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뜻밖의 기연 (1)
동굴을 빠져나온 세 사람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했다.
“몸이 이상해요.”
한참을 이동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되자 한설연이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경공을 펼치면서 느낀 건데, 몸이 정말 가벼워요. 그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체감이 될 정도로. 역시 소옥 언니 덕분일까요?”
그러자 연소운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크진 않지만, 그전과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역시 누나……, 심 소저 덕분이겠지요.”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소옥 덕분인 게 맞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모르고 있는 게 있었다. 두 사람의 몸에 황 노파도 관여했다는 사실이었다.
단유소와 황 노파가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나눴던 날 밤부터였다. 황 노파가 자고 있는 두 사람의 혈을 몰래 문지르기 시작한 것은.
단유소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 노파가 시작 전에 허락을 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흔쾌히 승낙해줬다. 그 후로 황 노파는 어젯밤에 이르기까지 꼬박꼬박 두 사람의 몸을 관리해주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이제야 몸의 변화를 체감한 이유는, 그간 매일매일 한계까지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황 노파의 권유에 따라 운기만 하며 푹 쉬었는데, 그러다 보니 드디어 정상적인 활력을 찾아서 몸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동굴에서의 일은 두 사람에게는 작은 기연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큰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혈이 튼튼해진 이상, 장기적으로 두 사람은 훨씬 안정적으로 기운을 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옥이 덕분이지. 그리고 그 후에는 황 어르신도 신경을 써주셨고.”
“예?”
“네에?”
연소운과 한설연이 동시에 놀랐다.
“동굴에 있을 땐 밝히지 말라고 하셔서 안 밝힌 거야. 어르신이 매일 밤마다 두 사람의 몸을 관리해주셨어. 소옥이가 했던 것처럼.”
“아……”
단유소의 말에 두 사람이 아쉬움 가득한 탄식을 내뱉었다. 고마움과 그리움이 공존하는 표정이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됐으니 그런 감정이 더 클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설연이 말했다.
“저 사실, 최근에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렇잖아요. 목적을 가지고 강호에 나왔는데 목적은 전혀 못 이뤘고, 할 줄 아는 건 없어서 많은 분들에게 민폐만 끼쳤고, 또 다른 많은 분들이 저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셨죠. 근래에 단 공자님이 그렇게 되셨을 때에는 더더욱 그랬어요. 그런데…….”
한설연이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동굴에서 생활하다 보니 그런 제가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소옥 언니와 황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거예요. 약간의 깨달음이 있었죠.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이렇게까지 더…….”
한설연이 말을 줄이자 연소운이 입을 열었다.
“저도 한 소저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저 또한 늘 받기만 하는 데다, 민폐만 끼치는 한심한 입장이라…….”
연소운과 한설연이 서로를 마주 보며 동정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단유소도 빙그레 웃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은 서로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라도 서로에게 힘이 된다면 나쁘진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모두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고마움을 새길 줄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거면 된다. 더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잠시 후에 한설연이 말했다.
“잠시만……. 자리 좀 비울게요.”
소변을 보고 오겠다는 뜻임을 알고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연이 사라지자 연소운이 주춤거리며 단유소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군?”
그러자 연소운이 흠칫하며 반응했다.
“아, 아닙니다.”
한결같은 연소운의 소심함도 이제는 귀여울 정도다.
“너, 그러지 말라고 내가 누차 얘기했지? 말실수가 되지 않을까 하고 지레 혼자 검열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일단 하라고. 혼나는 거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
“그리고 내가 언제 널 혼낸 적도 없는데 뭘 그리 어려워해? 그러니 말해봐. 괜찮으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단유소는 연소운이 자신을 어려워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조원들을 통해서 들은 바, 연소운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은 존경과 동경이라 했다. 그러니 자신의 앞에서 최대한 실수하지 않고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어려워한다는 거다.
단유소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계속해서 연소운을 바라보자 결국 그가 주춤거리며 말했다.
“그게……, 주제넘는 말씀인 것 같아서…….”
단유소가 미소를 띤 상태에서 눈동자에 힘을 주자 연소운이 움찔했다. 이윽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왠지 조장님께서 다른 호위 임무 대상들을 대하시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보였나?”
“아, 아니 뭐 꼭 문제라는 뜻이 아니라, 야, 약간 생소해서 말입니다. 이, 이런 경우는 처음 접하는지라…….”
그러자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지. 원래 알던 사이였으니까.”
“예? 아…….”
잠깐 놀랐던 연소운이 곧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조장님이시라면 안면이 있었을 수도…….”
“그런 건 아냐. 그냥 예전에 우연히 알게 된 사이지. 그때 난 그녀가 교월인지도 몰랐었고.”
“아.”
“함께하다 보니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거야. 그래서 이런 식이 된 거고.”
“그러셨군요…….”
대꾸는 하는데 연소운의 표정이 미묘했다. 얼굴은 무표정한데 눈만 웃고 있는 느낌이랄까.
“지금 표정 이상해, 너.”
“아, 아닙니다, 조장님. 그, 그럴 리가요.”
“행여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지도 말고, 굳이 조원들한테 말하지도 마. 알았어? 너도 잘 알겠지만 그놈들은 뭐든 넘겨짚어서 다짜고짜 몰아갈 놈들이야. 나중에 나만 피곤해져.”
“당연합니다, 조장님. 감히 제가 어찌…….”
단유소가 짐짓 매서운 표정을 짓자 연소운이 고개를 숙였다.
하긴 뭐, 이 녀석이 쓸데없는 말 주절거리는 성격은 아니지.
그나마 먼저 온 게 연소운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평, 서백풍, 곽승추 같은 놈들이 먼저 왔으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자신의 일에 관한 한, 비밀 없이 모든 걸 공유하는 게 바로 그놈들이니까.
잠시 후, 한설연이 돌아오자 단유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쉴 만큼 쉬었으면 출발할까?”
연소운도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났다.
“그럼 가지.”
단유소가 막 신형을 돌릴 때 한설연이 말했다.
“그런데 단 공자님, 오늘 왠지 기분이 좋아 보여요.”
“뭐야, 뜬금없이?”
“아까부터 정말로 그래 보여서요.”
“당신과 소운이가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흐뭇해서 그랬을 거야.”
“아닌데……. 출발하기 전부터 계속 기분이 좋아 보이셨는데. 함께 지내며 하루 종일 단 공자님 눈치만 봐온 세월이 얼만데 제가 그걸 모르겠어요?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좋은 꿈이라도 꿨어요? 내 꿈 꾸셨나?”
한설연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단유소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하루 종일 내 눈치만 봐? 소운이가 들으면 진짠 줄 알아. 말조심해.”
한설연이 여전히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웃자 단유소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당신이 꿈에 나온 적은 전혀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그런 악몽, 꿀 일 없다고.”
“피이. 그래도 정이라는 게 있지.”
한설연이 입술을 삐쭉거리자 단유소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정? 없어, 그런 거. 그러니까 얼른 출발이나 하자고.”
그때 연소운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도 조장님께서는 새벽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셨습니다.”
“그렇죠? 제 말이 맞죠, 연 공자님?”
그 말에 단유소가 연소운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연소운이 움찔하며 말했다.
“아, 아니, 그땐 제가 잠결에 잘못 본 모양으로…….”
연소운의 모습을 보며 한설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유소가 미소 띤 표정으로 말했다.
“자, 이제 가자.”
단유소가 앞서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사실, 두 사람이 제대로 본 게 맞았다.
실제로 단유소는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단유소의 기억이 오늘 새벽이 되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 * *
한설연과 연소운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시각, 동굴의 물웅덩이 근처에서 혼자 운기조식을 취했었다.
상처가 완전히 나았으니 대라유유선공을 극한으로 운용해볼 필요가 있었다.
단전과 온몸 안에 가득 찬 웅대한 기운을 최대한으로 운용해봐야만 그 힘을 가늠할 수 있고, 그래야 상황마다 알맞게 힘을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호로 나가기 위한 준비 차원이었다.
어차피 수련의 일환이므로 단계를 밟아가며 서서히 대라유유선공을 유통시켰다.
몸이 낫는 과정에서도 적당한 선에서 끊임없이 대라유유선공을 운용했었기에, 초반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이상함을 느낀 건, 대라유유선공을 근래에 운용했던 수준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운용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였다.
원래 대라유유선공의 오성까지는 체내의 기운이 도랑물처럼 졸졸졸 흐르며 넘어가야 할 단계였다. 물줄기로 비유하자면 그렇다.
그런데 오성에서 이미 줄기가 넓어져 개울이 된 것이다. 원래는 육성 단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니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그때까지도 한설연이 먹여준 약의 기운이 워낙 강력한 탓이라고만 생각했다. 단전과 체내에 진기가 가득 차 있는 상태였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겼었다.
그러다가 다음 단계인 육성 수준으로 대라유유선공을 운용했을 때에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약 기운과 무관하게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원래는 진기의 흐름이 개울 상태였어야 할 육성 단계에서 이미 시내가 되어 있었다. 참고로 시내와 같은 흐름은 칠성 단계에서나 가능한 흐름이었다.
그쯤 되자 이대로 심마에 빠지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가 들었다. 대라유유선공이 훌륭한 심법이기는 하나 심마의 위험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절학인 만큼 그 확률이 극히 드물 뿐이었다.
방심하면 언제든 심마에 빠질 수 있는 게 바로 심법 공부의 세계이기도 했다. 누구든, 어떤 심법이든, 운기조식을 취할 때에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가르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대라유유선공의 운용을 멈추려 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그럴 수가 없었다.
강력하게 흘러온 물줄기가 더 이상의 나아갈 곳을 잃자 점점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물길을 터주지 않으면 범람할 기세였다.
고민스러웠다.
칠성의 단계를 개방하면 기운의 줄기가 당연히 그쪽으로 흐르긴 할 것이다.
문제는 칠성까지가 한계라는 점이었다. 자신이 대라유유선공을 익힌 게 칠성까지였으니까.
그나마 위험 부담이 적은 지금, 억지로라도 그만둬야 하나? 아니면 일단 칠성의 단계를 개방하고 추이를 봐야 하나? 오히려 그 경우에 더 위험해지는 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그만두면 덜 위험할 거라는 보장은 있나?
수많은 고민들이 뇌리를 스쳤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런 만큼 조바심도 커져 갔다.
사부 생각이 났다.
사부가 곁에 있었으면 어떻게든 방법을 제시해주거나 실제로 도와줬을 텐데. 여태까지는 줄곧 그래왔는데.
그 순간이었다.
예전에 사부가 해줬던 말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물줄기가 물줄기인 이유는 흐르기 때문이다. 흐르지 않고 고여 있으면 못이고, 결국 고여 있는 못은 썩지. 또한, 물이 흘러 바다로 가면 끝인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바닷물도 한곳에 머물지 않고 까마득히 먼 곳까지 흐르고 또 흐른다. 대라유유선공(大羅流流仙功)이라는 이름에 흐른다는 의미의 똑같은 글자가 두 번이나 들어가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대라유유선공이 칠성으로 올라서던 순간에 사부가 옆에서 해줬던 말이었다.
당시에는 워낙 경황이 없기도 했고 그 후로는 칠성에 머무른 시간이 오래였기에 잊고 있었는데, 마침 이런 순간에 사부의 그 말이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다.
‘흘러야 한다. 흘러가게 해야 한다.’
결정을 내린 순간, 더 이상 흐름을 막지 않고 서서히 길을 텄다.
그러자 막혀 있던 기운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며 길을 가득 메우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염두에 둔 건 두 가지였다.
정신을 맑게 유지한 채, 조화의 묘리를 담은 대라유유선공의 구결에 대해 깊이 음미하는 것.
기운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긴 채로, 기운이 스스로 흐르고자 하는 방향을 찾는 것.
이윽고 몸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얼마 전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몸이다. 고통을 참는 것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버티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화악!
갑자기 체내에서 뭔가가 터지는 느낌이 들더니, 온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찌릿해지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