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불안한 조력자 (2)
번쩍하는 사이에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다.
백의 사내는 자연스럽게 검을 늘어뜨린 채로 서 있었다.
꼿꼿이 서 있는 그에 반해 단유소는 반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검을 쥐고 있지 않은 손으로 한쪽 옆구리를 감싼 채였다.
한설연이 보니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단 공자님! 단 공자님! 괜찮아요?]
단유소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즉, 지금은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다.
단유소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백의 사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옆구리를 손으로 감싼 채였다.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 그 유명한 묵룡이라면 더더욱.”
백의 사내는 뭔가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놀랐어. 설마 당신도 나와 같은 기운을 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거든.”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어.”
대꾸하는 단유소는 힘겨워하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백의 사내가 고개만 살짝 돌려 말했다.
“세상이 참 재미있어졌네. 정파인이 마공을 익힐 수도 있고.”
그 말에 한설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마공이라니?
순간적으로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쓴다고 해서 마성에 빠져들지는 않으니…… 마공은 아니지. 위험한 무공인 건…… 맞지만.”
“후. 그런가.”
짧게 대꾸한 백의 사내가 검을 쥔 손으로 뒷짐을 지었다. 그는 그 상태로 한동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설연은 무서웠다.
크게 다친 단유소와는 달리 백의 사내는 멀쩡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이후의 상황은 안 봐도 빤했다.
스르릉―
한설연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어차피 그녀가 돕는다고 해서 도움이 될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방해만 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을 뽑아 든 건 최악의 상황이 되면 바로 손을 쓰려는 의도였다. 그녀 스스로에게.
검을 뽑아 든 한설연은 단유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볼을 타고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이 바보 같은 사람.’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자신을 버리고 혼자 탈출하라고 했던 건데, 기어이 고집을 피우더니 이게 뭐란 말인가.
‘가여운 사람……. 겨우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이렇게 되어서는 아니 될 사람인데…….’
한동안 조용히 있던 백의 사내가 여전히 먼 하늘에 시선을 둔 채로 말했다.
“당신은 앞으로도 줄기차게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거야. 그 힘겨운 상황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그 기운을 계속 쓰게 되겠지. 그 기운을 방금 전처럼 무리해서 쓰다 보면 결국 당신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급속도로 무너져 내릴 거고.”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강하다는 거 인정해……. 내 패배도 깨끗이 시인하지…….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전체적인 그림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
그 순간 한설연이 두 눈을 부릅뜨며 놀란 음성을 토해냈다.
“헛!”
흔들림 없이 서 있던 백의 사내가 채 말도 마치지 못하고 갑자기 풀썩 쓰러져 버린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그의 앞섶이 온통 피로 흥건했다. 안력을 돋워서 보니 그는 복부를 크게 베인 상태였다.
쓰러져 있는 백의 사내에서는 더 이상 산 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
“이럴 수가……!”
전투가 끝난 직후부터 지금까지, 백의 사내가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억지로 버티고 서 있었음을 한설연이 알 리 없었다.
“크윽…….”
그 와중에 갑자기 신음이 들린 곳은 단유소 쪽이었다. 한설연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단유소는 또다시 반 무릎을 꿇은 채 손가락으로 옆구리 근처의 혈도들을 짚고 있었다. 급한 대로 환부 근처의 혈을 눌러 그쪽으로 흐르는 피의 흐름을 늦추려는 것이다.
“단 공자님……!”
한설연이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단유소는 인상을 찡그린 채였는데, 안색이 창백했다.
“단 공자님, 단 공자님! 괜찮아요? 괜찮은 거예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렇게 묻자 단유소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호들갑 떨지 마……. 일단 응급처치를…….”
그렇게 말하는 단유소의 입가를 타고 한 줄기의 피가 흘렀다.
놀란 와중에도 한설연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참아요. 흐으어어엉…….”
울면서 그렇게 말한 한설연이 자신의 봇짐을 푸르더니 그곳에서 옷가지를 꺼냈다. 그러자마자 옷을 찢었다.
부욱― 부우우우욱―
일정한 넓이로 옷을 찢은 한설연이 서둘러 그것을 단유소의 복부에 감기 시작했다.
“으으으…….”
“아, 아파요?”
“괜찮으니까……, 일단은 꽉……. 이동 중에 절대로…… 핏자국을 남겨선 안 돼…….”
“아, 알았어요.”
그러는 와중에 단유소가 또다시 힘겹게 말했다.
“한 소저…….”
“예! 예, 단 공자님! 뭐든 말씀하세요.”
“나, 왜 이렇게…… 피곤하냐…….”
그가 풀린 눈으로 웃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고 있었다.
그의 눈꺼풀이 서서히 닫혀갔다.
“안 돼요, 단 공자님! 정신 차려요! 단 공자님!”
“일단은 피신……. 부탁…….”
한설연이 환부를 감싼 천의 매듭을 지었을 때쯤, 결국 단유소의 고개가 힘없이 쳐졌다.
“단 공자님! 으어어엉! 단 공자니임……!”
한설연이 울먹이며 단유소의 어깨를 흔들어봤지만 그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한설연이 벌벌 떨며 단유소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맥은 뛰고 있었다. 강하지는 않지만 약하지도 않은 정도였다.
여전히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도 한설연이 봇짐들의 끈을 빠르게 풀었다. 그러더니 단유소를 업었다.
한설연이 봇짐을 들더니 업혀 있는 단유소의 몸과 자신의 몸을 함께 감싸는 형태로 끈을 묶었다.
달리는 와중에도 업혀 있는 그의 몸이 자신의 등과 이격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봇짐 하나는 단유소의 등을 감싸게 했고, 나머지 하나는 단유소의 엉덩이를 받치게 했다.
그 작업이 끝나자 한설연이 한 손을 등 뒤로 돌려 단유소의 엉덩이를 받쳤다. 그 상태에서 다른 손으로 검을 집어 들었다.
한설연이 검을 쥔 손의 소매로 눈매를 훔쳤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의지가 가득한 눈동자로 어둠 속을 가늠할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한설연은 경공술을 멈추지 않았다. 어두운 산 속을 열심히 달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은신할 장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설연이 달리기를 멈췄다.
“허억, 허억, 허억…….”
한설연이 숨을 몰아쉬며 바로 옆에 있는 가파른 경사면의 위쪽을 훑었다. 자잘한 나무와 덤불들로 가득한 경사면이었다.
“후우우, 후우우…….”
호흡을 고른 한설연이 이윽고 경사면을 향해 높게 도약했다.
탓! 탓! 타앗!
한설연의 발이 바위들만 골라서 밟으며 울창한 삼림 속으로 이리저리 나아갔다.
계속 도약하는 와중에도 빠르게 주변을 살피던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 빛났다. 높이 도약한 순간, 자신이 찾던 지형을 발견한 것이다.
한설연이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적당한 크기의 바위가 서 있는 곳이었다. 바위의 중간쯤부터 아래까지가 움푹 패어 이슬과 비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바위의 앞에 잔나무들과 덤불들이 빼곡하게 자라 있어, 자연스럽게 위장이 되는 효과도 있었다. 모든 입지 조건을 고려했을 때 단유소가 딱 좋아할 법한 곳이었다.
한설연이 한쪽에 조심스럽게 단유소를 내려 눕혔다.
이윽고 그녀가 약한 검기를 일으키더니 바위 아래쪽의 흙을 평평하게 다졌다.
신속하게 작업을 마친 한설연이 주변에서 마른 낙엽을 긁어모아, 그것들을 흙 위에 깔았다.
은신처를 찾고 자리를 마련하는 일련의 모든 과정이 평소 단유소가 하던 방식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한설연이 자신의 봇짐과 단유소의 봇짐을 풀었다.
단유소의 봇짐에서 피풍의를 꺼낸 한설연이 그것을 탈탈 털어서 낙엽 위에 깔았다. 피풍의는 물에 젖지 않는 재질이었기에 털기만 한 것이다.
이어서 한설연이 자신의 봇짐에서 옷가지 두어 개를 골랐다. 그것들도 꽉 짠 후에 탈탈 털어서 피풍의 위에 깔았다.
그런 후에야 한설연이 한쪽에 눕혀져 있던 단유소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가 그 상태에서 단유소의 상의를 벗겼다.
이윽고 한설연이 단유소를 안아 들더니 미리 마련해둔 자리에 반듯하게 눕혔다. 그 후, 빠르게 그의 맥을 짚고 체온을 살폈다.
맥도 아까보다 약해졌고 체온도 훨씬 떨어져 있었다.
“어, 어떡해……!”
이대로 그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이내 한설연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 있었다.
‘침착하자, 한설연. 침착해야 해.’
마음을 진정시킨 한설연이 자신이 입고 있던 두 겹의 옷을 모두 벗었다. 그러자 상의는 가슴가리개만 남게 되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설연이 입고 있던 옷들의 물기를 짰다. 그러더니 두 겹의 옷을 모두 단유소의 상체에 덮었다. 아직까지는 체온이 남아 있으니 일단은 그렇게 한 것이다.
그 직후, 한설연이 단유소의 봇짐에서 그의 옷을 꺼내었다. 그것을 짜서 자신의 몸에 대충 걸치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봇짐에서 옷가지를 꺼내어 그것을 검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옷가지들을 일정한 넓이로 길게 자른 한설연이 다시금 단유소의 곁에 앉았다.
이윽고 그녀가 단유소의 상처를 감싸고 있던 이전의 옷가지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환부를 압박하고 있던 천이 풀리자 그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출혈량은 많지 않았다.
아까 단유소 본인이 혈도를 짚어 피의 흐름을 늦춰놓았던 탓이다.
완전히 피가 통하지 않게 할 수 있었음에도 단유소가 그러지 않은 이유를 한설연은 잘 알고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는 상태로 장시간 방치할 경우, 그쪽의 살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신처를 찾기까지 시간이 어느 정도는 걸릴 것임을 예상한 조치였던 셈이다.
이제는 은신처를 찾았으니 제대로 된 조치가 필요했다.
한설연이 집중하며 상처 근처의 혈도 몇 곳을 강하게 눌렀다. 상처 쪽으로 피가 아예 통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출혈이 점점 멎어가자 한설연이 젖은 옷가지를 이용해 환부의 피를 닦아냈다. 매우 조심스럽지만 신속한 손놀림이었다.
그 후, 한설연이 옆에 두었던 목갑을 열었다.
봇짐에서 미리 꺼내두었던 것으로, 비상용 약들이 들어 있는 목갑이었다.
한설연이 금창약을 꺼내어 그것을 단유소의 환부에 발랐다. 그 후, 미리 준비해두었던 옷가지로 상처 부위를 꽉 감싸며 매듭을 지었다. 그러더니 또다시 집중하여 막혀 있던 단유소의 혈도를 짚었다.
툭툭! 툭툭툭!
그 후, 자신이 걸치고 있던 옷을 단유소의 상체에 덮어주고, 그가 덮고 있던 옷을 다시 자신이 걸친 후에야 한설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우우우…….”
이제는 경과를 지켜봐야 할 때였다.
한설연이 남은 옷가지들까지 물기를 짜더니 그것들을 품에 안고 단유소의 머리맡에 앉았다. 수시로 맥과 체온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한 식경 정도가 흘렀다.
한설연의 표정은 심각했다.
‘체온도 조금씩 떨어지고 있고 맥도 계속 약해지고 있어……!’
단유소가 입은 상처가 큰 상처이긴 하나 내장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 정도의 조치를 취했으면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긴 해야 했다. 호전되지는 않아도 최소한 나빠지지는 않아야 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독에 당한 징후는 아니야. 독에 당하지 않았는데도 상태가 이렇게까지 안 좋다는 건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한설연이 눈을 번쩍 떴다. 아까 백의 사내가 죽기 전에 단유소에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 힘겨운 상황들을 벗어나기 위해서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그 기운을 계속 쓰게 되겠지. 그 기운을 방금 전처럼 무리해서 쓰다 보면 결국 당신의 몸이 버티지 못하고 급속도로 무너져 내릴 거고.’
백의 사내가 말한 그 기운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른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중요한 건, 아까 단유소가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을 무릅쓰고 과도하게 힘을 썼다는 점이고, 그로 인해 지금의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한설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이대로라면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는 뜻……!’
거기까지 생각하던 한설연이 목걸이처럼 걸고 있던 둥근 구체를 앞섶 안에서 꺼내어 손에 쥐었다. 엄지 한 마디 크기의 작은 구체였다.
한설연이 지체 없이 양손으로 구체를 비틀었다. 그러자 구체의 중간 부분에 틈이 생겨 반으로 갈라지며 그 안에 있던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금색의 알약이었다.
현월대보환(玄月大寶丸).
현월곡에서도 극비리에 관리되는 약으로 십 년에 하나씩밖에 제조되지 않는 귀한 영약이었다. 근래 현월곡에는 총 세 개의 대보환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였다.
자신이 곡을 나설 때 사매인 송채령이 만약의 상황에서 복용하라며 챙겨준 것이다. 사형인 진소학도 하나를 지니고 나갔으니 이제 곡에 남은 건 하나뿐일 것이다.
외부에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부의 말에 따르면 소림의 대환단에 뒤질 바 없는 효능이라 했다. 고로, 가치를 섣불리 따지기도 힘들 만큼 귀한 영약이 바로 현월대보환인 것이다.
한설연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보환을 입안에 넣었다.
입안에서 잠시 대보환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단유소의 머리를 한 팔로 살짝 들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