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불안한 조력자 (5)
그 주선연의 당사자가 자신이었음을 연소운이 알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색한 미소가 흘러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전에 단유소와 얘기할 때에도 인정한 바였지만, 주선연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심했던 건 맞다.
호응을 기다리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연소운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윽고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못된 년이네요.”
“헉!”
연소운이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자신의 입에서 그렇게 과격한 표현이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리라.
한설연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연 공자님의 말씀이 옳아요. 물론 상대로서의 단 공자님이 마음에 안 들었을 수는 있죠. 누구나 이성에 대한 취향이라는 게 있고, 이상형이라는 것도 따로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그렇게 무례하게 거절하면 안 되죠. 평소의 성격을 보면 단 공자님이 먼저 무례하게 했을 리도 없고.”
“그렇죠? 맞죠?”
“그럼요! 게다가 그 여자, 못된 걸 넘어서서 한심하기까지 하네요. 얼마나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단 공자님 같은 사람을 거절한담? 자기가 평생 저렇게 능력 있고 좋은 남자, 어디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거, 말씀 한번 시원하게 하시네요.”
연소운이 속이 다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꾸했다.
겉으로는 배시시 웃어 보이고 있었지만 한설연은 씁쓸했다.
‘뭐, 잘한 거야, 한설연…….’
실컷 자기 자신을 욕한 꼴이 되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게다가 자신이 그 주선연의 상대였다는 걸 밝힐 수 없는 이상, 썩 나쁘지 않은 대응이기도 했다. 혹여 나중에라도 주션연의 당사자가 자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니, 그때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대비해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침 여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단 공자님의 이상형은 따로 있나요?”
“아시다시피 사내들은 이왕이면 예쁜 여인들을 좋아합니다. 그건 조장님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한설연이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연소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따로 이상형이 있으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함께 있으면 편하고,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애매하죠? 하하.”
“예. 그런 경우가 가장 애매하죠.”
“어쨌든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하게 살아가시는 게 꿈이라, 주선연도 강호의 여인들과는 결코 하지 않으십니다. 강호의 여인들과 엮여서 자신의 강호가 더 넓어지는 게 싫답니다. 가뜩이나 조장님 본인이 지금 살고 있는 강호도 너무 넓어서 피곤하다며…….”
격하게 동의한다. 단유소의 강호가 피곤할 정도로 넓다는 점에 대해.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아마도 강호의 여인들과 엮이기 싫어한다는 그 말 때문일 것이다.
왜일까. 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진 걸까.
‘설마…….’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한설연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것이다. 그럴 리 없다.
“어디 불편하세요?”
옆에서 연소운이 그렇게 물어왔다.
“아니에요. 잠시 딴생각이 좀 들어서.”
한설연이 웃으며 얼버무리자 연소운이 말했다.
“시간도 약간 지났으니 조장님의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아! 예, 그래요.”
이윽고 단유소의 체온과 맥을 확인한 연소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질렸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체온이 또다시 급상승했습니다. 맥도 요동치고 있습니다. 큰 기운이 또 모여 있군요. 새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체 얼마나 좋은 약을 먹이신 겁니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연소운의 표정에는 약간의 여유가 엿보였다. 이미 대처해본 경험이 있는 탓이었다.
한설연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곧 단유소를 어루만지는 연소운과 한설연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이차적으로 단유소를 돌보고 나자 이미 정오가 지나 있었다.
한설연과 연소운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조금만 실수해도 단유소가 잘못될 수 있으니 계속해서 신경을 집중해야 했고, 그렇기에 더 진이 빠졌다.
한설연은 너무 힘들어서 당장은 배도 고프지 않았다. 반면에 연소운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곧바로 육포를 뜯기 시작했다.
당장 저게 들어가나 싶어서 한설연이 말했다.
“많이 힘드셨죠? 시장하기도 했을 거고.”
그러자 연소운이 육포를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배가 고파서 먹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시간이 있을 때 배를 채워놓는 것뿐입니다.”
“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소의 철저함이야 이미 겪어봐서 잘 알고 있지만, 연소운의 철저함도 단유소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만난 이후로 그가 보여준 모습들도 한결같이 믿음직했다.
그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저렇게 되었을 것이다. 역시 신룡대는 신룡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설연도 육포를 꺼내어 뜯었다.
“그런데 연 공자님은 쌍검술을 익히셨나 봐요? 익히기가 어렵다고 하던데.”
연소운은 등에 두 개의 검집을 교차해서 메고 있었다. 그는 봇짐을 내려놓았어도 여태껏 쌍검은 풀어놓지 않았다. 각각 두 자가 약간 넘어 보이는 쌍검이었다.
“아, 예. 가전검술이 쌍검술이어서 이러고 다니기는 하는데, 저는 거의 한 자루만 씁니다.”
“음? 왜요?”
“아무리 수련해도 쌍검술은 늘지가 않아서요. 그래서 아버지와 형들에게 늘 꾸중을 듣고 삽니다. 이십 년 가까이 가전검술을 익혔는데 어떻게 그렇게 못할 수가 있느냐면서요. 하하…….”
연소운은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그늘진 웃음이었다. 마음고생이 많았음이 절로 느껴졌다.
한설연이 분위기를 전환하듯 먼 하늘 위를 바라보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검 한 자루 쓰는 것도 제대로 못 해요. 연 공자님이 정말 대단하신 거죠.”
연소운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에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연소운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신룡대원이니까.
어색함을 지우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연 공자님이 계서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저 혼자였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하거든요. 연 공자님의 조치 덕분에 단 공자님도 조만간 의식을 차릴 것 같고요.”
연소운에게서 여전히 대꾸가 없자 한설연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직후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연소운이 육포를 입에 문 채로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소운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린 한설연도 두 눈을 부릅떴다.
“헙……!”
누군가가 있었다.
약 이십 보 밖에 있는 높은 나뭇가지 위였다. 그곳에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앉아 있었고 한 명은 그 옆에 서 있었다.
그들이 다가 아니라는 게 더 문제였다. 그 양옆에 있는 나뭇가지 위에도 각각 한 명씩이 더 있었다.
그들은 사내 셋에 여인 한 명이었다.
사내들은 각각 사십 대 초반, 삼십 대 후반, 삼십 대 초중반쯤으로 보였고 여인은 서른 전후로 보였다. 사내들은 모두 황색 무복을, 여인은 붉은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속에서 그들의 목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설연이 확인 차 물었다.
[혹여……, 연 공자님이 아는 분들인가요?]
제발 그렇다고 대답해주길 원했지만 연소운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한설연이 보니 연소운의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연소운 같은 고수가 떨고 있을 정도면 상대의 실력에 대해서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들 또한 상당한 경지의 고수들이라는 뜻이다.
‘신룡대원도 저런 고수들 앞에서는 떠는구나…….’
이해는 가지만 낯설기도 했다.
단유소는 어려운 상황에서 긴장은 해도 절대로 몸을 떠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짧은 순간에도 어떻게든 최선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다. 또한, 결정을 내리면 자신에게도 전음을 보내어 미리 지시를 내리곤 했다.
한데 연소운은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떨림이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그의 눈빛과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다른 궁리를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이윽고 중앙의 나무에 앉아 있던 사십 대 사내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러자 나머지 두 사내와 여인도 바닥에 착지했다.
착지하는 모습만으로도 알 것 같았다. 네 사람 모두가 고수임을.
한설연은 막막했다.
하필이면 단유소가 저렇게 된 상태에서 적이 등장하다니.
연소운의 몸이 더 크게 떨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설연이 보니 연소운의 얼굴에 작은 땀방울들이 맺혀 있었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대단하게만 느껴졌던 그의 모습과는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한설연은 연소운이 걱정스러웠다.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연 공자님뿐인데…….’
그런데 희한한 건, 의외로 자신은 떨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두렵긴 하다. 긴장도 된다.
그러나 그로 인해 몸이 굳을 정도는 아니었다. 연소운이 저런 상태고 단유소가 쓰러져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간 상상을 초월하는 강자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면역이 된 건지도 몰랐다.
황의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한설연이 눈을 감았다.
‘나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두렵지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도 죽을 뿐이다.
단유소로 인해 살게 된 목숨이니 그를 위해 죽는 건 아깝지 않다. 어차피 이전에도 그를 위해 목숨을 던지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다만 안타깝고 미안한 건, 자신이 목숨을 걸어도 단유소를 지켜주기 힘든, 이 현실일 뿐이다.
스르릉―
다가오는 황의 사내를 똑바로 직시하며 한설연이 검을 뽑아 들었다.
꿀꺽.
연소운의 목울대를 타고 침이 넘어갔다.
적들이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들은 기척을 감춘 상태로 접근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들이 의도적으로 기척을 드러냈다. 그 순간에 그들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게 방금 전의 일이었다.
대충 가늠하기로, 적들의 무공 경지는 최소한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나 보였다.
막연했다.
무슨 짓을 해도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이렇듯 막연한 상황에 처했던 적이 가끔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이겨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늘 묵룡조의 선배들이 있었고 조장인 단유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선배들도 없고 단유소는 의식불명에 빠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눈앞이 깜깜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냉정을 되찾고 싶은데, 떨리는 무릎을 진정시키고 싶은데, 그게 전혀 되지 않았다.
적들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상태가 더 심해졌다.
또다시 자신의 그 한심한 병이 도진 것이다.
그때였다.
스르릉―
바로 옆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였다.
연소운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설연이었다.
그녀가 검을 뽑아 든 채로 당당하게 서서 황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까, 저 여인은.
뭐가 저렇게 당당하단 말인가.
적들의 수준을 모르는 걸까?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녀의 무공 수준을 대강 짐작하고 있다.
자신 또한 처음에 이곳에 올 때, 기척을 죽인 상태로 은밀히 접근했었다. 그런 자신을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거야 그럴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녀가 한설연임을 확신한 순간, 더 이상 기척을 숨기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설연의 무공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녀라 해도 적들의 수준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저렇게 당당할 수가 있는 거지? 대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