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55화 (55/200)

55화. 의문의 소녀 (1)

기술, 의외성, 폭발력 등으로 일거에 상대를 압도하는 단유소.

정교한 쌍검술로 단단하게 방어를 하는 가운데, 천천히, 하나씩 상대를 굴복시키는 연소운.

그렇듯 두 사람의 무공은 성향 차이가 극명했다.

경지의 차이가 있기에 직접 비교는 큰 의미가 없지만, 연소운의 쌍검술이 대단하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문득 일전에 단유소가 동료에 대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조원들 중에 실력이 제일 뒤처지는 녀석이 있어. 그래서 다른 조원들에게 늘 미안해하는 녀석이지. 매사에 자신감이 없는 데다가 마음도 여린 녀석이거든.”

그런 동료지만 지금은 잘 성장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당시, 단유소의 표정에는 신뢰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한설연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 동료가 바로 연 공자님이었구나…….’

그런데 한 가지가 의아했다.

아까 연소운은 자신의 쌍검술 실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투로 말했었다. 그래서 부친과 형들에게 늘 꾸지람을 듣는다고 했었다.

결코 겸손한 척한 게 아니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눈빛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미안해했던 것이고.

‘그런데 저게 부족한 수준이라고? 저 실력을 가지고도 꾸지람을 듣는다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강호에 저런 실력자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순간, 한설연의 눈매가 좁아졌다.

적의 공격을 막아내던 중 우연히 연소운의 얼굴이 보였는데, 그 순간 묘한 이질감이 들었던 것이다.

‘뭐였지?’

그 후, 연소운과 다시금 얼굴이 마주쳤을 때에야 한설연은 그 이질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눈동자에…… 초점이 없어……?’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맹렬히 싸우고 있는 무인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느껴지지 않는다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경우란 말인가.

순간적으로 수많은 의문들이 뇌리를 스쳤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연소운이 갑자기 변한 이유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높아 보였다.

그런 생각을 하던 한설연이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연 공자님을 돕는 일에 집중하자. 무엇보다도 이후의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연소운이 갑자기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귀산사흉도 기본적으로 연소운 못지않은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멀쩡했고, 합공도 매서웠다.

방어하기에도 바쁜 연소운이 그들을 쓰러트리기를 바라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대로라면 연소운이 귀산사흉보다 훨씬 빨리 지칠 것이 자명하다.

게다가 저들의 말에 따르면, 인근에 다른 적들도 있다고 했다. 그들까지 합류하면 그야말로 앞일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그 안에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게 막막했다.

잠시 고민하던 한설연이 이윽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가 즉시 연소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연 공자님, 이 상태로는 결국 연 공자님이 먼저 지칠 거예요. 그러면 모든 게 끝이에요. 그 전에 어떻게든 틈을 찾아서 한순간을 노려야 해요.]

연소운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당연히 대꾸하기 힘든 상황일 것이다.

한설연이 바로 다시 전음을 보냈다.

[연 공자님이 틈을 만들어주세요. 딱 한 번이면 돼요. 그 순간에 제가 단 공자님을 업고 경공을 펼칠 테니, 연 공자님이 뒤따르며 저들을 막아주세요. 이동하다 보면 우리에게 유리한 지형이 나올 수도 있어요. 일단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나야 해요.]

처음에는 단유소와 연소운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했었다. 연소운이 단유소를 데리고 떠나면 자신이 남아서 최선을 다해 저들을 막아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귀산사흉의 실력을 보니 그건 오판이었다.

혼자서는 저들을 저지하기는커녕, 약간의 시간조차도 벌어줄 가능성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채 셋을 세기도 전에 자신은 저들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상황은 안 봐도 빤하다.

단유소를 업고 달려야 하는 연소운도 얼마 안 가서 저들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다. 고로 그 방식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대단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지금의 연소운을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그라면 뒤따라오는 귀산사흉을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조금의 가능성에라도 운명을 걸어야 할 때였다.

연소운에게서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제 말씀 알아들으셨으면 고개만 끄덕여주세요.]

하지만 연소운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연 공자님? 제 말 들리시면 고개 좀 끄덕여주세요. 빨리 결정하고 움직여야 해서요.]

재차 말했음에도 연소운은 반응하지 않았다.

[연 공자님……?]

여전히 반응이 없자 한설연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왠지 자신의 전음을 듣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들었다면 그가 이렇듯 반응하지 않을 리 없었다.

초점이 없었던 그의 눈동자가 왠지 걸렸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 이유 따위가 아니었다.

단 하나 남은 가능성이 사라질 위기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연소운과의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몸을 건드려서라도 반응하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의 연소운은 그야말로 격렬하게 움직이며 귀산사흉의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상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고수간의 싸움이니 자칫 잘못하면 그 순간에 모든 게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 답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설연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전음으로 연소운을 불렀다.

그러는 가운데 시간이 점점 흘러갔다.

그 후로 반각쯤 지났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적들도 이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연소운에게서는 여전히 반응이 없으니 한설연의 눈빛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곧 우리 측 인원들이 도착할 거야! 다 된 밥에 재 뿌리기 싫으면 어서 처리해야 해! 저놈도 지쳤어! 다들 조금만 더 힘을 내!”

연소운을 공격하던 첫째가 신경질적인 어조로 그렇게 외쳤다.

그 말에 귀산사흉의 기세가 더욱 거칠어졌다.

귀산사흉의 입장에서는 끝났어도 이미 끝났어야 할 싸움이었다. 그런데 연소운이 의외의 힘을 발휘하면서 상황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첫째의 말마따나 연소운의 움직임은 많이 둔화된 상태였다. 호흡이 거칠어진 것은 물론이고, 옷 앞섶은 이미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한설연은 절망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 적들이 이곳을 향해 모여들고 있는 상태.

이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검을 휘두르며 연소운을 돕던 한설연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단유소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아직도 의식이 깨어나지 않은 것이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단 공자님…….’

과정상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었지만 연소운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단유소를 지켜주지 못한 지금의 결과 그 자체다.

만약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단유소를 저렇게 만든 자신을 탓할 일이었다. 물론 그조차도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지만.

‘결국 단 공자님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하네요, 저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한설연은 거세게 어금니를 악물며 참아냈다. 울어서는 안 될 상황이기도 했지만, 울 자격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말 미안해요…….’

한설연이 다시 한번 단유소를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뇌었다.

그 직후, 다시 귀산사흉에게로 향한 그녀의 눈동자에는 독기만이 가득했다.

연소운이 버티는 한은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그러나 연소운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싶으면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미리 심장 위에 검을 겨누고 있다가 지체하지 않고 자진할 것이다.

살아서 저들에게 붙잡힐 경우, 어떤 식으로 이용당하게 될지 모른다. 저들은 정신금제와 같은 흉악한 방법도 서슴지 않고 쓰는 자들이 아니던가.

이 강호에 도움이 되는 일은 하나도 못 했는데, 되레 피해만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끼이이― 끼이이이―

높은 하늘 위에서 그런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청비…….’

그리고 연소운의 매는 금랑이라 했던가.

왠지 녀석들도 주인들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슬피 우는 것만 같았다.

그렇듯 의미 없이 검을 휘두르던 한순간.

한설연이 갑자기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악에 받쳐서 연소운과 자신을 공격하는 귀산사흉의 등 뒤로 이상한 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이상한 건 사람이었다.

사람은 사람인데, 지금 이 상황과는 너무 동떨어진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눈을 깜빡인 것이다.

한 명의 소녀였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열서너 살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 소녀였다.

소녀는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다. 딱 봐도 매우 고급스럽고 예쁜 비단옷이었다.

그런데 소녀가 입고 있는 옷보다 그녀의 얼굴이 더 예뻤다.

미인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그야말로 아름다운 용모였다. 저렇게 예쁜 얼굴을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선녀 같았다.

그렇기에 한설연은 이 상황이 현실 같지 않았다.

검광이 난무하는 이 싸움터에 어떻게 저렇듯 귀엽고 예쁜 소녀가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길을 잘못 들었나?’

더 의아한 건, 소녀가 똑바로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이기엔 사뿐사뿐 걸을 뿐인데 상당히 빠른 느낌이었다.

열다섯 걸음, 열세 걸음, 열한 걸음…….

소녀가 뒤쪽에서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귀산사흉은 아직 인지하지 못한 눈치였다. 한 명도 뒤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도 이상했다. 거리가 이 정도로 가까워졌는데도 저 고수들이 감지하지 못하다니.

그렇기에 한설연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자꾸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란만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한설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얘야! 이곳으로 오면 안 돼! 도망쳐!”

눈매를 찡그리는 귀산사흉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설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소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여전히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벌써 열 걸음 안에 들어온 상태였다.

한설연이 더욱 다급해진 음성으로 외쳤다.

“얘! 안 된다고! 어서 도망치란 말이야!”

그쯤 되자 귀산사흉의 첫째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로 뒤를 돌아봤다.

그 직후, 그가 목을 길게 뺐다. 동시에 그의 움직임도 우뚝 멈췄다.

“무, 무슨…….”

첫째도 황당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산중에, 이 싸움터에, 난데없이 저렇게 예쁜 소녀가 나타났다는 게 어찌 현실처럼 느껴지겠는가.

그러자 나머지 귀산사흉도 연소운을 견제하며 하나둘씩 뒤를 돌아봤다. 뒤쪽의 상황을 확인한 그들의 반응도 첫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한설연이 연소운을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연소운도 동작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한설연을 바라보는 연소운의 표정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한 소저……?”

지금 뭐 하는 짓이냐는 눈빛.

한설연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연소운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여태까지 본인이 뭘 하고 있었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한설연이 연소운에게서 떨어지며 나직이 말했다.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그러면서 한설연이 턱짓으로 전방을 가리키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연소운도 두 눈을 부릅떴다. 귀산사흉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소녀는 어느새 멈춰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일곱 걸음 거리이니, 귀산사흉에게서는 다섯 걸음 거리였다.

그 즈음, 귀산사흉의 첫째가 소녀에게 말했다.

“참 예쁜 아이로구나. 그런데 아이야, 너는 지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 것이냐?”

황당함이 가득 담긴 어조였다.

소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로 가만히 첫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야, 이 아저씨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이번에도 소녀는 대꾸하지 않았다.

끼이이이―

다시금 들려온 매 울음소리에 한설연이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응?’

한설연의 눈매가 좁아졌다.

당연히 청비와 금랑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세 마리의 매가 떠 있었던 것이다.

그중 한 마리는 지금 소녀가 입고 있는 옷 색깔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설화……!’

한설연이 속으로 반가움을 삼킬 때 귀산사흉의 첫째가 또다시 소녀에게 물었다.

“아니면 말을 할 줄 모르는 게야?”

여전히 소녀에게서 대꾸가 없자, 첫째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어떻고, 말을 할 줄 모르면 어떻겠느냐. 잘 왔다. 거기에서 조금만 기다려라. 조금 있다가 이 아저씨랑 함께 가자꾸나. 흐흐흐.”

그 말에 소녀가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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