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뜻밖의 기연 (2)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스스로 멍하니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에 정신을 차렸을 뿐.
정신을 차린 후에 느낀 기분은 상쾌함이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대라유유선공을 운용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멈춰 있었기 때문이다.
칠성의 단계에서 기운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계속 쌓이는 바람에 매우 고통스러웠는데, 지금은 그런 고통도 전혀 없었다.
오히려 머릿속은 맑았고 몸에는 활력이 넘쳤다.
이전까지는 체내에 있던 진기의 양이 부담스럽게 느껴졌었는데, 지금은 전혀 부담스러움이 없었다.
뭘까.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몸에 느껴지는 이상이 전혀 없고, 오히려 좋아진 느낌이었기에, 일단 대라유유선공을 다시 운용했다.
확인의 개념이었기에 이번에는 처음부터 빠르게 단계를 밟아 나갔다.
그 직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대라유유선공의 일성부터 오성까지의 단계에서는 소량의 진기만이 부드럽게 유통된다. 지금도 부드럽게 유통되는 느낌은 같지만, 그 양이 달랐다. 훨씬 많은 양의 진기가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육성의 단계, 칠성의 단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전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훨씬 많은 양의 진기가 빠르게 유통되고 있었다.
칠성까지 유통해본 결과,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한 와중에도 기분은 좋았다.
줄기가 전체적으로 넓어지니 유통되는 기운의 양도 많아졌다. 즉, 이전과 같은 무공을 사용해도 그 위력이 다르다는 뜻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벌어졌다.
기운들이 서서히 한 부분으로 모여들더니, 여태껏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었다.
‘이건……!’
놀람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노력하고 노력해도 닿지 않았던, 그래서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대라유유선공의 다음 단계, 즉 팔성을 이룬 것이다.
팔성(七成)이라는 말은 팔 할의 성취를 뜻한다.
해당 무공의 성취도를 열 단계로 나누었을 때 여덟 단계까지 이루었다는 뜻이다. 무공마다 익힐 수 있는 난이도가 다르기에, 성취도에 관한 건 무공 각각의 기준이며 상대적인 기준이다.
당연히 성취도의 열 번째 단계는 당연히 십성(十成)이다. 해당 무공을 완벽하게 익혔다고 보는 단계이다.
이후, 해당 무공의 오의를 깨달으면 여태까지 익혔던 무공의 형식에 딱히 구애받지 않게 된다. 그 무공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숨겨진 뜻을 깨달았으니 굳이 원래의 형식을 고수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원래의 무공을 펼쳐도 새로운 무공을 펼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숨은 뜻까지 깨달은 만큼, 형식은 본인에게 맞게끔 간결해지고 위력은 증폭되는 탓이다. 그러한 단계를 일컬어 십이성 대성이라 한다.
어쨌거나 팔성에 오른 대라유유선공은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가 매우 궁금했다.
여태까지 확인된 건 유통되는 진기의 양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과 기운이 새로운 영역으로 퍼졌기 때문인지 활력이 넘친다는 사실 정도였다.
스윽―
시험 삼아 손을 들어 검지를 펴고 물웅덩이 건너편의 작은 바위를 겨누었다.
거리는 이십 보쯤.
슉―
손가락에서 강맹한 힘이 발출된 순간.
푹!
작은 바위에 손가락만 한 구멍이 깨끗하게 뚫렸다. 아마 구멍은 바위를 관통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거리에서 이런 기술을 구사하는 건 그전에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저, 같은 기술을 사용했을 때 소모되는 진기의 양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시험해보려는 의도일 뿐이었다. 또한 이 정도의 기술을 사용한 후에 진기의 유통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비교해보려는 생각도 있었다.
소모된 진기의 양은 얼추 반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효과였다. 같은 전투를 치러도 진기의 소모가 훨씬 적어진다는 뜻이니까.
기운의 유통도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일정한 힘을 발출하고 나면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빠르게 기운을 유통시켜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통로가 넓어져 유통량 자체가 많아진 탓에, 공백도 그다지 신경 쓸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순간적으로 발출하는 힘의 양이 커지면 공백이 생길 수도 있지만, 방금 전과 같은 수준의 힘을 썼을 때에는 별로 상관치 않아도 될 정도였던 것이다.
그 뒤로는 희열을 느끼며 계속해서 운기를 취했었다. 연소운이 찾으러 내려왔을 때까지.
그렇게 시작된 오늘이었던 탓에 기분이 좋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소운과 한설연이 근래에 작은 기연을 얻었다면, 자신이 얻은 건 큰 기연이었다.
‘설마 한 소저로 인해 이런 기연을 얻게 될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런 때 생각해보면 세상사든, 인연이든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번 임무에서 겪었던 위험들도 겪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무림맹 절강지부에서 휴식이나 취하며 빈둥거리다가 조원들이 맡은 임무나 도와주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한설연을 호위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수많은 위험과 마주해야 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죽을 위기까지 겪었다.
그런데 그 죽을 위기 덕분에 이런 기연이 생긴 것이다. 마침 그녀가 영약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면 이런 일조차도 없었을 터였다.
한마디로, 우연이라면 우연이라 할 수 있는 많은 상황들이 겹치고 겹쳐서 이런 결과에 이른 것이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마따나 사람의 미래란 참으로 모를 일이 아닌가.
‘고마워, 한 소저.’
경공을 펼치는 단유소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기만 했다.
* * *
이튿날.
오후까지만 해도 날씨가 화창했는데 어둑해질 무렵이 되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레와 벼락과 광풍을 동반한 비였다.
단유소 일행 모두가 절정 고수 이상이라지만 초겨울의 비가 차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계속 맞아서 좋을 리가 없었다.
어차피 머물 곳을 마련해야 할 시간이기도 했기에 세 사람은 서둘러 은신처를 찾았다.
대부분 평지였고 야트막한 산지들만이 듬성듬성 존재하는 지형이었다. 그러니 은신처를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혹시 모를 적의 시야를 가릴 만한 곳, 비를 피할 수 있는 곳, 민가에서 먼 곳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켜야 했는데, 지형이 지형이다 보니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단유소가 선택한 곳은 의외로 산자락에 위치한 허름한 오두막이었다.
제법 빽빽한 산을 뒤로한 채, 앞에는 넓은 밭이 펼쳐진 곳이었다. 수확이 끝나 휑한 밭이었다. 민가에서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기도 했다.
등짐을 풀며 오두막에 앉은 단유소가 말했다.
“일단은 이곳에서 비를 피하면서 날씨 상태를 좀 보는 게 좋겠군. 위험한 기척이 다가오는지는 내가 살필 테니 두 사람은 최대한 쉬도록 해.”
고개를 끄덕인 한설연이 겉옷을 벗으며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러더니 머리끈을 풀고 젖은 머리카락을 털기 시작했다.
연소운은 앉지 않고 오두막의 한쪽 끝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피풍의를 털고 있었다. 피풍의의 물기를 적당히 털어낸 연소운이 이윽고 다가와서 앉았는데, 갑자기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털던 한설연이 연소운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연 공자?”
“아아아, 아, 아니 그, 그게……, 저…….”
연소운이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한설연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한설연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때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신 꼴을 좀 봐.”
그렇게 말하며 단유소가 눈짓으로 가리킨 부분은 한설연의 상체였다. 비에 쫄딱 젖은 탓에 상의가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옷 앞섶 사이로 가슴 위쪽의 골까지 살짝 드러나 있었다.
잠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상태를 확인한 한설연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이것 때문이었구나. 난 또 뭐라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그렇게 대꾸한 한설연이 한 손으로 앞섶을 잡더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연소운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침 더운데 어떻게, 좀 더 벗어드려요?”
그 말에 연소운의 얼굴이 한계까지 붉어졌다.
단유소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이젠 아주 막 나가는구나, 한 소저. 보통은 감추려는 척이라도 하지 않나?”
“에이, 이 정도가 무슨 대수라고요. 그리고 지금 내가 어색한 척하면 분위기만 더 이상해지는 거예요. 게다가 연 공자님도 내 이런 모습, 처음도 아닐 거고.”
“이, 이, 이전에도 바로 고개를 돌렸었습니다. 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연소운이 여전히 얼굴색을 붉힌 가운데 그렇게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보는 한설연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단유소가 한설연에게 말했다.
“적당히 해. 소운이는 사귀는 사람도 있는데, 괜히 마음 뒤숭숭하게 만들지 말고.”
“호홋. 네, 알았어요.”
한설연이 대꾸하자 연소운이 여전히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린 채, 자신의 피풍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한설연이 피풍의를 받아서 걸치며 말했다.
“자상하셔라. 고마워요, 연 공자님.”
그제야 시선을 원위치시키더니 연소운이 말했다.
“마침 얘기가 나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지금은 저도 사귀는 사람이…… 없긴 합니다.”
그러자 단유소가 놀라며 물었다.
“뭐어? 얼마 전에 고향에 내려갔다 왔다면서?”
연소운의 연인은 고향의 소꿉친구였다. 그러다가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연인이 된 경우였다.
‘이 소저라고 했었지.’
단유소도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약 일 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경로가 겹쳐서 조원들과 함께 연소운의 고향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조원들과 함께 그녀를 만나 맛있는 식사도 한 끼 대접해줬었다.
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미모라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리땁고 붙임성 좋은 여인이었다. 당시에 조원들도 다들 마음에 든다며 칭찬을 했었다.
그때 묵룡조는 마침 무림맹의 인의단 소속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을 때였다.
무림맹에는 천지인단이라 불리는 세 개의 중심적인 무력 단체가 있는데, 각각 천무단(天武團), 지협단(地俠團), 인의단(人義團)으로 나뉜다. 천무단은 정예 고수, 지협단은 중급 고수, 인의단은 하급 무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무림맹 전력의 반이 인의단이었다.
인의단이면 뭐 어떠냐며, 무림맹의 무사인 것 자체가 대단한 거라고 말하던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연소운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헤어졌다니.
“예. 그때 무슨 일인지, 만나자고 해도 자꾸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만나기를 꺼려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즈음, 고향 친구가 주저하며 얘기를 해주더군요. 현에 이름난 무관을 운영하는 무관주가 있는데, 그의 자제와 혼인하기로 했다고. 이미 날짜까지 잡았다고…….”
“그, 그런…….”
한설연이 놀람과 안타까움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그렇게 반응했다.
그 후로 잠시 침묵이 이어지던 중, 연소운이 조용히 다시 입을 열었다.
“고향을 떠나오기 전날 밤에 그녀가 몰래 찾아왔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잠깐이나마 얼굴을 보긴 봤습니다. 그녀는 저를 보자마자 울었습니다. 끝까지 기다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더군요. 혼인할 사람과는 어쩌다가 힘든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친해졌는데, 그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며…….”
연소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외로웠던 모양입니다. 그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으니 힘들었을 겁니다. 누굴 탓하겠습니까. 곁에 있어주지 못한 제 탓입니다. 그래서……, 그녀를 이해합니다.”
연소운은 무림맹이 있는 무창에 그녀와 함께 살 집을 마련하겠다며 부지런히 돈을 모았었다. 아마도 내년 하반기쯤이면 아담한 집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며 기대에 차 있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연소운이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말했다.
“그녀의 혼인 상대는 저도 아는 사람인데, 좋은 사람입니다. 성격도 좋고, 인맥도 넓고, 그래서 평판도 좋습니다. 잘 살라며 축하해주고 바로 돌아섰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하. 하하.”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 연소운의 눈동자에 물기가 많아졌다. 다만 흐르지는 않았다.
한설연은 안타까웠다.
연소운을 위로해주고 싶지만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위로의 말이 어설프게 느껴질 것 같으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문득, 신룡대원으로서 산다는 게 참으로 힘들고 고달픈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성이 하늘을 찌르는 그 신룡대의 일원이면 뭐 하겠는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 사실을 밝힐 수도 없는데.
이 강호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날마다 목숨 걸고 싸우면 뭐 하겠는가. 정작 떠나가는 사랑을 붙잡을 수도 없는데.
그래서 안타까웠고, 그래서 단유소와 연소운이 더 존경스러웠다.
한설연이 가만히 단유소의 눈치를 살폈다.
단유소라면 뭐라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 법한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할 뿐이었다.
그러던 한순간 단유소가 매우 조용히,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
매정하다고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마음 아파하는 연소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줄 알았는데.
단유소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짐들 챙겨. 그리고 소운, 현 시각 이후로 너는 한 소저의 호위에만 집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