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59화 (59/200)

59화. 소수의 후예 (1)

암요, 단 공자님.

다른 건 다 좋아요. 그녀에게 깊이 고마워하고 있고요. 딱 하나, 저 말투만 거슬러요.

땅콩이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요. 창피한 일이지만 아동 보호 차원의 문제가 아닌 실력 차원의 문제가 있거든요.

그러니 단 공자님이 어떻게 좀 해주세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 공자님밖에 없다고요. 내가 단 공자님 말고 누굴 믿겠어요.

한설연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 모든 말들을 단유소에게 쏟아내고 싶었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침상에 앉아 있던 심소옥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뭘 주저해? 편하게 대답해. 편하게.”

심소옥의 미소를 확인한 한설연이 움찔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반사적으로 그런 반응이 나왔다.

어제 심소옥이 저 미소를 지어 보인 후에 귀산사흉이 다 죽었다. 그때의 인상이 아직도 무의식 속에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한설연이 말했다.

“처, 처음에는 약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지금은 딱히…….”

“그래? 고충이 있을 것 같아서 조정 좀 해주려던 건데, 한 소저가 괜찮다면야.”

단유소가 그렇게 대꾸하자 한설연이 황급히 말했다.

“아, 아니 뭐, 그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필요까지는…….”

“푸하하하!”

누운 상태로 단유소가 옆구리를 잡고 웃었다. 그가 잡은 옆구리는 상처 부위였다. 단유소가 여전히 웃음기를 띤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하여간 한 소저 때문에 웃고 산다, 요즘은.”

아, 또 당한 거구나.

한설연이 그 생각을 하며 민망하게 웃고 있을 때 단유소가 말했다.

“소옥이 말투는 원래 좀 거칠어. 그것 때문에 기분 나쁠 수 있다는 건 이해해. 그런데 어린아이가 건방지게 군다는 생각으로 기분 나빠할 필요는 없어.”

뜻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할 때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로 소옥이가 한 소저보다 나이가 많거든.”

그러자 한설연이 양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걸 지금 믿으라는 소린가?

그때 단유소가 말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실제로 그래.”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한설연은 뜨끔했다.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스물셋이잖아. 소옥이는 스물다섯이야.”

뭐어? 저 어린 심소옥의 나이가 스물다섯이라고?

말도 안 된다.

보아하니 이건 저 둘이 짜고 놀리고 있는 거다.

“에이. 아무리 제가 단 공자님 앞에서 어수룩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지만 그런 농담을 믿을 정도로까지 어수룩하진 않아요. 하하…….”

말을 해놓고 보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단유소와 심소옥이 대꾸 없이 조용히 한설연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어색하게 미소 짓던 한설연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져갔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단유소에게 물었다.

“설마 진짜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죠?”

한설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단유소가 대꾸했다.

“진짜야.”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한설연은 알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의 단유소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에는 심소옥이 말했다.

“믿기 힘들겠지.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거야.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야. 네가 원하는 그 무엇에 맹세하라고 해도 맹세할 수 있다고. 게다가 언니라는 소리 듣고 싶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건방지고 싸가지 없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심소옥이지만,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한설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나와의 나이 차이가 두 살밖에 안 나는데도 소옥이가 내게 숙부라고 부르는 이유는, 소옥이의 사부와 내가 서로 누님, 동생 하는 관계라서 그래. 항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지.”

마침 심소옥의 사부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그전부터 궁금해했던 것들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한설연이 잠시 심소옥의 눈치를 살피더니 단유소에게 물었다.

“실례되는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심 소저의 사문은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여태 하던 이야기와는 별개로 너무 궁금했어요. 대체 어떻게 저렇게 강한 건지…….”

그러자 단유소와 심소옥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심소옥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단유소가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비밀인데…….”

그 말에 한설연이 진지한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소옥이는 소수궁(素手宮)의 후예야.”

소수궁이 뭔지를 잠시 떠올리던 한설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커졌다.

소수.

즉, 하얀 손이라는 뜻이다.

“서, 설마 소수궁의 소수가 제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소수인가요?”

단유소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심소옥에게서 나왔다.

“강호에는 주로 소수마공(素手魔功) 내지는 소수마후(素手魔后)와 같은 명칭들로 알려져 있지. 그러니 맞아. 네가 알고 있는 바로 그거야. 그리고…….”

잠시 말을 줄인 심소옥이 이번에는 단유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내가 제십팔 대 궁주에 올랐어.”

한설연은 여전히 놀란 상태였고, 단유소는 대충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삼백 년 전.

한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등장하여 온 강호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일이 있었다.

그녀는 선계에서 내려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강호의 미인 서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강호제일미 이하, 모든 미인들의 서열이 한 단계씩 하락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여인이 정작 강호인들을 놀라게 한 건 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었다. 강호인들이 놀란 건 그녀의 무시무시한 강함 때문이었다.

여인의 무공은 흔한 검공, 도공, 창공 등이 아닌 수공(手功)이었는데, 그 무공 하나에 수많은 강호 고수들이 줄줄이 무릎을 꿇었다.

강호에 어떤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나, 여인은 손속에 사정이 없기로 유명했다. 정사마를 불문하고 그녀에게 거스르는 자들은 다 죽었다.

그녀는 차원이 다른 고수였다.

더욱 놀라운 건 여인은 어떤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를 돕는 조력자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었다.

여인는 항상 혼자 움직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강호가 벌벌 떨었을 정도로 그녀는 막강했다.

희한한 점은 여인이 수공을 사용할 때 그녀의 손이 희고 투명한 느낌으로 변한다는 점이었다. 그 상태가 되면 그녀의 손은 그 무엇보다 단단하고 강력해져서 쇠붙이도, 검기나 강기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듯 희게 변한 손이 잔인하다 하여 강호인들은 여인을 소수마후라 불렀다.

한동안 온 강호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소수마후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기에 이른다.

정사마 최고의 고수들이 비밀리에 손을 잡고 협공으로 소수마후를 물리쳤다는 소문도 있었고, 누군가에게 갖고 있던 원한을 갚자 그녀가 알아서 종적을 감췄다는 소문도 있었다.

독공에 당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었고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어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중요한 건 그 후로 누구도 소수마후를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가 강호에서 활동한 지 약 삼 년쯤 흐른 시점의 일이었다.

‘행방불명.’

그것이 무림맹의 전신인 승천맹에서 소수마후에 대해 기록한 마지막 한 줄이었다.

그로부터 이백 년쯤이 흘렀을 때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수뇌부는 한 여인에 대한 보고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백 년도 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

보고는 다름 아닌, 손이 하얗게 변하면서 무서운 무공을 쓰는 여인에 대한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강호인들이 소수마후라는 존재 자체를 알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무림맹과 천마신교만큼은 그녀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결국 두 단체는 각각 그녀가 소수마공을 익힌 여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당연하게도 예전의 소수마후와는 다른 여인이었지만 그녀 또한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매우 강했다.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는 조용히 강호를 유람할 뿐, 분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무림맹과 천마신교 측에서 비밀리에 접촉해본 결과, 그녀는 실제로도 분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다만 그녀는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그것은 바로 초고수들과의 비공개 비무.

대상은 정파와 마교에서 각각 무공 서열이 오 위 안에 드는 고수들이었다.

소수마공을 익힌 여인과의 비무 대결은 정마의 고수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를 끌 만한 사안이었다. 예전의 기록이나 전설 속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존재가 바로 소수마후였으니, 소수마공이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가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결과에 대한 함구를 전제한 비공개 비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차례로 이어진 그 비무에서 정파 측의 성적은 사패(四敗). 그게 서열 이 위부터 오 위까지의 성적이었고, 당시의 천하제일인이었던 무림맹주의 비무 결과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천마신교 쪽의 정확한 성적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성적도 무림맹의 성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게 당시의 비무를 아는 사람들의 중론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무림맹주와의 비무를 마지막으로 소수마공을 익혔던 그 여인은 종적을 감췄다.

‘행방불명.’

그것이 무림맹에서 그 여인에 대해 기록한 마지막 한 줄이었다.

거기까지가 한설연이 소수마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현월비고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참고로 현월비고는 현월곡의 서가 중에서도 중요한 문서나 비급만을 보관하는 장소였다. 당연히 곡주와 그의 직계 제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었다.

한설연은 당시의 무림맹주와 천마신교주는 그 여인과의 비무에서 이겼을지 졌을지 궁금했었다. 그래서 질문했더니 사부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아마, 그 두 최강자도 그녀에게 패했을 것이다. 언젠가 한번 지금의 맹주와 문상과 더불어 그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의 예상도 내 예상과 같더구나.”

맹주 백리우와 문상 제갈윤, 거기에 사부까지 같은 추측을 했다면 거의 맞는다고 봐야 했다.

더불어 사부는 이런 말도 했다.

“소수마공은 아마도 여인이 익히기에 특화된 무공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감일 뿐이다만, 나는 소수마공이 어디에선가 비밀리에 전수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행여, 나중에라도 손이 하얗게 빛나는 무공을 쓰는 여인과 마주치거든, 절대로 그녀를 거슬리게 하지 말거라. 또한 서둘러 그녀의 주변을 벗어나야 할 것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 모든 것을 상기해낸 한설연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심 소저의 수공이 엄청나게 강하다는 사실이야 직접 겪어서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가 본 심소저의 손은 전혀 하얗게 변하거나 하지는 않던데……. 듣기로 소수마공, 아니 소수공은 손이 하얗게 변한다고…….”

그러자 심소옥이 묘한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한 손으로 다른 손의 손끝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허물이 벗겨지듯 그녀의 손에서 뭔가가 벗겨졌다.

자세히 보니 연한 묵색의 반투명한 장갑이었다. 손목의 위쪽까지 충분히 가릴 만한 형태였는데, 재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굉장히 얇았다.

그리고 그 순간, 심소옥이 양손을 앞으로 내밀며 기운을 일으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장갑을 벗은 심소옥의 한쪽 손이 영롱한 하얀빛을 띠어가기 시작했다. 한설연과 연소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 건 당연했다.

장갑을 벗은 손과 그렇지 않은 손이 확연한 차이를 보일 때쯤, 심소옥이 기운을 거두었다. 그러자 하얀빛을 띠어가던 그녀의 손이 다시 본래의 혈색을 찾아갔다. 그렇다고 해도 원래 희고 고운 손이긴 했지만.

심소옥이 묵색의 반투명한 장갑을 다시 손에 끼며 말했다.

“묵린갑이라는 물건이야. 솔직히 나도 믿진 않지만, 이무기의 비늘과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지지. 내 사조(師祖, 사부의 사부)의 사부, 즉 사증조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고.”

“그렇다면 백 년 전에 마지막으로 강호에 모습을 드러냈다던 소수마후의 후예, 그, 그러니까 소수궁주가…….”

“소수마후라 불러도 큰 상관은 없어. 정이라 불리든 마라 불리든 우리에게는 별로 상관없으니까. 어쨌든 네 말대로 그분이 아마 우리 사증조셨을 거야. 그리고 그 후에 우리 사조님과 사부님도 강호에 나왔었어. 오히려 더 자주 나오셨지.”

“아……!”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소수마후의 출현에 관한 기록이 없었던 이유는 저 묵린갑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공을 써도 손이 하얗게 변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소수마공을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 당장 자신만 해도 이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심소옥과 소수마공을 전혀 연관시키지 못했으니까.

한설연이 심소옥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이런 걸 내가 알아도 되는 건지…….”

그러자 심소옥이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그녀 특유의 위험한 미소였다.

“괜찮아. 마음껏 밝혀도 돼. 누군가에게 밝히고 나서도 편하게 발 뻗고 잘 자신이 있다면. 그리고 너로 인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무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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