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사천지부 (2)
“청룡조입니다.”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곳이 서장의 창도 쪽이었던가?”
“예.”
창도현은 서장의 동부에 치우친 곳이다. 사천의 서부와 인접해 있다.
백리우가 다시 물었다.
“청룡이나 그 조원들 모두 몸은 멀쩡하고?”
“최근에 받은 전서에 따르면 그랬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눈동자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임무 진행 상황에 상관없이 청룡조는 현 시간부로 해당 임무를 중지하라고 해. 그리고 그들에게 즉시 이동하여 최대한 빠르게 묵룡 쪽을 지원하라고 해. 맹주령으로.”
그 말에 제갈윤이 조용히 백리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청룡조가 수행하고 있는 임무 또한 장기 임무인 데다가 중요한 임무였다. 임무를 위해 청룡조가 들인 공도,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맹에서 들인 공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청룡조는 임무 완수를 목전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일주일이면 마무리될 임무였다.
임무를 중지시키기엔 너무도 아까운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리우는 그들의 임무를 중지시키고 무조건 묵룡을 도우러 보내라고 말한다.
‘대체 형님과 묵룡은 어떤 관계인 겁니까.’
백리우와는 친형제 이상의 사이지만 그와 묵룡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른다.
백리우가 말해주지도 않았고, 자신이 묻지도 않았다.
말해줄 수 없는 어떠한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애초에 밝힐 수 있는 일이었으면 백리우가 먼저 말해줬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상황에서 확실한 건 하나였다.
지금의 백리우를 결코 거스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묵룡 대신 제갈윤 자신이 위기에 처했다 해도 백리우는 지금과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아마도 맹주로서의 모든 걸 내팽개치고 본인이 직접 신룡대 전체를 끌고 달려왔을 것이다.
그는 본디,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의 선택을 이해한다.
제갈윤이 대답했다.
“즉시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제갈윤이 빠르게 경공술을 펼치며 정원을 벗어났다.
둘만 남게 되자 단목수헌이 물었다.
“맹주, 괜찮겠소이까. 방금 전에 문상의 표정을 보아하니 약간은 무리를 하시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러자 백리우가 되물었다.
“애초에 제자인 한 소저를 보내지 않았어야 했다는 후회, 많이 하셨겠지요?”
“그렇다마다요. 그 아이를 내보낸 후, 수도 없이 후회했소이다. 물론 지금도 후회하고 있지요…….”
단목수헌이 대꾸하자 백리우가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곡주님과 같은 후회를 했습니다. 아마 곡주님만큼이나 많이 후회했을 겁니다. 그리고 곡주님처럼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단목수헌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묵룡을 보낸 일에 대한 후회일 것이다.
맹주가 이렇게까지 묵룡을 소중하게 여기는지는 미처 몰랐다. 청룡조의 임무를 즉각 중지시키면서까지, 그들로 하여금 묵룡을 구하러 가게 하다니.
그런 묵룡이 결국 현월곡 때문에 중태에 빠진 꼴이니 너무 미안하기도 했다.
단목수헌이 말했다.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괜히 본곡에서 맹주께 무리한 부탁을 하여…….”
“곡주님에게서 사과 말씀을 들으려고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게 아닙니다.”
단목수헌의 말을 자르며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곡주님에게는 수제자인 진소학 공자의 행방이 묘연해진 사건이었습니다. 당연히 현월곡에서는 진 공자의 행방을 찾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겠지요.”
“그랬긴 했소만…….”
“곡주께서 많이 편찮은 상태셨으니 믿을 만한 인물은 한 소저밖에 없었을 테고, 그 상황에서 본맹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본맹은 도와드릴 역량이 충분한 곳이니까요.”
단목수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이었다.
“때마침 묵룡이 홀로 임무 대기 중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소생이 후회하는 건, 당시에 달랑 묵룡만 보냈다는 점입니다. 위험을 미리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는 점입니다. 최소한 소생의 수호위라도 딸려서 보냈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았던 걸 후회한단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생이 지금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고요.”
맹주를 응시하던 단목수헌이 표정에 고마움을 담아 말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고맙소이다, 맹주.”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묵룡과 그 일행의 안위입니다. 청룡조가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단목수헌이 공감한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깬 건 백리우였다.
“편찮은 몸이 아니십니까. 바람이 제법 쌀쌀하니 이만 들어가십시오, 곡주님.”
“아니외다. 오가는 말이 없어도 좋으니, 잠시만 더 맹주와 이러고 있고 싶어서 말이외다.”
맹주 백리우와는 친분이 깊다면 깊은 사이였다.
그러나 속내를 터놓을 만큼 깊은 사이는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그랬다.
그나마 지난 삼 주간 같이 지내면서 마음의 벽을 조금은 허문 느낌이었는데, 이번 일로 마침 비슷한 심정을 공유하고 나니 이제는 백리우가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의 마음씀씀이도 고마웠다.
백리우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로, 단목수헌은 그 옆에 걸터앉은 채로,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이번에도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백리우였다.
“그 당시 묵룡의 전서에 따르면 적들은 당장에라도 사천으로 밀고 내려올 기세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대로 빠르게 대처를 했지요. 그 후로 이렇게까지 시간이 흘렀는데도 적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는지요?”
“으음…….”
역시 무림맹주는 무림맹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룡에 대한 걱정이 클 텐데도 그는 침착한 어조로 강호의 일을 논하고 있었다.
백리우의 말마따나, 묵룡의 전서를 입수한 무림맹의 대처는 빨랐다. 무림맹의 정예 무인 수천 명을 비밀리에, 신속하게 사천지부로 집결시킨 것이다.
당장 위험해질 가능성이 큰 당가나 청성파에 무림맹의 정예를 직접 배치하지 않은 이유는 적의 성동격서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적이 사천을 칠 것처럼 하고 인근의 감숙을 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경우, 감숙에 있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매우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무림맹 사천지부는 사천의 동쪽 경계 부근인 대죽현에 자리하고 있어, 사천이나 섬서 중 어느 곳을 지원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위치였다. 그래서 지휘 본부를 당가나 청성파가 아닌, 무림맹 사천지부로 잡은 것이다.
단목수헌이 대꾸했다.
“이 늙은이도 당최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일단 적을 알아야 그들의 동태도 살피고 대응 전략도 세울 텐데, 모든 게 뜬구름 속이니 이거야 원…….”
단목수헌이 마지막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맹에서는 아직까지도 묵룡이 언급한 적들을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여전히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들의 본거지나 거점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게 참 답답했다.
상황이 그러하니 이쪽에서는 최대한의 대비를 하는 것 외에 딱히 방법이 없기도 했다.
백리우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이나 제갈윤도 이 상황을 답답해하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그 즈음, 멀리에서 정자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영들이 있었다.
앞선 사람은 제갈윤이었다.
그의 뒤를 두 사람이 따르고 있었는데, 한 명의 중년인과 한 명의 청년이었다.
백리우가 보니 뒤따르는 두 사람은 낯선 자들이었다.
걸음걸이만으로 대충 짐작컨대, 중년인은 절정 고수쯤으로 보였고 청년은 거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로 보였다.
이윽고 제갈윤이 두 사람을 대동하고 정자 위로 올라왔다. 그러더니 단목수헌을 가리키며 중년인과 청년에게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인사드리시게. 저분은 현월의 곡주님이시네.”
“혀, 현월곡주님이시라니……!”
그 말을 들은 중년인과 청년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 이곳에서 현월곡주와 대면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제갈윤이 곧바로 백리우를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옆에 계신 분이 바로, 맹주님이시네.”
이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일까?
중년인과 청년이 잠시 동안 눈만 껌뻑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두 사람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허업!”
“매매매매매매, 매, 매, 맹주님……!”
중년인은 쩍 벌어진 입을 서둘러 한 손으로 막았고, 청년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단목수헌이 먼저 중년인과 청년에게 말했다.
“반갑네. 문상께서 소개해주신 것처럼 이 늙은이가 바로 현월곡의 단목 모라 한다네.”
단목수헌에 이어서 백리우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반갑네. 문상이 소개했듯, 부족한 이 사람이 바로 맹주일세.”
그러자 중년인과 청년이 황급히 오른손 주먹을 가슴에 대었다.
“맹주님을 뵈옵니다!”
“충(忠)……!”
중년인이 선창을 외쳤고, ‘충’이라는 구호는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왔다.
두 사람 모두 무림맹의 예법을 취한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한 백리우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오! 두 사람 다 무림맹 소속이었군그래. 일단 예를 거두시게.”
그러자 중년인과 청년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오른손을 내렸다.
백리우가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누구신가?”
“저는 무림맹 절강지부 천망단 제이 타격대주, 최익이라 합니다!”
“저저저저, 저는 무, 무림맹 저, 절강지부 비마대 소속, 오오오, 오필이라 합니다!”
무림맹 절강지부의 천망단과 비마대라는 말에, 이번에는 백리우와 단목수헌의 눈동자가 커졌다.
단목수헌이 황급히 물었다.
“하면 자네들은 혹시……?”
그러자 중년인, 최익이 대답했다.
“한설연 소저의 호위 임무에 참여했었는지를 하문하신 거라면……, 그렇습니다.”
그 말에 단목수헌과 백리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옆에서 제갈윤이 말했다.
“이들은 방금 전에 사천지부에 도착했습니다. 여기 있는 최 대주가 맹의 명패를 내밀며 사천지부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꼭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전서를 전하고 온 길에 마침 이들과 마주치게 되어 바로 이곳으로 데려온 겁니다.”
잘했다는 듯, 백리우와 단목수헌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앉게나. 앉아서 얘기하지.”
최익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그는 처음에 적과 조우한 순간의 일부터 마지막에 단유소의 도움을 받아 따로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고했다.
단유소와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오필은 중간중간에 최익이 모르는 상황들에 대해 간략하게 첨언을 하곤 했다.
이후에는 제갈윤과 단목수헌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적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기 위함이었다.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모든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백리우가 말했다.
“많이 피곤했을 텐데, 그 와중에도 보고하느라 두 사람 모두 고생 많았네. 내가 자네들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특별히 말해두고 싶군.”
“저희들은 그저 운 좋게 살아남은 것에 불과한데, 맹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최익이 그렇게 대꾸하자 이번에는 제갈윤이 말했다.
“자네들의 이야기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네. 두 사람은 일단 숙소에 가서 쉬고 있게.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찾아갈 테니, 당분간은 조금만 더 수고해주게.”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문상 어른. 언제든 불러만 주십시오.”
최익이 그렇게 대꾸하자 이번에는 오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사온데…….”
“말해보게.”
“혹여 유소 형님, 그, 그러니까 단유소 감찰단원이나 한설연 소저에게서 연락이 온 건 없었는지요? 제겐 너무 고마운 분들이신데 안위가 매우 궁금하여…….”
그 말에 백리우와 제갈윤 그리고 단목수헌이 빠르게 눈짓으로 의사를 주고받았다. 그런 후에 제갈윤이 대답했다.
“일전에 간단한 전서는 받았네. 단 감찰이 한 소저를 호위하며 이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하더군.”
단유소가 중태라는 사실을 굳이 저 두 사람이 알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사실을 모르는 게 나을 것이다.
“아아……!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최익과 오필이 서로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제갈윤이 말했다.
“방금 이곳에서 나눈 모든 이야기, 그리고 단 감찰과 한 소저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철저히 함구해줬으면 좋겠네. 기밀과 연관된 사안이라서 그러네. 자네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내가 조치도 취해두겠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맙네. 그럼 가서 쉬게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최익과 오필은 예를 취한 후 정원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