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임무 인계 (2)
모두의 시선이 한설연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임무 인계’라는 청룡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파악한 눈치였다.
그러자 청룡이 한설연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경황이 없어 인사가 늦었습니다. 교월 한설연 소저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미 소생이 누군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자 한설연이 약간 주저하다가 대꾸했다.
“네에……. 방금 전의 대화를 듣고…….”
“소저께서 저희들의 정체를 아신다 해도 큰 상관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조심스러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설연도 잘 알고 있었다. 신룡대는 필요에 따라서 모습과 신분을 바꾸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는 사실을.
정체를 알아도 상관없다는 청룡의 말 또한 그런 차원에서 하는 말일 것이다.
청룡이 말을 이었다.
“맹에서 임무인계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런 고로 이제부터는 저희들이 한 소저를 모실 겁니다.”
청룡이 확실한 결론을 말하자 한설연이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 하면 묵룡조장께서는…….”
그러면서 한설연이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단유소는 표정 없는 얼굴로 한설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대답은 청룡이 했다.
“묵룡이 중태라는 보고를 접한 맹에서는 저희들로 하여금 묵룡과 한 소저의 신병을 확보하여 안전하게 복귀시키라는 임무를 내렸습니다. 단, 묵룡이 임무 수행 가능 상황일 경우에는 다른 임무에 투입하라는 단서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다, 다른 임무라면…….”
“묵룡이 맡게 될 임무의 내용에 대해서는 보안상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찌 되었건 묵룡의 입장에서는 맡을 수밖에 없는 임무인지라 당장 그쪽으로 달려가야 할 겁니다. 물론, 소생이 그의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거고요”
단유소를 바라보는 한설연의 눈동자가 더욱 심하게 떨렸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단유소는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설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상태로 약간의 침묵이 흘렀을 때 청룡이 단유소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묵, 서둘려야 한다고. 상황 알잖아.”
그러자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단유소가 청룡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로 향할 거지?”
“사천지부. 그곳이 지휘 본부거든. 다들 거기 계시고.”
“이곳에서 가려면 아미산 북부를 지나가야겠군?”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현재 단유소 일행이 위치한 곳은 사천의 서쪽이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향하면 아미산이 나오고, 거기서 동북동 방향으로 한참을 가야 사천지부였다. 아미산 위쪽에는 당문과 청성파가 있으니 청룡조는 그 사이로 이동하게 되는 셈이다. 안전한 경로였다.
단유소와 연소운이 향해야 할 귀주는 이곳에서 동남향이다. 이곳에서는 남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가는 경로가 가장 빠르다. 결국 이곳에서 헤어지는 게 양측 모두에게 가장 효율적이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단유소가 말했다.
“일단은 잠시 동안만 당신들과 함께 이동하도록 하지.”
그 말에 청룡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당신이 함께해주면 우리야 든든하겠지만, 그 경우에 당신은 좀 돌아가는 길 아닌가? 그러기에는 한가하지가 않은 상황인 걸로 아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러자 청룡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단유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의외네. 철저하게 맹의 지시 위주로만, 임무의 효율성 위주로만 움직이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 그렇게 듣기도 했고.”
청룡이 마지막에는 전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로 무리수를 감수하기도 하는군?]
그렇게 묻는 청룡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단유소가 한설연 때문에 이러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는 태도였다.
단유소가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양해 좀 부탁하지.”
단유소의 말에 청룡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든든한 데다가 심심하지도 않을 테니 나도 좋지. 어쨌거나 그럼, 바로 출발해도 되겠지?”
“선봉은 그쪽에 맡기지.”
단유소의 말에 청룡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청룡조원들을 향해 말했다.
“출발한다.”
“예!”
이윽고 앞서서 달리기 시작한 청룡을 향해 단유소가 짧게 전음을 보냈다.
[이건 우리끼리만 아는 걸로 하지.]
[물론.]
전방을 바라보며 달리는 와중에도 청룡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연은 단유소의 곁에서 나란히 달리는 중이었다. 일행의 후미 쪽이었다.
한설연은 달리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고개를 돌리며 단유소 쪽을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달리기 시작한 후로 반 각 정도로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단유소는 한설연을 향해 고개를 돌리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전방으로 고정한 채 묵묵히 경공을 펼칠 뿐이었다. 한설연도 말을 걸지 않았으니 그간 두 사람 사이에서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이별의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단유소를 바라보던 한설연은 어느새부턴가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사실, 웃고 싶은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울적한 마음을 참는 중이었다. 곧 그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끝나가고 있다는 생각은 근래에도 하고 있었다. 조만간 끝날 시간이긴 했다. 그래서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만나면 헤어지는 게 인생사라는 걸 잘 알고 있고, 지금까지도 많은 이별을 겪어왔다. 이번 이별처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도 종종 겪었다.
그런데 이번 이별은 유독 아쉽고 서글프다. 마음 한구석이 떨어져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왜일까.
그럼에도 미소가 지어진 건, 지금 단유소가 보여주는 모습이, 끝까지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그가 새로 맡은 임무도 상당히 급하고 중요한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이런 시간을 만든 것이다.
이제는 안다.
이게 단유소 특유의 배려 방식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다정다감한 배려가 아니라서 미처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돌아보면 너무도 고마운…….
그는 늘 이런 식이다.
[새로 맡은 임무, 상당히 중요한 임무인 듯하던데.]
아쉽고 안타깝고 서글픈 마음을 감춘 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어조로 한설연이 전음을 보냈다.
청룡이 기밀이라 했기에 딱히 답을 기대하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단유소가 시선을 전방에 둔 채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우리 애들이 위험에 처했다는군.]
그 말에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단유소가 말한 ‘우리 애들’이 누군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묵룡조원들일 것이다.
[그,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오래는 함께 못 가.]
[저 때문에 이러신다는 거 알아요. 저는 이제 괜찮으니 지금이라도 빨리 그리로 가세요! 어서요!]
진심이었다. 지금이 헤어짐의 아쉬움 따위를 나누고 있을 상황은 아니지 않은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쪽에 가 있는 우리 애들을 소운이급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해. 단언컨대 신룡대의 모든 인원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녀석들이야.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물론 다른 조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지만.]
정황을 떠나서 한설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유소의 말인 즉, 오룡을 빼면 신룡대에서 가장 강한 무인들이 묵룡조에 몰려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이 얘기했으면 사실 반, 과장 반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단유소의 말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조건 사실일 것이다. 단유소라면 충분히 조원들을 그렇게 키울 수 있었을 테니까.
[그, 그래도 저 때문에 이렇게 무리수를 두시는 걸 원치 않아요.]
[스읍.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단유소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아버렸다.
그의 표정을 보니 알 것 같았다. 그가 지금의 결정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그 상태로 또다시 말없이 한참을 달리다가 한설연이 말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당신은 늘 궁금하지.]
단유소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그렇게 대꾸하자 한설연이 웃어 보였다. 이 역시 그다웠다.
[다른 호위 임무 대상들한테도 이런 적 있었어요? 상황이야 모두 다르겠지만, 비슷한 경우라도.]
그 물음에 단유소는 곧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한참 더 가서야 그의 대꾸가 들려왔다.
[없었어.]
[그럼 나만 특별 대우를 받는 거네요. 이거 영광인데요? 그런데 왜 나만 예외인 거예요?]
그 질문에 대한 답도 한참 후에야 나왔다.
[비록 한정된 시간 동안이었지만, 내게 있어 당신은 호위 대상이라기보다는 동료였고 친구였으니까.]
달리는 와중에 한설연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장대비가 얼굴을 때렸지만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단유소의 저 말이 마음속에 유독 진한 파장을 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일까.
여태껏 수도 없이 누군가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살아왔는데, 단유소가 방금 해준 저 말이 가장 기쁘고 뿌듯하게 느껴지는 건.
그러나 기쁘고 뿌듯한 만큼 아쉬움과 안타까움도 더욱 짙어져만 갔다.
한설연이 잠시 동안 마음을 가다듬더니 이윽고 단유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강호에 처음 나와서 제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많은 실수와 아픔이 있었지만, 또한 그 속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앞으로 그 배움을 토대로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하게 나아갈게요.]
한설연이 독백처럼 전음을 이어갔다.
[단 공자님과 단둘이서 함께했던 그 모든 추억들은 더욱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지금껏 살면서 겪었던 그 어떤 시간들보다도 소중하고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어요. 귀찮게만 하고 민폐만 끼치는 저를 끝까지 붙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한설연이 곧바로 전음을 이었다.
[무, 물론 그 과정에서 제가 알게 된 많은 기밀들과 비밀들은 철저히 함구할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자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단유소가 대꾸했다.
[걱정 안 해. 그걸 걱정해야 할 사람인 것 같았으면 애초에 밝히지도 않았어.]
그러자 한설연이 단유소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단유소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웃지 마. 정들어.]
하지만 한설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달리는 와중에도 대놓고 단유소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라고 웃는 거예요. 나, 잊지 말라고.]
[헤어질 때 됐다고 이제 아주 막 나간다 그거지?]
[더 막가서 연인 행세라도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단 공자님 구설수에 오를까 봐 참는 거예요.]
단유소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한설연은 속으로 움찔했다. 스스로 생각하기해도 너무 갔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이후로 또 다시 두 사람은 말없이 경공을 펼쳤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함께 이동하길 약 한 시진가량이 흘렀다.
전방으로 야트막한 산지들이 이어지는 지형이 보일 즈음, 단유소가 앞서 가는 청룡을 불러 세웠다.
그러자 청룡이 모두에게 쉬라는 지시를 내렸고, 단유소가 그를 일행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이끌었다.
둘만 있는 상황에서 단유소가 청룡에게 말했다.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러자 청룡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벌써? 아까는 제법 오래 함께할 것 같더니.”
“앞에 산이잖아. 산속에서 헤어지는 게 적의 이목을 감추기에도 훨씬 나을 거 아냐.”
“하긴.”
청룡이 바로 수긍하더니 다시 말했다.
“아직 인수 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 같은데.”
“별다른 사항은 없어. 호위 대상은 보다시피 신체 멀쩡하고 정신적인 이상 같은 것도 없어.”
청룡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호위 대상은 강호 초출이라서 아무 것도 몰라. 무공 수준은 절정의 초입이지만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애송이에 불과해. 지식은 책에서만 배워서 현실 응용력은 그다지 없는데, 궁금한 건 많아서 이것저것 귀찮게 물어보는 편이야. 자체 생존력도 거의 없고, 학습 능력은 보통보다 미세하게 나은 수준이지. 당신도 많이 겪었을 명문의 후기지수들과 큰 차이는 없다고 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