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수로행 (2)
그 말에 한설연이 눈을 흘기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곧 한설연이 침상 쪽으로 다가가더니 여분의 이부자리를 챙겨 바닥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좁은 방이라서 침상은 하나뿐이었기에 누군가는 바닥에서 자야 했다.
한설연이 펼쳐진 이부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그러고 보니 술 마신 게 어젯밤의 일이었구나.’
겨우 어젯밤의 일이었는데도 며칠 전에 있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당신이 바닥에서 자게?”
의외라는 듯 단유소가 그렇게 물어왔다.
“네.”
“오호! 강호 생활 좀 했다고 이제야 개념이 좀 잡혔네? 선배 모실 줄도 알고.”
“선배라기보다, 단 공자님은 제 목숨 지켜주는 귀한 몸이시잖아요. 제가 알아서 받들어 모셔야지요.”
“음. 좋아! 그런 자세, 아주 좋아!”
단유소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몇 차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실 나, 바닥에서도 잘 자요.”
“아니, 내가 볼 때 당신은 그냥 어디에서나 잘 자.”
저 인간은 말을 해도 꼭……!
한설연이 또다시 입술을 삐쭉거렸다.
씩 웃어 보인 단유소가 이윽고 호롱불을 껐다.
방 안이 깜깜해진 후, 단유소가 향한 곳은 바로 한설연이 누워 있는 쪽이었다. 그곳으로 다가간 그가 한설연의 곁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한설연이 놀라며 물었다.
“뭐, 뭐, 뭐 하는 거예요?”
“뭘 그렇게 놀라? 아까 배 위에서도 찰싹 붙어서 잘만 자던데. 내 목덜미까지 끌어안고.”
“아,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자 나란히 누운 상태에서 단유소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누군가가 내 몸을 건드렸는데 그럼 모를 것 같나?”
알고도 또 여태껏 모른 척하고 있었던 거야?
요즘 들어 이 인간이 점점 능구렁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니까. 아니, 어쩌면 원래 능구렁이였던 건지도…….
그나저나 약간은 창피했다.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근데,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응.”
“제, 제, 제, 제정신인 건 맞죠?”
한설연이 화들짝 놀라며 그렇게 물었다. 이불을 끌어당겨 방어 자세까지 취하며.
그러자 단유소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왜,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할까 봐? 가만히 보면 당신은 생각이 늘 그런 쪽으로밖에 안 흐르는 모양이야? 욕구불만이야? 아! 하긴 참, 당신 색녀였지.”
“새새새새, 색녀라니! 그런 천박한 말을 또……!”
그러자 단유소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당신에게 침상을 양보하고 있는 거잖아, 지금. 그러니까 선심 쓸 때 얼른 가서 편하게 자.”
한설연은 민망했다.
처음부터 이 정도는 예상했어야 했던 건데, 단유소의 돌발 행동 자체에만 신경을 썼다.
한설연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요.”
단유소이 대답 대신 한 손을 휘저어 보였다.
됐으니까 빨리 가서 잠이나 자라는 뜻.
침상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한설연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
‘요즘 저 사람 앞에서는 뭘 해도 번번이 말리는 느낌이란 말이야.’
침상에 누워서 이불을 끌어올리는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편안해져 있었다.
‘그래도…….’
때론 불친절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늘 놀리기만 하는 것 같지만, 뒤돌아 생각하면 단유소가 자연스럽게 많은 걸 배려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생각을 하던 한설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자요.”
단유소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이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눈을 감는 한설연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 * *
배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한 후로 이틀이 흘렀다.
그간 아무런 문제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번 배에는 위지척 같은 철없는 후기지수도 없었고,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도 없었다. 아예 문제를 일으킬 만한 승객 자체가 없었다.
덕분에 배 위의 분위기는 평온하기만 했다. 너무 평온해서 지루함이 느껴질 정도로.
참고로 두 사람이 현재 타고 있는 배는 밤중에도 운항하는 배였다. 선장과 선원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강줄기를 훤히 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낮에 비하면 속도가 매우 느린 게 당연했다. 그러나 밤중에도 움직이는 만큼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게 단유소와 한설연이 이 배를 택한 이유였다.
해질 무렵이 되자 배가 나루터에 정박했다. 경유지인 단파현이었다.
“단파현입니다! 이 배는 이곳에서 술시초(戌時初, 오후 7시)까지, 약 반 시진(한 시간) 동안 머무를 겁니다! 이곳이 목적지인 분들은 안녕히 가시고, 계속 가실 승객들께서는 늦지 않게 승선하십시오! 술시초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이 배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출발할 겁니다!”
선원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치자 승객들이 너나할 것 없이 우르르 배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한설연이 말했다.
“배에서만 이틀을 보냈으니 답답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죠. 우리도 가서 맛있는 거라도 먹고 와요.”
단유소도 지루하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도 서둘러 배에서 내렸다.
단유소와 한설연이 되돌아온 건 배가 떠나기 직전이었다. 식사를 마친 후 잠시 저자에 들러 육포를 비롯한 마른 식량 등을 보충하다 보니 시간이 빠듯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타자마자 술시초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배가 바로 출발했다. 애초에 선원이 예고했던 대로였다.
배를 둘러보니 새로운 얼굴들이 보였다. 단파현에서 승선한 승객들이었다.
단유소가 갑판의 난간을 붙잡고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남들이 볼 때는 시원한 강바람이라도 느끼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배 안의 기척을 살피는 중이었다. 새로 승선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초절정 고수가 마음먹고 기척을 감추면 아무리 단유소라 해도 알아차릴 수 없다. 일전에 만났던 이추와 두진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남몰래 기척을 살피는 건 일종의 버릇이었다. 혹시 모를 위험 요소를 알아차리고 미리 대비하기 위함이다.
일단은 딱히 거슬리는 기척이 없어 보였다.
하던 일을 멈추고 막 눈을 뜨려던 단유소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아무것도 없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누군가의 기척이 감각을 자극했던 것이다.
감각의 영역에 겨우 걸릴 만큼, 그야말로 미세한 기척이었다.
그 기척은 곧바로 사라졌다.
단유소가 계속해서 집중하자 미세한 기척이 다시 드러났다. 그랬다가 그 직후에 또 사라졌다.
단유소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변해갔다.
아직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상대는 지금 일부러 그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시험하듯이. 아니, 놀리듯이.
상대가 그만한 강자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러니 심각해질 수밖에.
곧, 상대가 다시 기척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대놓고 기척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단유소의 눈동자가 심각함을 담아갔다.
곧 그의 고개가 천천히 돌았다.
배의 반대편 난간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백의를 입은 사내였다.
방금 전에 배에 올랐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자신이 기척을 파악하는 도중에 나타난 것이다.
사내가 웃고 있었다.
[한 소저, 내 뒤로 물러서.]
갑자기 단유소의 전음이 들려오자 한설연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전음으로 느껴지는 단유소의 어조가 심각했기 때문이었고, 실제로 단유소의 표정도 심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모든 게 평온하기만 한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설연은 이미 단유소의 등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가 괜히 이럴 리 없다는 걸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아니까.
한설연의 시선이 단유소의 시선을 좇았다.
‘단 공자님이 이러는 게 저 사람 때문인가……?’
상대는 준수한 외모의 백의 사내였다. 그가 단유소와 자신 쪽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나긋나긋한 미소였다.
한설연이 여전히 의아함을 품고 있을 즈음, 백의 사내의 입술이 열렸다.
“이제야 만나게 되네. 보고 싶었어. 교월, 한설연.”
매우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한설연은 충격으로 인해 두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처음 보는 자의 입에서 설마 자신의 정체가 언급될 줄이야.
그러자 백의 사내가 이번에는 단유소를 보며 말했다. 여전히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당신, 정말 대단하더군. 사실 우리는 홍학 정도만 투입되면 완전히 정리가 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오히려 홍학이 당할 줄이야. 나아가서 이추와 두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예 경악이었지.”
단유소는 그가 말하는 홍학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여태껏 만났던 초강자는 총 세 명이었다. 이추와 두진 그리고 그 전에 상대했던 홍의 청년이다.
아마도 백의 사내가 말하는 홍학이란 그 홍의 청년일 것이다.
“무림맹주 백리우가 직접 나선 게 아니면 결코 틀어질 리 없는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외에는 어떤 변수도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 설마 그 외의 누군가가 우리의 계획을 이렇게까지 틀어놓을 줄은 몰랐어. 그것도 단 한 명이.”
백의 사내와 단유소 사이의 공간에는 열 명이 넘는 승객들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더 많은 승객들이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모든 사람들이 백의 사내의 말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사실, 교월 한설연이나 무림맹주 백리우라는 이름들은 단번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이름들이었다. 강호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아는 이름이고, 큰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이름들이니까.
그럼에도 주변의 승객들은 흡사 백의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백의 사내가 내공을 이용하여 본인의 목소리를 단유소와 한설연의 근처에만 들리게끔 만든 것이다. 백의 사내의 경지가 그 정도로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예상하고 있겠지만 나는 틀어진 그 모든 것을 바로잡으러 온 거야. 이 질긴 악연을 끊으려고.”
단유소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백의 사내를 조용히 응시하기만 했다. 백의 사내가 다시 말했다.
“일각이 되기 전에 이 배는 곡류를 타게 될 거야. 그러면서 한쪽으로 바위 절벽이 한동안 이어지지. 이 배는 그 절벽과 근접하며 나아갈 거야.”
백의 사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절벽이 이어지다가 중간쯤에 완만한 곳이 나와. 당신이 교월을 안고 뛰면 어렵지 않게 그곳에 안착할 수 있을 거야. 괜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하고 싶지 않다면,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당신들은 정파인이니 되도록 그런 상황을 피해야 할 거고, 난 일반인들이 끼면 귀찮고 시끄러워서 싫은 거고.”
단유소와 한설연을 번갈아 바라보던 백의 사내가 마지막 말을 했다.
“만약 절벽 쪽으로 뛰지 않으면 내 뜻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는 걸로 생각하겠어. 어차피 배 위라도 나는 상관없거든. 참고로 잔머리는 굴리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지금쯤이면 당신도 느꼈겠지만, 현재 이 배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
난간에 등을 기대고 단유소 쪽을 바라보는 백의 사내의 미소는 여유롭기만 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표정으로 여전히 백의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단유소의 속내는 심각했다.
백의 사내의 말대로였다. 그의 말이 이어지는 도중에도 감각을 거슬리게 하는 몇 개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기척을 잡아내지 못했으니 그들 또한 초고수들이라는 뜻이다.
백의 사내 한 명만 해도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닌데 초강자들 몇 명이 더 있다니.
저들은 오늘 모든 걸 확실하게 끝낼 심산인 것이다.
암담했다.
단유소가 몸을 돌려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한설연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인 거……, 맞죠?]
단유소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 미소의 의미를 한설연은 알 것 같았다. 함께 붙어서 지낸 세월이 짧지 않은 만큼, 그의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그의 심경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저 미소는 곧, 무언의 긍정이었다.
[저 사람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하고 있는 자들도 엄청나게 강하다는 거겠죠. 그토록 대단한 단 공자님이 이렇게까지 경직되어 있다는 건…….]
단유소는 그 어떤 상황에 처해도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추와 두진이라는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만났을 때에도 긴장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긴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직되기까지 한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무슨 수를 쓰든, 우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거겠죠. 그게 현실인 거겠죠.]
여전히 희미한 미소만 지은 채로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자신을 배려해주려는 그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억지로 안심시키려는 티가 많이 났다.
지금 단유소가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건 결국,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의미였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한동안 단유소를 바라보던 한설연의 눈동자가 어느 순간부턴가 또렷해졌다.
[단 공자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나……, 살고 싶어요. 무조건,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어요.]
단유소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설연이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다시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나……, 단 공자님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살고 싶지는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