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불안한 조력자 (3)
단유소에게 현월대보단을 먹인 한설연은 어느새 그의 옆에 누워 있었다. 단유소가 상처를 입은 옆구리의 반대쪽이었다.
옆에 누운 상태에서 한설연은 자신의 몸으로 단유소를 최대한 감싸고 있었다. 상체를 밀착시켜 단유소의 한쪽 측면을 덮었고, 한 팔과 다리를 그에게 휘감았다.
그의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현월대보단이 대단한 영약이라 해도 지금처럼 체온이 낮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효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 약 기운이 효율적으로 퍼지게 하려면 체온을 높여야 했다.
사실, 꼭 현월대보단 때문이 아니더라도 단유소의 체온을 어떻게든 올리긴 올려야 할 상황이기도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체온은 조금씩 올라가는 느낌이었지만, 여전히 맥은 약했다.
옆에 누워서 단유소를 바라보는 한설연의 표정에 염려가 가득했다.
“단 공자님, 힘내요. 꼭 기운 차려야 해요.”
일반인이 복용하면 몸이 건강해지고 노화가 늦춰져서 장수할 수 있고, 병든 이가 먹으면 원기가 회복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으며, 무인이 복용하여 그 약효를 제대로 흡수하면 삼십 년 공력쯤은 거뜬히 증대된다는 영약이 바로 현월대보환이다.
근 수 년간 지병과 노환이 겹쳐 건강이 좋지 않았던 사부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며 여전히 곡의 대소사를 관장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현월대보환 때문이었다.
그런 현월대보환이라도 아깝지 않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비단 단유소가 자신의 목숨을 수도 없이 구해준 은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이 강호에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고, 나아가서는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히 앞으로 다가올 환란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나저나 단 공자님이 말한 위험한 무공이라는 건 대체 뭘까.’
차도를 지켜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기에 생각이 절로 그쪽으로 흘렀다.
백의 사내와 단유소는 같은 종류의 기운을 썼다고 했다. 그래서 서로 놀랐다고 했다.
전투의 마지막 순간에 두 사람의 모습은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빤히 눈을 뜨고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고, 승부가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단유소는 이따금씩 상식을 초월하는 위력을 보이곤 했었다. 가깝게는 이추와 두진을 상대할 때도 그랬다.
‘아마도 그런 때에 사용되는 무공, 내지는 기운을 말하는 것 같긴 한데…….’
그 기운을 무리해서 계속 쓰다 보면 결국 몸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고 했다. 단유소가 지금 이런 상태에 있는 게 그 때문이라는 짐작은 자신도 이미 하고 있는 바였다.
‘마공이라…….’
백의 사내는 그런 표현을 썼다.
물론 단유소는 마성에 빠져들지 않으니 마공이 아니라고 대꾸했지만.
이윽고, 여태까지 떠올랐던 생각들이 한설연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정리되어가기 시작했다.
‘첫째, 마공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무공이다. 둘째, 그 기운을 쓰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셋째, 무리해서 쓰면 몸이 위태로워지는 위험한 무공이다.’
잠시 고민하던 한설연이 한순간 눈을 번쩍 떴다.
‘설마……!’
그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는 종류의 무공을 떠올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진원진기를 사용하는……!’
예전에 사파나 마교 쪽에서 강호를 뒤집으려 할 때 많이 쓰던 방식이었다. 잔인한 방식이었다. 순간적으로 폭발시킨 진원진기를 소진하고 나면 생기를 잃고 죽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원진기를 폭발시키는 순간만큼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낼 수 있으니, 정파의 고수들도 그 수법에 많이 당했다고 했다.
그렇기에 그러한 방식은 이전까지 마공으로 취급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준이 바뀌었다. 해당 무공 자체가 본질적으로 인간을 마성에 빠지게 하는가, 아닌가로.
만약 자신의 짐작대로 단유소가 진원진기를 이용하는 무공을 익혔다면, 마공이 아니라고 했던 그의 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여러 정황이 딱 맞아떨어지는 걸로 봐서는 자신의 짐작이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아직 확실하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하지만 만약 내 짐작이 사실이라면…….’
단유소를 바라보는 한설연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그 생각을 하니 너무도 마음이 아프고 쓰렸다.
즉, 지금껏 자신을 지키는 과정에서도 단유소는 그 위험한 무공을 계속해서 써왔다는 뜻이 아닌가.
또한 앞으로도 그가 그 위험한 무공을 계속해서 써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꼭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더라도,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 위험한 자들로부터 이 강호를 지키게 될 테니까.
‘아아아…….’
아픈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한설연이 흠칫 몸을 떨며 눈을 떴다.
퍼뜩 정신을 차리면서 보니 여전히 단유소를 끌어안은 채였다. 다행이었다.
아직도 사위가 어두웠다. 한설연이 반사적으로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보아하니 새벽이 되기 직전이었다.
대체 언제 잠들었던 걸까.
밤새도록 단유소를 간병하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가면서까지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그래도 일단 체온은 많이 오른 것 같아.’
붙어 있으니 체온은 굳이 재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이어서 단유소의 맥을 확인한 한설연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
아직도 정상적인 박동은 아니었으나 어제보다는 훨씬 나아진 상태였다. 이렇듯 나아지고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래도 얼른 의식을 되찾으셔야 할 텐데…….”
몸이 닿기만 해도, 작은 목소리만 들려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사람이 바로 단유소였다. 이렇게까지 붙어 있고, 심지어는 맥을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짚었는데도 반응이 없다는 건, 그가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그 생각을 하던 한설연이 갑자기 흠칫하더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기 때문이다. 방심하다가 나중에 또 놀림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던 한설연이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픈 사람을 의심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놀림감이 되어도 좋으니, 제발 의식만 차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설연이 몸을 일으켰다.
밤새 같은 자세로 있었더니 몸이 뻐근했다.
팔다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간단하게 몸을 푼 한설연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단유소의 목을 살짝 들어 그의 입안에도 가죽 주머니 안의 물을 천천히 흘려 넣었다.
“자, 이젠 상처 좀 볼까요?”
덮어주었던 옷가지들을 걷고 상체를 일으키면서 보니, 그의 온몸이 흉터투성이였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미처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큰 흉터는 물론이거니와 자잘한 흉터들도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다.
한설연이 낮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움이 가득 묻어 있는 한숨이었다.
당연하게도, 단유소가 여태껏 보여왔던 그 대단함이 그냥 이뤄졌을 리는 없었다. 이 강호에서 쉽게 얻어지는 건 없으니, 그에 상응하는 노력과 아픔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야 쭉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가 겪은 아픔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한설연이 조심스럽게 그의 상처들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입에서 조용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랬군요……. 단 공자님의 강호는……, 제 강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가혹했던 거였군요.”
단유소의 상처를 돌보고 나자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단유소에게 뭔가를 먹이긴 먹여야 하는데 미음을 끓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일단은 작은 대나무 통에 건량을 불려놓았다.
“미안해요, 단 공자님. 지금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어요.”
그 후, 한설연이 단유소의 머리맡에 앉아서 육포를 씹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이―
아직은 어둑한 허공 위에서 그런 소리가 들리더니 시커먼 무언가가 그녀 쪽으로 빠르게 하강했다.
서둘러 고개를 든 한설연의 표정에 반가움이 담겼다.
“청비?”
아직은 확실치 않았지만 정확히 단유소 쪽으로 내려오고 있으니 청비일 가능성이 높았다.
늠름한 덩치에 쪽빛 깃털이 인상적인 녀석이 점점 가까워졌다. 역시 청비였다.
앞으로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데다가 외롭고 심심하던 차였다. 그 상태에서 청비를 보니 매우 반가웠다.
그런데 떨어져 내리고 있는 건 청비만이 아니었다. 허공 저 멀리서 다른 한 마리의 매가 청비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 설화도 돌아온 거야?”
일전에 단유소는 설화를 어딘가로 날렸었다. 공동파에 있을 당시의 일이었다. 녀석이 돌아온 건가 싶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뒤따르는 녀석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한데 깃털이 흰색이 아니었다.
설화가 아니라는 뜻.
보아하니 녀석의 깃털은 황색이었다.
청비가 가까워지자 한설연이 혹시나 싶어 한 팔을 수평으로 뻗었다. 그러자 녀석이 날개를 펄럭거리며 자신의 팔에 앉는 게 아닌가.
“와아!”
청비에 대한 애정이 듬뿍 생기는 한편으로 신기했다. 실제로 만난 건 두어 번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자신을 알아보다니.
하긴, 근래에 자신이 단유소와 계속 붙어 다니는 것을 녀석도 허공에서 봤을 것이다. 그 때문일 것이다.
이어서 하강한 황색의 매는 단유소의 근처에 착지했다. 아마도 단유소를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한설연의 시선이 녀석에게 머물렀다.
일전에 무림맹의 전서를 가지고 단유소를 찾아왔던 녀석은 아니었다.
그러나 청비와 함께 온 데다가 단유소를 알고 있는 만큼, 녀석도 무림맹에서 왔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녀석의 다리에 전서통이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무림맹의 매가 전서통을 안 달고 왔다면 대체 왜 왔단 말인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던 한설연의 눈동자가 한순간 급격하게 커졌다.
그녀가 한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옆에 두었던 검을 집어 들었다.
덤불 숲 사이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보란 듯이, 아예 모습을 드러내놓고 서 있었다. 겨우 십 보 거리였다.
한설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가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서 저러고 있는 동안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그가 대체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상대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라는 뜻.
터질 듯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한설연이 상대를 살폈다.
그는 이십 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단유소 쪽을 바라보던 청년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다가왔다.
한설연이 빠르게 일어서며 검을 뽑았다.
차앙!
동시에 각오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멈추지 않는다면 내 모든 역량을 다해서, 반드시 당신을 죽일 겁니다.”
그러자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저분……, 어떻게 되신 겁니까?”
한설연의 눈매가 좁아졌다.
단유소더러 저분이라고?
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적이 아니니 그 검,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저는……, 저분의 동료입니다. 도우러 왔습니다. 참고로 소저께서 현월곡의 한설연 소저시라는 것도 압니다.”
적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쉽게 믿을 수는 없었다. 그냥 믿기에는, 짧은 시간 동안 겪은 이 강호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겉으로는 저렇게 보이다가 갑자기 돌변하여 검을 휘두를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도 그다지 특별할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적들도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니까.
한설연이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자 청년이 다시 말했다.
“여전히 믿지 않으시는 눈치군요. 어떻게 해야 납득을 시켜드릴 수 있을까. 음……. 아, 참!”
청년이 단유소의 주변을 돌아다니는 청비를 가리키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의 이름은 청비지요. 청비는 저분을 따라다니는 연락용 매고요. 청비와 함께 다니는 또 한 마리의 매를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그 녀석은 비록 덩치는 작지만 더없이 날렵하고 용맹하지요. 해동에서 난다는 보라응으로, 이름은 설화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