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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57화 (57/200)

57화. 의문의 소녀 (3)

한설연은 스스로가 한심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소리는 너무 떨렸고, 심지어는 경어까지 쓸 뻔했다. 가뜩이나 아까 이미 어린아이 대하듯 자연스럽게 하대를 해놓고서.

그 사실을 겨우 인식하고 서둘러 말투를 바꿨다. 그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쏘아보는 소녀의 눈빛이 매서웠다.

당장이라도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한설연은 이를 악물고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지금 시선을 피하면 영영 그녀의 눈을 피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소녀가 또다시 특유의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내가 먼저 묻지 않았던가?”

“네, 네가 이분과 아, 아는 사이라는 건 알겠어. 하, 하지만 이분을 지키는 우리 입장에서도……, 최소한의 확인 절차는 필요해서……. 네가 누군지, 의도가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아, 이 한심한 입술은 왜 계속 떨리는 걸까. 말은 왜 자꾸 더듬게 되는 거고.

소녀가 재미있다는 듯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 물론 지금 당장만 놓고 보면 우리가 네게 고마워해야 할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어. 백 번을 고마워해도 모자랄 일이지. 하지만 그 또한, 네가 정체를 밝힌 후야.”

아아, 이번에는 거의 안 떨었다.

처음 한두 번이 어려웠다 뿐이지 계속하다 보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한동안 한설연을 바라보던 소녀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채로 입을 열었다. 아까 귀산사흉을 처치할 때 보였던, 바로 그 죽음의 미소였다.

“쓸데없는 고집 피우지 말고 빨리 대답이나 하지?”

그런데 오히려 한설연의 머리는 차가워지는 중이었다.

한설연이 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고집을 피우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소녀가 아미를 찡그렸고,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분의 뜻에 따르는 것뿐이야. 확신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한, 누가 도와준다고 해도 섣불리 믿지 말라고 하셨거든.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입장이란 뜻이야.”

이제는 오히려 떨리지 않았다. 더 이상 소녀가 두렵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묘한 미소를 보이며 한설연을 바라보던 소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당신, 그래도 아주 한심한 정도는 아니네.”

마치 한번 시험해봤다는 듯한 표정과 어조였다.

한설연이 눈매를 좁힐 때 소녀가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전서를 받고 저 위에 있는 하얀 아이를 쫓아온 거야. 이쯤이면 알아듣지?”

소녀가 말한 ‘하얀 아이’란 당연히 설화였다.

물론 한설연도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소녀가 등장한 직후에 설화도 등장했으니까.

다만, 단유소에게서 배웠듯, 최소한의 근거가 필요했을 뿐이다. 만약 소녀가 설화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이 된다. 그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더 이상의 의심은 의미가 없는 상황.

인정한다는 의미로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진심으로. 지금은 말로밖에 고마움을 표할 길이 없어서…….”

“됐어. 딱히 당신들을 돕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그보다도 아까 내가 물은 것에 대해 대답이나 하지?”

“어제……, 너무 강한 사람과 붙었어. 겨우 이겼는데 이분도 큰 상처를 입으셨어. 내상도 컸고.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는데 어찌어찌 치료는 해서 지금은 안정이 된 상태야. 의식만 아직 안 돌아온 거고.”

한설연이 그렇게 말하자 소녀가 다가왔다.

그녀가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심했다.

소녀가 한설연과 연소운 사이를 지나치더니 단유소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맥을 확인했다.

그 상태에서 소녀의 표정이 서너 번 변했다.

마지막 즈음에는 놀란 기색이었는데, 그러다가 뭔가를 납득했다는 듯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가 눈을 뜨더니 말했다.

“당신 말이 맞네. 더 물어보고 싶은 건 많지만 그건 잠시 미뤄둬야 할 것 같아. 파리들이 점점 꼬이고 있어서 말이야.”

그녀의 말마따나 다른 적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가 연소운을 불렀다.

“거기, 꺼벙이.”

“예? 예…….”

연소운이 얼떨결에 대꾸했다.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소녀가 명령하듯 말했다.

“저분은 당신이 업어.”

“아, 아……. 예…….”

“빨리!”

소녀가 재촉하자 연소운이 서둘러 단유소를 일으켰다. 한설연도 연소운을 도와 단유소를 그의 업혔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녀가 한설연에게 말했다.

“짐은 둘이 나눠서 들고.”

이 건방진 꼬맹이가 어디서 하인 부리듯이!

생각은 그랬지만 한설연은 즉시 짐을 챙겨 들고 있었다. 어차피 그래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는 소녀 외에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이봐, 꺼벙이.”

그 말에 연소운이 돌아보자 소녀가 다시 말했다.

“대강의 방향은 일단 서남쪽이야. 그러다가 방향을 틀어서 강줄기 쪽으로 향할 거야. 중간중간에 내가 따로 길을 알려줄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예…….”

“그분의 몸에 충격이 가거나, 그분의 상처가 벌어지거나 하면 아주 죽여버릴 거야.”

소녀의 태도나 말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존재 자체가 든든하긴 했다.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이래서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하는 건지도…….’

한설연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 소녀가 앞장서며 말했다.

“내 이름은 심소옥(審素鈺). 참고로 저분은 내가 숙부라고 부르는 분이야.”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소녀가 앞장서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한설연과 연소운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정확히 어떤 관계일까? 단 공자님에게 숙부라고 했으니 심소옥이 조카인 건 당연하겠지만…….’

심소옥이 말하는 모양새로 보니 혈연으로 얽힌 관계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단유소는 저런 소녀와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이런저런 궁금증이 도졌지만, 그 궁금증이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다.

적과 얽힌 시점부터는 그런 궁금함이 들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심소옥 때문이었다.

‘와아……!’

그녀의 강력함에 대해서는 이미 목격했지만, 불특정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모습도 감탄을 자아냈다. 길을 뚫는 속도도, 그 와중에 일행을 지키는 안정감도 단유소 못지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여전히 납득이 가지는 않는다. 저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 강할 수가 있는 건지.

어쨌거나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건방지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매우 거슬렸는데,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예뻐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쫓아오는 적의 숫자가 죽어 나가는 적의 숫자를 따라오지 못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적을 상대하지 않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고, 이동도 한결 수월해졌다.

그게 심소옥이라는 소녀의 신위였다.

한동안 서남향을 향해 나아가던 일행이 동남향으로 방향을 꺾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달리자 강줄기가 나타났다.

일행은 심소옥의 지시에 따라 강줄기의 주변을 타고 하류 쪽으로 계속해서 달렸다.

한설연이나 연소운 모두 지칠 대로 지쳐,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심소옥과 함께하고 있는 이 기회를 무조건 살려야 했다.

하도 힘들어서 머릿속이 점점 새하얗게 변한다는 느낌이 들 때쯤, 심소옥이 앞장서서 강가의 무성한 갈대숲으로 달려갔다.

한설연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 무성한 갈대숲에 은신하여 조금이나마 쉬자는 의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소옥의 뒤를 따라 갈대숲으로 들어선 한설연은 자신의 추측이 틀렸음을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어……?”

의외로, 갈대숲 속에 심소옥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육십 대의 인상 좋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더 놀라운 건 노인이 배 위에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배는 어획용의 작은 배였는데, 사람이 탄다면 최대 예닐곱 명이 탈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노인이 타고 있는 배는 무성한 갈대숲 사이에 교묘하게 감춰져 있어, 강줄기를 오가는 여객선에서도 발견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심소옥이 낮은 목소리로 노인을 향해 말했다.

“감사해요, 마(馬) 아저씨. 그리고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노인의 성이 마씨인 듯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아가씨. 게다가 오랜만에 아가씨를 뵐 생각을 하니, 기다리는 시간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허허.”

두 사람은 제법 친밀해 보였는데, 특히 어린 심소옥을 대하는 노인의 자세가 매우 공손했다.

한설연은 심소옥과 노인의 대화 속에서 이 일이 미리 계획된 일이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심소옥이 주도한 모양새여서 놀랍기도 했다. 저 어린 심소옥이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했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아, 안녕하십니까.”

한설연과 연소운이 차례로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노인은 한설연과 연소운을 보며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후에 노인이 심소옥에게 말했다.

“어서 배에 오르시지요. 마침 이 시간쯤엔 배가 오가지 않습니다. 앞으로 일각 정도는 안전할 겁니다. 바로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래요.”

심소옥을 따라 한설연과 연소운이 배에 오르자 노인이 말했다.

“멀리서라도 지켜보는 이목이 있을지 모르니, 모두 최대한 자세를 낮추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야 만약의 상황이 되어도 제가 그물로 덮어서 가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심소옥이 노인의 뒤쪽에 옆으로 쪼그리고 누웠다.

한설연과 연소운도 단유소를 바로 눕힌 후, 그 양옆에 누웠다. 심소옥이 체구가 작아서 그런지 공간은 나름 넉넉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려는 건지…….”

한설연이 옆으로 누운 상태에서 그렇게 말하자 심소옥이 대꾸했다.

“가보면 알아. 그 전까진 하라는 대로만 해.”

이윽고 노인이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서며 주변을 살폈다. 곧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는지, 그가 앉아서 노를 잡았다.

배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샤아악― 샤아악―

그 즈음, 한설연과 연소운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였다.

배가 나아가는 속도 때문이었다.

마른 체구의 노인이 노를 젓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쭉쭉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한설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날카로움을 담았다.

‘역시, 보통 노인이 아니었어.’

노인 또한 상당한 경지의 고수로 보였다. 이러니 심소옥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그 후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배가 나아가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즈음 노인이 말했다.

“거의 다 도착했으니 슬슬 내릴 준비들 하십시오.”

누운 상태에서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배의 난간에 가려져서 밖의 상황을 온전히 확인할 수는 없다지만, 적어도 난간 위쪽 공간들은 보였다. 한설연이 판단하기로 이곳은 절벽 근처였다.

그런데 내릴 준비를 하라니?

암벽 위에서 누군가 밧줄이라도 내리고 있는 건가?

하지만 암벽이 제법 높아 보였는데?

한설연이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할 즈음 심소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잘 들어. 우리는 곧 입수할 거야. 강물 안으로 들어가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쫓아와.”

입수……?

한설연과 연소운이 동시에 고개를 갸웃할 때 심소옥이 다시 말했다.

“지금 바로 준비해. 거기에 있는 밧줄로 그분을 꺼벙이의 등에 잘 고정시켜. 당신이 도와줘.”

한설연과 연소운이 순순히 지시에 따르고 있을 때 노인이 말했다.

“도착하면 할멈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심소옥이 고개를 끄덕인 후 대꾸했다.

“마 아저씨, 감사했어요.”

“제가 큰 마님에게 입은 은혜에 비하면 그야말로 초라한 정도에 불과하지요. 그러니 작은 마님과 아가씨께서도 소인을 좀 더 자주 부려주십시오.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알겠어요. 조만간 다시 찾아뵐게요. 그럼 갈게요!”

“살펴 가십시오, 아가씨.”

이윽고 심소옥이 살짝 몸을 일으키더니 배의 난간을 타고 강물 속으로 입수했다.

포옹!

이어서 연소운이 몸을 일으켰다. 단유소를 업은 그가 노인에게 살짝 목례한 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마지막은 한설연이었다.

“감사했습…….”

“소저.”

갑자기 한설연의 말을 끊은 노인이 인자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아가씨를 잘 부탁합니다.”

“예? 오히려 신세는 제가 지고 있는데…….”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인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더 늦으면 우리 아가씨를 놓칠 겁니다.”

여전히 영문 모를 표정을 지은 채로 한설연이 노인에게 서둘러 목례했다. 이윽고 그녀도 난간을 타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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