에 대해 면밀하게 파악하여 그가 최대한 믿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그러나 속이기 위해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그 거짓말이 사실에 얼마나 많은 기반을 두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의 비중이 높으면 높을수록 성공률도 더 높아지는 게 당연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청룡, 당신은 제법 훌륭했어.’
달리는 와중에 단유소는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아까 확인했던 명령서도 위조된 명령서였다는 말이 된다.
명령서를 상당히 자세히 확인했는데, 직인이든 필체든 위조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었다. 청룡 쪽에서 그만큼 정교하게 위조했었다는 뜻이다.
사실 의심조차 하지 않았었다.
신분을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그가 청룡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전에도 그를 만난 적이 있었고 그 특유의 기세를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신룡대가 같은 신룡대를 의심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의 신분을 확인했던 건 단지 절차에 불과했다. 청룡조원들과 연소운도 보고 있는 상황이니 후배들 앞에서 선배들이 절차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을 뿐이었다.
결국 청룡이 했던 모든 게 사실에 기반을 둔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조원들이 귀주에 있다는 것까지도 사실이었다.
상황이 그러하니 속아 넘어갈 수밖에.
그야말로 제대로 당했다.
‘하지만 청룡, 안타깝게도 당신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했어. 아니, 애초에 알 수가 없었겠지.’
바로, 묵룡조원들의 실제 실력에 관한 부분이다.
사람들은 신룡대 최고의 고수가 묵룡, 즉 자신이라 말하지만, 따로 최강의 조를 묵룡조로 꼽지는 않는다. 묵룡조는 그저 묵룡의 명성에 기대어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설연에게도 얘기했듯, 묵룡조는 조원들 하나하나의 역량도 대단하다. 무공 수준뿐만 아니라 일 처리 능력도 뛰어나다.
그게 바로 묵룡조의 감춰진 힘이다. 모두가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교류가 없으니 심지어는 신룡대 내에서도 그 사실을 모른다.
청룡의 거짓말이 이렇게 빨리 들통난 것도 그 이유에서다. 묵룡조원들의 역량이 그의 예상 범위를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다행인 건, 설화를 미리 그쪽으로 보내놓았다는 점이다.
습관과 같은 최소한의 대비였다.
혹여 청룡조가 마주치게 될 적들 중에 전에 만났던 백의 사내 같은 자들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자들을 만나면 아무리 청룡과 청룡조라 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한설연의 종적을 아예 찾을 수 없게 된다. 적은 치밀한 자들이니 흔적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설화를 그쪽으로 보낸 건 그런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설연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부수적으로 무림맹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무림맹에서는 아직까지 적에 대한 정보를 거의 모른다. 본거지는 물론이고 지부에 대한 정보도 거의 없다.
최소한 지부라도 알아야 그 외의 정보들도 얻을 수 있고 그래야 적에 대한 대처도 더 수월해질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설화를 보냈던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어쨌거나 이 상황에서의 일차 목표는 청룡조를 따라잡는 일이다.
헤어진 지 오래 지난 것은 아니니 청룡조를 따라잡는 건 어렵지 않다. 상대적으로 걸음이 느린 한설연을 데리고 도주한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해봤기에 알고 있다.
이제는 반대의 경우가 되었으니 지금처럼 묵룡조가 전속력으로 경공을 펼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차 목표는 한설연을 어떻게 구하느냐 하는 문제다.
중요한 건 무사히 그녀를 구해내야 한다는 점인데, 상대인 청룡도 고수인 데다가 조원들도 전문가들이니 쉽지는 않을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는 건, 역시 조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묵룡조원들은 청룡조원들보다 훨씬 더한 전문가들이니까.
“그래서 한설연 소저의 용모는 어때? 정말로 그렇게 예쁘던?”
단유소가 상념에서 깨어날 무렵에 들려온 서백풍의 목소리였다. 아마도 연소운에게 묻고 있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빠르게 경공을 펼치고 있는 와중이었다.
“보, 보통은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계서서요.”
“그래서, 얼굴은 절대 안 보여주디?”
“가, 간혹 씻은 후에는 인피면구를 벗고 계실 때도 있긴 했습니다.”
“오오! 그래? 그래서, 어땠어?”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지……. 그냥 멍했습니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우셨습니다.”
“오오옷!”
서백풍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진평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거 또 지랄 시작했구나. 미녀라면 사족을 못 쓰고 하여간.”
진평이 핀잔을 주자 서백풍이 아쉬울 것 없다는 어조로 말했다.
“아, 그러셨군요? 저는 모두 궁금해하실까 봐 억지로 육성으로 물어봤던 건데. 듣기 싫으시다면 전음으로 하죠, 뭐.”
“크흠……!”
헛기침을 내뱉은 진평이 약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꼬,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서백풍은 노골적이다. 그렇기에 보통은 민망하여 물어볼 수 없는 부분들에 대해서도 그는 직설적으로 물어본다. 당연히 들을 수 있는 것도 많다.
“승추도 듣기 싫어? 한 명이라도 듣기 싫으면 그냥 전음으로 해야지.”
“설마요. 저는 방금 모든 신경을 그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는데요.”
“그래? 만인이 원하신다면야, 뭐. 하핫!”
서백풍은 득의양양해진 목소리였다.
잠시 웃어 보인 서백풍이 은근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몸매는 어때? 보통보다 약간 큰 키라고 들은 것 같은데.”
“말씀하신 대로 보통보다 약간 크신 정도인데 부담스러울 정도는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몸매는?”
“모, 몸매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날씬하고 호리호리해서 딱 봐도 훌륭해 보이십니다.”
“겨우 그 정도를 묻는 게 아니잖아. 나올 덴 잘 나왔고?”
연소운은 그 말에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단유소는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눈치를 살피고 있을 것이다.
단유소는 침묵을 유지했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어차피 남자들끼리의 이야기였고, 가족 같은 조원들 사이의 이야기였다. 한설연이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저속한 음담패설도 아니니 그다지 상관할 문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저속한 음담패설로까지 끌고 갈 서백풍도 아니었다.
잠시 후, 연소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그그, 그렇게……. 보였습니다.”
“캬아!”
서백풍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연소운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서, 성격도 매우 밝고 배려심도 깊으십니다. 정말 좋은 분이십…….”
연소운이 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백풍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딴 건 듣고 싶지 않으니 때려치워. 내가 언제 여자 성격 궁금해하던?”
참으로 서백풍다운 한마디였다. 그가 다시 연소운에게 물었다.
“조장님과의 분위기는 어때 보이던?”
소곤소곤 묻는 척하는 목소리.
당연히 억지로 저러는 것이다.
이에 여태껏 침묵을 유지하던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냐?”
“흐하핫! 뭐, 그렇잖습니까. 소운이가 합류하기 전에는 계속 두 분이서만 함께였을 거고. 그러면 뭔가 이런저런 흥미로운 일들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가뜩이나 천하제일미라 불리는 여인과의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녀를 호위했고 그녀는 내 호위를 받았지.”
그야말로 썰렁한 대꾸에 조원들이 조용해졌다.
그렇게 침묵이 유지되길 잠시.
“확실해. 뭔가 있으셔.”
서백풍의 말이었다.
그러자 곽승추가 대꾸했다.
“예. 평소와는 다르게 여운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조장님은 강호의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으신데.”
“상대가 상대잖아. 천하제일미 한설연 소저라면 혹시 모를 일이지.”
“형님의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 아까 소운이가 말했잖아요. 한설연 소저는 성격도 좋고 배려심도 많다고. 우리 조장님이 또 그런 여인들에게는 약하시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하자고. 청춘 남녀가 오랜 시간을 함께했어. 보아하니 생사의 고비를 수도 없이 함께 넘은 듯한데, 그 와중에 두 청춘 남녀 사이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까?”
“후후. 그럴 리 없죠.”
서백풍과 곽승추의 대화에 앞서 달리던 단유소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간 못 말리는 녀석들이었다. 두 사람을 제지하지 않는 걸 보니 진평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듯했다.
세 사람은 항상 이런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이 여인과 관계되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든 엮어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짝이 없는 자신을 위한 관심임을 잘 알고 있기에 항상 웃어넘길 뿐이다. 가뜩이나 이번에는 상대가 한설연이다 보니 녀석들의 관심이 매우 높은 모양이었다.
“그래, 구하러 가길 잘한 거야. 꼭 무사히 구하고 말 거야.”
의욕이 깃든 목소리로 서백풍이 그렇게 말하자 곽승추가 대꾸했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형님은 맹주님을 잃는 것보다 천하제일미를 잃는 걸 더 슬퍼하실 분이니까.”
“그건 당연한 거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뭔데요?”
“한설연 소저를 구해야만 우리 조장님과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직접 들을 수 있을 거 아냐.”
“과연!”
곽승추가 탄성을 내뱉자 서백풍이 말했다.
“이 중차대한 일을 겨우 청룡조 놈들 따위에게 방해받을쏘냐? 기다려라, 이놈들!”
그러자 곽승추가 대꾸했다.
“후후. 다 죽었어, 이 새끼들.”
이상한 부분에서 의욕에 불타오르는 두 사람이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한동안 빠르게 경공을 펼치던 중에 진평이 단유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조장님.]
단유소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진평이 전음이 이어졌다.
[저희들이 맡았던 임무는 신룡대 내의 변절자들을 색출해내는, 매우 중요하고도 민감한 임무였습니다.]
변절자는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지만 적어도 신룡대 내에는 없어야 했다.
무림맹과 백도 내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떠나서, 신룡대는 실제적으로도 무림맹주의 권위를 세우고 백도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시키는 강력한 도구였다. 동시에 다른 불온한 세력의 발호를 억제시키는 훌륭한 수단이기도 했다.
신룡대야말로 무림맹주가 쥐고 있는 가장 날카롭고도 강력한 검이었다.
그런데 수십 년간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던 그 강력한 검에 금이 간 것이다.
진평이 전음을 이었다.
[저희들이 임무를 맡을 당시만 해도 상부에서는 신룡대 내의 변절자를 특정하지 못한 느낌이었습니다. 신룡대 내의 모든 이들이 의심의 대상이었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 묵룡조도 용의선상에 있었다는 뜻이지요.]
단유소가 침묵하자 진평이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저희들의 조사에 의해 상부에서도 변절자를 알게 되었겠지만, 그때는 오리무중이었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맡길 당시에 상부에서는 전혀 저희들을 의심하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 저희들은 변절자가 아닌 게 당연하다는 태도였습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글쎄…….]
단유소가 짧게 대꾸했다.
진평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단유소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묵묵히 경공을 펼칠 뿐이었다.
그 상태로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진평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상부에서는 저희들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투였지만, 실상 제가 느낀 건, 조장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물론 경우가 약간씩 다르긴 했지만, 상부에서 조장님에 대해 그런 태도를 보인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요. 이번에 더욱 확실해졌고요.]
진평은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전음을 보내지 않았다.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던 단유소가 한순간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즉, 윗선과 나 사이에 드러나지 않은 모종의 신뢰 관계가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군?]
그러자 진평이 대꾸했다.
[묵룡조 내에서의 짬밥으로만 치면 제가 조장님보다 더 높잖습니까. 저는 묵룡조에서 두 명의 조장님을 모셨습니다. 그리고 상부에서 그전의 조장님을 대하던 태도와 지금의 조장님을 대하는 태도가 확실히 다르다는 점도 알지요.]
단유소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진평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제 궁금증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단유소가 살짝 고개를 돌려 진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지은 채였다.
진평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강의 확신은 왔다. 다른 조장들과는 달리 단유소는 분명히 상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신룡대의 상부라는 건, 무림맹의 권력 구도 내에서도 핵심이라는 뜻.
‘대체 조장님은 정체가 뭡니까.’
진평이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빗줄기는 거의 잦아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