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불안한 조력자 (4)
한설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청비와 설화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건, 단유소와 가까운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의 성격상, 아무에게나 청비와 설화의 이름을 가르쳐주진 않았을 테니까.
한설연의 경계심이 점점 수그러질 때, 청년이 황색의 매를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고로 저 녀석의 이름은 금랑(金浪)입니다. 제 연락용 매고요.”
금랑. 금빛의 파도라는 뜻이다.
청년이 단유소의 동료라는 건 이제 거의 확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설연은 마지막 확인을 했다.
“공자께서는 이분의 성함도 알고 있나요?”
그러자 청년이 되물었다.
“소저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어요.”
“그분의 성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러자 잠시 청년의 눈동자를 직시하던 한설연이 대꾸했다.
“단씨예요. 이제 공자께서 이름을 말씀해보세요.”
“그윽한 휘파람 소리.”
청년은 이름뿐만 아니라 그 뜻까지 알고 있었다. 이 정도면 더 이상의 의심은 의미가 없다.
스릉― 척!
검을 검집에 넣은 한설연이 물었다.
“공자께서는…… 누구시죠?”
“아까도 말씀드렸듯, 무림맹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입니다. 연소운이라 합니다.”
“아, 연 공자셨군요.”
아까 확인했다시피 연소운이라는 이 청년은 상당한 고수다. 그 실력에 단유소의 동료라면 결국 그도 신룡대원일 것이다.
단유소는 신룡대 최고의 고수라 불리는 묵룡이니, 아마도 그는 단유소의 부하일 가능성이 크다. 단유소를 일컬어 ‘저분’이라는 호칭을 쓴 걸 보면 거의 확실하다.
그 즈음 연소운은 단유소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주무시는 건 절대 아닐 테니……, 의식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그의 어조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아는 것이다. 만약 단유소가 단순히 수면 중이었다면 이런 상황이 되었는데도 깨어나지 않을 일이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크게…… 다치신 겁니까?”
“네에…….”
“어떻게 된 거지요?”
한설연이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위험한 무공에 대한 얘기는 일부러 뺐다. 연소운도 단유소의 그 무공에 대해 알고 있다면 그가 알아서 판단할 테니까.
“……그래서 이상해요. 내장을 다친 것도 아니고 출혈에 대한 부분도 적절한 조치를 취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이 약해지고 체온은 계속 내려갔었거든요. 지금은 그나마 약간 나아졌지만 여전히 의식은…….”
한설연이 설명을 끝낼 때쯤 연소운은 단유소의 맥과 체온을 확인하고 있었다.
“으음?”
연소운의 양미간이 좁아지자 한설연이 서둘러 물었다.
“왜 그러세요? 다시 안 좋아졌나요?”
“아니……, 그 반대입니다. 맥은 지나칠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뛰고 있고, 체온도 너무 높으신 것 같아서요.”
“네에에?”
깜짝 놀란 한설연이 서둘러 단유소의 상태를 확인했다. 과연 연소운의 말대로였다. 어느새 몸에 식은땀까지 송골송골 맺혀 있을 정도였다.
“이, 이게 갑자기 어찌 된……!”
“일단 체온을 내리는 게 급선무일 듯합니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한설연이 서둘러 단유소가 덮고 있던 옷가지들을 걷어내었다. 연소운은 그의 봇짐에서 천을 꺼내고 있었다.
“이걸로 하십시오.”
옷가지를 자른 게 아닌, 그냥 고운 천이었다. 한설연이 그것을 받아 들고 물에 적셔 단유소의 몸을 닦았다.
그 모습을 보며 연소운이 물었다.
“보아하니 상태가 갑자기 이리 되신 듯한데, 그 전에 특별히 다른 조치를 취하신 거라도 있는지요?”
“실은……, 체온과 맥이 도저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영약을 먹였어요. 효능이 매우 좋은…….”
“얼마나 효능이 좋기에……?”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기도 힘든 물건이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 정도의 영약이라면 이해가 가는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좀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연소운이 단유소의 곁에 앉더니 몸 이곳저곳에 손가락을 대며 뭔가를 확인했다. 보아하니 그가 만지는 곳이 모두 혈이었다.
혈을 만질 때마다 연소운의 놀람이 점점 커져 갔다.
“이런 엄청난 기운이라니……!”
이어서 몇 군데를 더 확인한 연소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갑자기 거대한 기운이 형성되었는데, 그 기운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날뛰고 있는 겁니다.”
“아……!”
한설연은 연소운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통로가 좁아서 병목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그 뒤에 있는 기운들이 갈 길을 찾지 못하니 이 상황이 된 거고.’
만약 단유소 본인이 운기조식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절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현월대보환으로 인해 생성된 기운의 양이 거대하다니 생각보다 어려웠을 수는 있겠지만, 단유소는 초절정 고수다. 최대한의 속도로 운기행공을 하면, 어떻게든 스스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단유소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본인이 스스로 기운을 이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무인이기에 기본적인 기운의 통로는 형성되어 있고, 그 통로를 통해 평상시에도 기운이 오가기는 한다.
하지만 평상시에 통하는 기운의 양은 미미하다. 내공을 운용하거나 운기행공을 취할 때에야 기운이 활발하게 오가는 것이다.
“그, 그럼 어찌 해야 하나요?”
한설연이 서둘러 묻자 연소운이 진지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저로서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라 특별한 해결책이 있지는 않습니다. 일단 혈도들을 지속적으로 자극하여 그 역량을 최대한 활성화시킬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진기를 이끌지 않으면…….”
“알겠어요. 저도 도울 테니 뭐든 말씀만 하세요.”
고개를 끄덕인 연소운이 집중하여 단유소의 혈도들을 하나씩 차례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한설연이 돕는 가운데, 그 과정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단유소에게서 물러난 연소운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우우우…….”
날이 찬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한 시진 넘게 고도의 집중력을 유지한 채로 쉴 틈도 없이 단유소를 돌본 탓이었다.
한설연도 지친 상태였다. 그녀의 얼굴에도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표정이 환했다.
“일단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죠? 고생 많으셨어요, 연 공자님.”
한설연이 물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를 연소운에게 건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연소운이 그것을 받아 들며 대꾸했다.
“어디 저만 고생했겠습니까. 한 소저께서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어쨌거나 정말 다행입니다.”
주거니 받거니 물을 마신 후, 두 사람은 편안한 자세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한설연이었다.
“연 공자님도……, 신룡대죠?”
그러자 연소운이 먼 하늘에 시선을 둔 채, 동요하지 않고 대꾸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조직에 들어갈 만한 깜냥이 되지 않습니다.”
그 말에 한설연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알고 있어요. 단 공자님이 신룡대의 묵룡이라는 사실을.”
연소운의 고개가 천천히 한설연 쪽으로 돌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차분한 기색이었던 그의 눈동자에 놀람이 담겨 있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어요. 다만, 제가 단 공자님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연 공자님께도 말씀드려야 앞으로도 서로 편할 것 같아서요. 보아하니 우리는 한동안 함께하게 될 듯해서…….”
연소운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단 공자님이 알려주신 게 아니니까.”
그러자 연소운이 단호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럴 분이 아니시지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인 한설연이 바로 말을 이었다.
“사실, 단 공자님이 신룡대의 무인일 거라고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간 많은 위기를 겪었는데, 그때마다 단 공자님이 보여준 신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거든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확신하게 된 거죠.”
연소운은 묵묵히 한설연을 바라볼 뿐 수긍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 공자님이 신룡대 최고의 고수라 불리는 그 묵룡임을 알게 된 건 어제였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그 백의 사내가 말해서 알게 된 거예요.”
한설연의 말에 연소운이 포기했다는 듯 웃으며 코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니. 총명하기로 유명한 한설연 소저를 앞에 두고 제가 지금 와서 잡아떼 봐야 의미도 없을 것이고.”
“죄송해요.”
“이게 사과하고 말고 할 일은 아니니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어쨌거나 정황상, 한 소저께서 알아챘다는 사실을 우리 조장님도 알고 계시겠군요?”
“네에.”
“알겠습니다. 솔직히 밝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한설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제가 답변해드릴 수 있는 선에서는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단 공자님은 평소 어떤 분이신가요?”
“음…….”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었죠? 그러니까, 성향이나 취미 같은 거요. 또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시는지, 일상은 어떤지, 뭐 그런 거요. 소소한 것이라도.”
“으음…….”
연소운은 말해도 되는지 아닌지에 대해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한설연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대원 개개인에 대한 사소한 정보들이라도 유출되었을 경우에는 악용될 소지가 있기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나중에라도 곤란해질 수 있을 테니까. 이해해요. 신룡대가 그런 조직이라는 것도 알고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론 한 소저께서는 절대 악용할 분이 아니시라는 걸 알지만…….”
그러자 한설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채로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상태를 잠시 유지하던 한설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걸 받기만 했어요. 단 공자님한테서.”
연소운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단 공자님은 수도 없이 제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세요. 뿐만 아니라 이 강호의 현실과,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식에 대해 많은 걸 깨닫게 해준 스승이기도 해요. 무너져 내리는 제 정신을 붙잡아 주고, 포기하지 않게 용기를 주고, 힘들 때 위로가 되어준 벗이기도 했죠. 그 어떤 말로도 그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이 없을 거예요. 그 정도로 고마운 분이세요, 단 공자님은.”
연소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최소한의 사례라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맹주님께 공식적으로 고마움을 표하면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례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럴 수 있는 기회나 방법도 없을 거라면서요.”
“그 또한 조장님 말씀대롭니다.”
“당연하겠죠. 이번 임무가 끝나면 단 공자님이나 연 공자님은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사라져 있을 테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연소운이 희미하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사라질 단 공자님을 다시 찾기 위해서 물어보고 있는 게 아니에요. 어차피 그 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테니, 함께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라도 단 공자님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주고 싶어서 물어본 거예요.”
“아.”
“뭘 좋아하시는지를 알아야 그런 것들을 더 해드릴 수 있을 테고, 뭘 싫어하시는지를 알아야 그런 것들을 피할 수 있을 테니까. 사라진다고 해서 저에 대한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닐 테니, 단 공자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서요.”
연소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조장님은 일단, 제가 아는 고수 중에 가장 마음이 따뜻한 분이십니다. 사람을 최대한 믿어주려는 편이라서 상처를 많이 받으며 사시지요. 그만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강하십니다. 비싼 술보다는 값싼 술을 좋아하시고, 음식은 딱히 가리는 게 없으십니다. 또…….”
그 후로 연소운이 단유소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쭉 늘어놓았다. 들어보니 남이 안다 해도 큰 상관이 없는 사항들이었다.
“……또한 근 몇 년간은 한 번도 여인을 사귄 적이 없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티는 잘 안 내시지만 많이 외로워하시는 눈치라 묵룡조 선배들의 고심이 큽니다. 선배들은 다들 장가를 갔거나 사귀는 여인들이 있거든요.”
“아.”
“그래서 최근에는 선배 중 한 명이 지인을 통해 주선연 자리를 마련해드렸지요. 일이 좀 꼬여서 다른 소저가 대신 나왔는데, 그 소저가 조장님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에요.”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연소운이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용기 내어 고백을 했는데 심하게 차이셨다나 봐요. 상처가 컸다고 들었어요. 솔직히 제가 보기에도 그 소저가 너무 심하긴 했어요. 거절을 해도 꼭 그딴 식으로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줄 필요가 있는 건지……. 세상에, 조장님의 단점들을 하나하나 꼬집으며 한심하다고 면박을 줬다는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연소운이 고개를 돌려 한설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리 남자가 마음에 안 들었기로서니 꼭 그랬어야 했던 걸까요?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처음부터 얘기했으면 됐을 일을……. 한 소저께서는 같은 여인의 입장에서 그런 여자, 어떻게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