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64화 (64/200)

64화. 사천지부 (3)

“제가 방금 꿈을 꾼 건 아니죠, 최 대협? 이거, 현실 맞죠?”

정원을 걸어 나가는 중에 오필이 그렇게 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아직도 몽롱했다.

“현실인 건 확실한데, 나도 여전히 이 상황이 믿어지지는 않는군…….”

최익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사천지부였다.

반드시 보고해야 할 사안들이 있었기에 일단 사천지부장을 만나려 했었다.

그러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는 와중에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 다가왔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문상 제갈윤이었을 줄이야.

그 순간,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문상 제갈윤이라는 존재는 자신 같은 사람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한데 엉뚱하게도, 무림맹 사천지부에서 그와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놀랍고 신기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잠시 후에 그 유명한 현월곡주를 만나게 되고, 나아가서는 무림맹주까지 만나게 될 줄이야.

“세상에! 맹주님이시라니……! 맹주님이 내 어깨를 잡아주시다니……!”

오필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최익도 동감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주 백리우가 누군가.

백도의 정점을 넘어서서 이 강호의 정점에 있는 존재였다. 먼발치에서라도 직접 한 번 보기조차 힘든 존재가 바로 그였다.

그런 존재와 직접 대면하고, 통성명을 하고, 말을 섞는다? 그런 존재가 어깨를 토닥여주고 이름까지 기억해준다?

특히나 지부에 속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꿈에서나 가능할 일이었다. 그것도 매우 희박한 확률로.

한데 방금,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처음에 그분이 맹주님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정말이지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어요. 다리가 너무 후들거리더라고요.”

“허허. 나도 의연한 척하느라 혼났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옛말이 정말 틀린 말이 아니네요. 저는 이곳에 도착한 것 자체가 낙인 줄 알았는데, 설마 맹주님을 직접 뵙게 될 줄이야. 이게 다 최 대협 덕분이에요. 감사드려요, 대협.”

“이 사람아, 함께 고생했는데 감사는 무슨.”

최익의 말마따나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생의 연속이었다.

골짜기에서 단유소와 헤어진 후, 두 사람은 그곳에 가만히 몸을 숨긴 채로 꼬박 사흘을 보냈었다.

그러고 나서도 깜깜한 밤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곳을 벗어나 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동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최대한 적의 이목에 띄지 않기 위해 빽빽한 산지로만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조차도 깜깜한 밤중에만 매우 조심스럽게 이동했으니,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느렸다. 낮에는 수풀 속에 철저히 몸을 숨긴 채로 오로지 휴식만을 취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이동 거리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식량은 머지않아 바닥이 났다.

그 후로는 그야말로 생고생의 연속이었다.

물만 마시며 이삼 일씩 굶는 건 예사였다. 그러다가 먹는 것이라고는 말라붙은 나무 열매나 견과류 따위가 전부였다. 심지어는 하루 종일 물조차 못 마실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최익은 최익대로, 오필은 오필대로, 오로지 단유소와의 약속만을 기억하며 참았다. 그 약속, 꼭 지키고야 말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모든 역경을 참아냈다.

그러다가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나저나 단 형과 한 소저가 무사하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일단은 나도 다행이라 생각하네만, 두 사람이 이곳에 무사히 도착하기 전까지는 아직 모를 일이야. 적들은 그 두 사람을 끝까지 집요하게 노릴 테니까.”

그러자 오필이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도 단 형은 한 소저를 모시고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저도 지킨 약속을 단 형이 못 지킬 리 없으니까.”

최익도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지.”

* * *

심소옥이 떠난 후에도 한설연과 연소운은 수련에 열심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대련하는 방식으로 하루 종일 수련만 했다.

특히 한설연은 힘들어 지칠 때까지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수련하다 지쳐서 잠들고 일어나면 다시 수련하기를 반복했다.

“첫 강호행을 통해 가장 뼈저리게 느낀 건 하나예요. 내가 어리다고 해서, 약하다고 해서, 내공이 떨어졌다고 해서, 체력의 한계라고 해서, 이 강호가 나를 봐주거나 가엾게 여겨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죠.”

그게 바로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단유소의 말에 대한 한설연의 대꾸였다.

심소옥이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황 노파는 세 사람을 정성껏 돌봐주었다.

세끼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주는 한편, 단유소의 간호도 도맡아서 했다.

“소수궁의 두 아가씨들은 이 늙은이에게 딸이고 손녀라우. 예전에 마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거든. 소옥 아가씨의 친구들이라면 이 늙은이에게도 손자손녀들이나 다름없으니, 지내는 동안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들 지내다 가시우.”

마님이란 아마도 심소옥의 사조를, 아가씨들이란 심소옥과 그녀의 사부인 전대 소수궁주를 뜻하는 듯했다. 하긴, 황 노파의 나이가 워낙 많으니 전대 소수궁주마저도 제법 어렸을 때부터 봐왔을 것이다.

단유소는 종종 연소운과 한설연의 수련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도 깨어 있는 시간에는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꾸준히 대라유유선공을 운용했다. 대라유유선공을 운용하면 자연 치유력도 증가하는 탓이었다.

덕분에 단유소도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수련에 바쁜 한설연과 연소운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간호를 도맡고 있는 황 노파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공자의 몸은 대체 어떻게 된 몸이우? 내,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빨리 상처가 아무는 몸은 처음이구려.”

한설연과 연소운이 수련에 열심일 때 황 노파가 상처를 봐주며 한 말이었다. 심소옥을 통해 이번에 알게 되었을 뿐, 단유소와 황 노파는 서로가 초면이었다.

“하하. 어르신께서 잘 먹여주시고 잘 돌봐주시는 덕에 마음이 편해져서 그러나 봅니다.”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잖수. 아마도 공자의 체질이 특이하거나, 아니면 심법이 훌륭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둘 중 뭐라고 보십니까?”

“홀홀홀. 이 늙은이가 뭘 알겠수.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그러자 단유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시잖습니까.”

그러자 황 노파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후자 쪽이라고 추측하고 있수.”

“확신이 아니시고요?”

단유소가 또다시 미소를 보이며 묻자 황 노파가 대꾸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무언의 긍정이다.

“어르신께서 상당한 경지에 계시다는 걸 압니다.”

처음에 황 노파를 본 순간에 느꼈었다.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아직도 노파의 정체에 관한 건 모른다. 아마도 전대나 전전대의 고수였던 것 같긴 한데, 그쪽으로 해박한 한설연조차도 아직까지 노파의 정체를 추측해내지 못했다.

황 노파가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

“다, 예전 일이라우.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리고 이 늙은이의 경우에는 한창때에도 공자만큼은 아니었수.”

“그 무슨 겸양의 말씀이십니까.”

“사실이우. 공자가 깨어나지 못했을 때에도 대강은 감이 왔지. 한데 깨어난 후에 보니 확실히 알겠더구려. 그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건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수. 솔직히 소수궁의 아가씨들보다 더 놀라웠다우.”

그 말에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잠시 조용히 침상 옆에 앉아만 있던 황 노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자도 고생깨나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일 것 같구려. 성품 보니 더 고생할 것 같고. 이 나이쯤 되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들이 있어서 하는 말이우.”

“하하. 그렇게 보이십니까?”

“모난 것도 문제지만 공자처럼 너무 둥글둥글해도 문제 아니우? 남들 챙기다가 손해 보면서 고생할 상이 딱 그 상이지. 그런데 보아하니 공자는 그마저도 즐기고 사는 것 같구려. 대단하시우.”

“과찬이십니다. 제 수양도 그리 깊지는 않아서 속으로는 남 탓, 세상 탓 많이 하고 삽니다.”

황 노파가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어쨌거나 공자나 한 소저나, 이 늙은 나이에 맺은 인연치고는 참 특별한 인연이구려. 선남선녀들 보고 있자니 나도 젊어지는 것 같고, 옛 생각도 나고.”

“그러십니까.”

“둘이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홀홀홀.”

“하핫. 그런 식으로 엮진 마십시오, 어르신. 임무 때문에 함께하고 있을 뿐입니다. 곧 남남이 될 사이입니다.”

그러자 황 노파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 공자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그렇게 되겠지만, 또 아닐 수도 있다우. 살다 보면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바로 인연이라는 것이더이다. 홀홀.”

* * *

동굴 생활을 시작한 후로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여드레째 되는 날 인시정(寅時正, 새벽 4시).

단유소와 한설연 그리고 연소운은 나란히 황 노파의 앞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행장을 꾸린 채였다.

“잘 먹고 잘 지내다가 갑니다. 그간 돌봐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연소운의 말에 황 노파가 대꾸했다.

“무슨 은혜씩이나. 홀홀. 이 늙은이야말로 즐거운 시간이었수. 젊은 공자들과 소저를 보니 내 마음도 젊어지는 것 같아서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수. 그리고 우리 착한 공자.”

“예, 어르신.”

연소운이 대꾸하자, 잠시 그를 바라보던 황 노파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맹금이 아직 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여, 지금 날아다니고 있는 참새보다 못한 것은 아니라우. 날개만 성하면 녀석도 언젠가는 날게 되어 있고, 종래에는 하늘의 제왕이 되는 게지.”

황 노파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가 볼 때 공자도 날개가 성한 맹금이우. 아직은 나는 걸 두려워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 무엇보다 높이 날아다니며 당당하게 세상을 굽어보게 될 거유. 그러니 너무 조바심을 내지도, 너무 스스로를 책망하지도 마시구려.”

말뜻을 알아들은 연소운이 감격하여 깊이 고개를 숙였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어르신.”

황 노파가 고개를 끄덕일 때, 이번에는 한설연이 양손으로 노파의 쭈글쭈글한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황 할머니한테 받기만 하고 해드린 건 하나도 없으니 죄송스러워서 어떡해요…….”

“홀홀. 예쁜 소저, 그런 말씀 마시우. 이 늙은이가 뭘 한 게 있다고. 정 고마우면 나중에 우리 소옥 아가씨한테나 잘해주시구려.”

“물론 그럴 거예요. 다만 소옥 언니를 또 볼 수 있을지가 문제지만. 어쨌거나 황 할머니께서도 현월곡에 한번 놀러 오시면 좋을 텐데…….”

“그 먼 곳까지 가다가 이 늙은이, 그야말로 늙어 죽겠수.”

“피이. 아직 정정하신 거, 제가 모를 줄 아세요?”

“홀홀홀. 예쁜 소저의 그 마음만큼은 고맙게 받으리다.”

“황 할머니…….”

아쉬움을 못 이기고 결국 한설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황 노파에게 안겼다. 황 노파가 한설연의 등을 토닥거렸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소저시니 앞으로도 모든 일이 형통하실 게유. 암, 그렇고말고.”

한설연이 황 노파에게서 떨어지자 이번에는 단유소가 황 노파에게 인사를 건넸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회복세를 보이던 그의 상처는 이미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모든 면에서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다우. 아까도 말했듯 이 늙은이가 뭘 한 게 있다고. 게다가 공자는 소옥 아가씨의 숙부가 아니우? 그거면 되었수.”

그 말에 단유소가 웃어 보이더니 말했다.

“또 뵙기를 고대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짐작하시다시피 소생과 엮이면 피곤한 일만 늘어납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정리되고 평온해지면 소옥이를 통해서라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황 노파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러자 단유소가 말했다.

“어르신, 모쪼록 만수무강하십시오.”

황 노파를 향해 동시에 허리를 숙인 후, 세 사람이 동굴을 벗어났다.

날은 아직 어두웠고, 물은 차갑지만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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