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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54화 (54/200)

54화. 불안한 조력자 (6)

열 걸음 정도의 거리에서 적들이 멈춰 섰다.

맨 앞에 선 사십 대 황의 사내가 말했다. 나이가 가장 많은 만큼 그가 저들의 우두머리인 듯했다.

“하나가 더 늘었군?”

연소운을 지칭하는 말.

사십대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학(白鶴) 공자께서 당했기에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 저자도 치명상을 입은 거군. 아직 의식이 없다고 했겠다?”

웃고 있는 그의 표정 속에 여유가 넘쳤다.

단유소의 상태를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이쪽에서 나누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한설연은 사내가 말한 백학 공자가 누군지 짐작이 갔다. 어제 단유소에게 죽은 그 백의 사내일 것이다.

참고로 어제 백학이라는 자가 말하길, 예전에 단유소가 해치웠던 홍의 사내를 일컬어 홍학이라 했었다. 두 사람 모두 강자였던 점으로 미루어, 뒤에 붙는 ‘학(鶴)’이라는 말은 그들 내부에서도 제법 뛰어난 자들에게만 부여되는 호칭인 듯했다.

사십 대 사내의 옆에 서 있던 홍의 여인이 연소운을 향해 타이르듯 말했다.

“우쭈쭈쭈, 아가야, 그러다 울겠다. 오줌은 안 쌌고?”

연소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창피함 때문이었다.

홍의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교월도 저렇게 기개를 보이고 있는데 사내가 그게 뭐야아. 너도 고추 달고 있는 게 부끄럽지이? 그래, 이따가 이 누님이 너의 그 부끄러운 물건, 아예 떼줄게. 기다리렴.”

마치 누나가 동생을 토닥이는 듯한 어조였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완벽한 조롱이었다.

연소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이번에는 그 옆에 있던 삼십 대 후반의 사내가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십 대 사내에게 말했다.

“하나가 더 늘었기에 약간은 조심스러웠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습니다, 큰형님. 이 정도면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주변에 깔린 우리 측 인원들이 합류하기 전에 얼른 처리합시다. 우리 지금 횡재한 겁니다.”

그러자 여태껏 말이 없었던 삼십 대 초중반의 사내가 말했다.

“둘째 형님의 말씀도 맞습니다만,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저놈이 억지로 약한 척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점에는 저도 이견이 없습니다.”

그 말에 큰형님이라고 불린 사십 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전음으로 둘째에게 지시를 내렸다.

[처음에 반응하던 모양새를 보니 저 겁쟁이의 실력이 그래도 무시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너희들 셋이서 맡아. 교월은 최대한 생포해야 윗선에서도 좋아할 테니 내가 맡고 있겠다. 너희들 셋이서 저놈을 빨리 처리하고 내 쪽을 도와서 교월의 생포를 돕는다. 이대로 전달해.]

[예, 큰형님.]

잠시 후, 전음이 전달되더니 홍의 여인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을 확인한 첫째가 막 움직이려 할 때였다.

“사흑련 전체가 적도들에게 넘어간 건가요?”

그 말에 첫째가 멈칫했다.

문득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설연이었다. 그녀가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누군지 이제야 생각났거든요. 귀산사흉(鬼山四兇), 맞죠?”

“오호! 천하의 교월이 우리 같은 하찮은 사람들을 친히 알아봐 주시다니. 이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첫째의 말에 한설연이 대꾸했다.

“무슨 겸손의 말씀을. 이 강호에서 당신들을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귀산사흉은 사흑련의 유명한 고수들이었다.

네 사람 모두 사파 서열 칠십 위 안의 노련한 절정 고수들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첫째와 셋째는 서열 오십 위 안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첫째의 경우에는 최절정의 경지에 근접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정보도 있었다.

그게 삼 년 전쯤의 정보였다.

그 후로는 그들에 대한 정보가 더 이상 갱신되지 않았다. 네 사람 모두 갑자기 잠적했던 탓이었다.

셋째가 첫째에게 바로 전음을 보냈다.

[큰형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시간을 끌려는 수작입니다. 상대는 교월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도 알고 있으니 너무 염려치 말거라.]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우리 측 인원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이 합류하면 이번 일의 공이 나눠집니다. 자칫 잘못하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셋째의 전음에 첫째가 고개를 끄덕일 때쯤 한설연이 말했다.

“이추와 두진. 그 두 노마귀들이 나타났을 당시에 크게 놀랐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사흑련 소속이긴 하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활동이 없었던 전대의 고수들이니까. 개별적으로도 충분히 포섭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아무리 교월이라도 혼나야겠어. 우리에겐 하늘과 같은 대선배들에게 노마귀라니.”

첫째가 살기 띤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꾸했지만 한설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첫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당대의 사흑련에서 이름을 날리던 당신들까지 저들의 편에 섰다면 얘기가 달라지죠. 사흑련 전체가 저들에게 넘어갔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하는 거니까. 어떤가요? 내 말이 맞나요?”

첫째는 대답 대신 뜻 모를 미소를 지은 채로 한설연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첫째가 씩 웃더니 말했다.

“요즘은 저렇게 똑똑하고 당찬 여자가 좋더라.”

그러자 홍의 여인이 일그러진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저년은 내 손에 죽겠군요.”

“그렇게 둘 수야 없지.”

말을 마치자마자 첫째가 먼저 한설연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계획했던 대로, 나머지 세 명의 신형이 연소운을 향해 짓쳐들었다.

연소운이 두 눈을 부릅떴다.

세 명의 합공은 그야말로 일사불란하여, 전방과 좌우 측면을 가득 수놓고 있었다.

어찌어찌 반응하고는 있었지만 연소운의 동작은 잔뜩 굳어 있었다. 그나마 수많은 실전 경험으로 다져진 움직임들이 무의식적으로 발휘되고 있는 정도였다.

캉! 카캉! 카앙!

처음의 합공을 어찌어찌 막긴 했다. 한데 어떻게 막은 건지는 모르겠다.

슈슈슉―

두 번째 합공이 곧바로 이어졌다.

피하고 싶다. 한데, 피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바로 뒤에 단유소가 누워 있었다.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검로가 꼬였다.

캉캉!

두 사람의 공격은 어찌어찌 막았다.

그러나 시간 차를 두고 찔러온 마지막 검은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피해야 하는데 피할 수는 없고,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어깨를 향해 다가오는 검이 또렷이 보였다.

곧 저 검에 찔릴 것이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발밑에서 뭔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누군가의 등이었다.

마치 수리가 땅에서 먹이를 낚아채어 곧바로 비상하는 것처럼 빠르고 유연한 움직임.

카앙!

그 소리와 함께 어깨를 향해 날아오던 검이 외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연소운이 두 눈을 부릅떴다.

‘조장님……?’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었다.

단유소보다 훨씬 가냘픈 체구였다.

‘하, 한 소저!’

그랬다. 한설연이었다. 놀랍게도.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적들의 표정이 보였다. 그들 또한 놀란 눈치였다.

“어, 어떻게…….”

입에서 절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던 탓이다.

그러자 한설연이 살짝 고개를 뒤로 돌려 전음으로 대꾸했다.

[처음부터 연 공자님을 보호하겠다고 마음먹고 움직였으니까요. 저보다는 연 공자님이 사셔야 하니까요. 단 공자님을 위해서도, 이 강호를 위해서도.]

한설연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포기한 미소도, 우울한 미소도, 애달픈 미소도 아니었다. 따뜻하고 잔잔한 미소였다.

‘저 미소…….’

방금 전 한설연의 미소는 자신이 아는 몇 사람의 미소와 꼭 닮아 있었다. 이 강호에서 자신을 믿어주고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미소였다.

소심한 겁쟁이라며 자신을 늘 한심하게 여기던 가문 사람들도, 심성이 유약하다며 늘 타박하고 꾸짖던 아버지와 형들조차도 자신에게 저런 미소를 보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어머니와, 누이와, 조장 단유소와, 묵룡조의 선배들만이 지어준 미소였다.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하든 어떤 한심한 모습을 보이든, 한결같이 자신을 감싸줬던 바로 그 미소였다.

그녀는 내 모습이 한심해 보이지도 않는 건가?

신룡대원이면서도 겁쟁이인 이 모습이 실망스럽지 않은 건가?

짧은 순간 동안 수많은 상념들이 오갈 때, 한설연이 등만 보인 상태에서 또다시 전음을 보냈다.

[제가 약간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연 공자님은 때를 봐서 단 공자님을 모시고 바로 탈출하세요.]

그녀는 정말로 이 상황이 두렵지 않은 건가?

저 가녀린 몸으로, 저 약한 무공 실력으로,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또다시 그런 생각들이 오가던 찰나, 연소운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저 가냘픈 등과 단유소의 등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연소운은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그 즈음 첫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쁘다고 봐줬더니 까불어?”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낮게 외쳤다.

“다 죽여!”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귀산사흉이 일제히 한설연이라는 한 점을 향해 짓쳐들었다.

차앙―!

연소운이 등 뒤에 차고 있던 다른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동시에 그의 신형이 흔들렸다.

다음 순간, 연소운은 한설연의 앞을 가로막으며 빠른 속도로 쌍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느새 몸의 떨림이 완전히 멈춰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채.

삼면을 수놓는 귀산사흉의 검광을 보니 그야말로 아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최대한 막아야 했다. 버텨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빠르고 맹렬했다.

이건 각오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애초에 그들 개개인과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컸던 탓이다.

한설연이 이를 악물 때였다.

바람이 부는가 싶었고, 그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짓말처럼.

이어서 수십 개의 검이 잔영을 남기며 검막을 펼쳐냈다.

카강! 캉! 캉!

쇠붙이가 강렬하게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단 공자님……?’

단유소일 것이다. 이 상황에서 이런 실력을 발휘하며 갑자기 등장할 사람이라고는 단유소밖에 없었다.

한설연이 그런 추측을 할 때, 잔상을 남기며 움직이던 그 인영의 뒷모습이 우뚝 멈췄다.

한설연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자신이 예상했던 단유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 연 공자님……!’

놀라웠다.

분명히 연소운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로 떨고 있었는데.

동일 인물이 맞는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귀산사흉도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첫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것들이 아주 쌍으로 놀고 있네?”

이어서 홍의 여인이 오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연소운에게 말했다.

“어머, 동생! 고추 떼버린다니까 정신이 바짝 든 거야? 진작 이럴 것이지 아깐 왜 그랬어어. 아아! 이런 모습 보니까 반할 것 같아!”

그러자 첫째가 연소운을 향해 일그러진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저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여야겠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첫째가 연소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어서 나머지 세 명이 각각 다른 방향을 점하며 두 사람을 향해 쇄도했다.

이윽고 여섯 명이 어지럽게 얽혔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연소운의 쌍검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은.

부지런히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와중에도 한설연은 놀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절로 흘러나오는 탄성을 속으로 삼키기가 힘들 정도였다.

연소운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연 공자님의 실력……!’

경이로웠다.

단유소의 경이로움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단유소의 무공은 일단, 차원이 다르다.

그 와중에도 단유소의 무공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의외성이다. 일정한 형식이 없다. 그러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강력한 데다가 순간적인 폭발력도 엄청나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연소운의 검술은 정석적인 정파의 검술이다. 방어적인 검술이다.

그의 검술은 매우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을 준다. 그 부드러움 때문에 얼핏 보면 느릿느릿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매우 빠르고 날렵하다.

그래서 틈이 있는 것 같다가도 막상 공격하려면 틈이 없다. 그 틈을 노리고 들어온 귀산사흉의 수많은 공격들이 번번이 막히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건지 눈으로 보면서도 의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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