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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46화 (46/200)

46화. 수로행 (1)

위지척과 무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이 언제, 어디에서 이런 취급을 받아봤겠는가. 특히나 위지척의 충격은 더했다.

한설연도 살짝 놀란 상태였다.

백도에서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니는 위지세가를 상대로 단유소가 저렇게 거침없는 언사를 내뱉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위지세가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겠지.’

하긴, 어마어마한 무공 실력에 수많은 실전 경험까지 겸비한 그에게 위지세가 정도가 무슨 큰 대수겠는가. 그 유명한 무림맹의 신룡대라는 배경이 오히려 덤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바로 단유소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공자님은 위지세가의 둘째 공자님이시오! 그 무슨 무례한 언사요!”

위지척의 곁에 있던 무인이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단유소가 미묘한 미소를 보이며 그에게 대꾸했다.

“이 강호에서 칼밥 먹고 살기란 참 힘든 일이지요?”

“무, 무슨 소리시오?”

“그 둘째 공자 때문에 당신도 방금 전에 염라대왕 앞에 갈 뻔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충직한 수하의 모습을 보여야 하니 말이오. 뭐, 이해는 합니다. 먹고살려면 뭔들 못하겠소. 자존심도 버릴 수 있지.”

무인의 표정이 확 굳었다. 단유소가 그 무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최소한의 개념과 분별력만큼은 절대 버리지 마시오. 특히, 지금처럼 내가 당신들의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 말을 마친 단유소가 네 사람에게서 돌아섰을 때였다.

“수적의 무리들을 응징하려 했던 게 무슨 큰 잘못이라고 이러십니까!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생겨 이런 결과가 나왔기로서니, 그게 이렇게까지 질타받을 일입니까?”

위지척의 목소리였다.

등을 보인 상태에서 단유소가 고개만 돌려 위지척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수적들은 돈을 빼앗으려 했을 뿐이지만, 당신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을 뻔했어. 명분이 옳다고 해서 모든 게 정당화될 수 있는 건 아니야. 당신이 이 강호를 어떻게 살아가든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이 강호에서는 늘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단유소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당신만큼은 더 이상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군.”

“당신이 대체 뭔데 감히 내게 이래라저래라……!”

그러자 위지척의 곁에서 나직한 외침이 들렸다.

“이(二) 공자님! 그만하십시오! 저분 공자님을 노엽게 해서 득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위지척을 말리고 나선 사람은 호위무사들의 선임이었다. 수적들과의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전음으로 위지척을 말리던 바로 그자였다.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였지만 위지척이 결국 입을 닫았다.

그 즈음 단유소와 눈이 마주친 호위무사들의 선임이 미세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의 전음이 빠르게 단유소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공자께서는 우리가 쳐다볼 수도 없는 경지에 있는 고수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 부디 강자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주십사 합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단유소가 이윽고 돌아섰다.

단유소가 배의 난간에 등을 기대고 앉자 한설연이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스읍! 안 떨어져?]

[춥잖아요.]

[하나도 안 추워.]

그러자 한설연이 짐짓 약한 척하며 대꾸했다.

[내가 추워서 그래요.]

사실, 계절에 비해 따뜻한 날씨였지만 고지대이다 보니 춥긴 추웠다. 가뜩이나 물줄기를 타고 있으니 강바람 때문에 더 춥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일반인들에 한한 얘기였다.

[풋! 거짓말도 상대를 좀 가려서 하지 그래? 절정고 수가 이 정도 날씨에 춥다고? 끽해야 서늘한 정도겠지.]

[승객들이 우리 쪽을 계속 힐끔거리고 있어요. 아직까지는 우리 둘, 연인으로 보여야 하잖아요.]

단유소가 슬쩍 눈동자를 돌려보니 과연 한설연의 말대로였다. 하긴 방금 전에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시선이 집중되지 않는다는 게 더 이상할 일이기도 했다.

한설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가가, 고생 많으셨어요.”

“무서웠지, 연매?”

“가가가 있는데 뭐가 무서웠겠어요. 어쨌거나 정말 큰일을 하셨어요.”

“큰일은 무슨. 이런 일이 아예 벌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다행히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해결됐잖아요. 가가가 없었으면 정말 어쩔 뻔했어요. 아무튼 격렬하게 움직였으니 이제 좀 쉬세요.”

단유소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말이 없었다. 평온한 표정으로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겉보기에는 분명히 그랬다.

[아까 수적들이 먹은 건 약일 가능성이 커요. 어떤 방식으로든 순간적으로 인간의 능력을 증폭시키는 종류의 약일 거예요. 전투의 마지막 순간에 수적들이 급격하게 약해진 걸로 봐서는 효과를 유지하는 시간에 제한이 있는 듯해요. 한마디로 잔인한 약인 거죠.]

역시 교월은 교월이라는 걸까.

드러난 몇 가지의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거의 정확한 추론을 해내고 있었다.

[약을 복용하기 전에 수적의 우두머리는 일이 꼬였다는 표현을 썼어요. 비단 그것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정황을 따져봤을 때, 거대한 어떤 힘이 수적들에게 관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돼요. 개인일 가능성은 매우 적어요. 조직일 거예요.]

[당신 말이 맞아. 마약(痲藥)이자, 마약(魔藥)이야.]

앞에 쓰인 마약은 흔히 통용되는 마약을 뜻했고, 뒤에 쓴 마약은 마귀의 약이라는 뜻이었다.

[사람의 감각을 마비시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진원진기를 폭발시켜서 짧은 순간이나마 강한 힘을 쓸 수 있게 하는 약이지. 인간을 잔인한 광기로 몰아넣는 성분도 포함되었을 거고. 어쨌거나 그 수적들은 이제 살아도 산 몸이 아닐 거야.]

[지, 진원진기를 폭발시키다니!]

너무 놀라웠다. 그런 한편으로 아까 수적들이 보인 힘의 정체가 이해되기도 했다. 진원진기를 이용했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알아챈 단유소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도 여러모로 추측을 해봤지만 진원지기에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누가 그토록 악랄한 짓을 벌인 걸까요? 우리가 겪어온 그들일까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지.]

[같은 세력이든 다른 세력이든, 문제가 심각하다는 건 확실하군요.]

단유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즈음, 때마침 순풍을 탄 배가 물 위를 쭉쭉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저녁 무렵이 되자 선장이 단유소에게 다가왔다.

“공자, 배가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흉흉한 일이 있었지만 공자 덕분에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단유소가 빙그레 웃어 보이자 선장이 다시 말했다.

“이 앞쪽은 수심이 얕아 더 이상 배를 띄울 수가 없습니다. 두 분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성도로 가시려면 행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러면 작은 현이 하나 나오니, 오늘 밤은 그곳에서 묵었다가 출발하시면 될 겁니다.”

“아.”

“만약에 사천의 남부로 이동하실 거면 행로를 따라 남서쪽으로 향하시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물줄기가 합류하는 작은 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배를 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선장님.”

단유소가 대꾸하자 선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공자의 조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생업이 목숨보다 중요할 수는 없지요. 아까의 그 흉흉한 일, 다시 겪을까 두렵습니다.”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장이 말을 이었다.

“막상 이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날이 막막하긴 하지만, 뭘 한들 설마 처자식도 못 먹여 살리겠습니까? 마침 저와 함께 가겠다는 선원들도 있으니 최소한 외롭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그려. 허허허.”

“잘 생각하셨습니다.”

“곧 배를 대야 하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께서도 건승하시길 빕니다. 아, 참!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선장이 푸근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뱃일하면서 저는 수많은 사람들을 접했습니다. 그중에는 청춘남녀 한 쌍도 많았지요. 두 분은 여태껏 제가 봐온 모든 한 쌍들 중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하. 하하…….”

단유소가 뒷머리를 긁으며 어정쩡한 반응을 보이자 한설연이 웃으며 선장에게 말했다.

“호홋. 선장님께서는 저희들 듣기 좋으라고 억지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허허. 맹세코, 그저 듣기 좋으시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소저께서는 제가 어찌해야 믿으실는지요?”

“우와! 그럼 진심이란 말씀이세요?”

“물론입죠, 소저. 제 나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습지요. 두 분은 천생연분이십니다요.”

그러자 한설연이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로 자연스럽게 단유소와 팔짱을 꼈다. 그러더니 말했다.

“가가, 우리 천생연분이래요.”

“하. 하핫. 그래도 어른을 앞에 두고 너무 이러는 건 좋지 않아, 연매.”

이에 선장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보기 좋습니다, 공자. 공자께서는 무공을 펼치실 때는 과감하시더니, 의외로 이런 쪽으로는 많이 부끄러워하시는군요. 어쨌거나 두 분, 행복하십시오.”

선장이 인사하자 한설연도 배시시 웃으며 인사했다.

“예. 선장님도 행복하세요.”

단유소는 말없이 목례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선장이 저만치 멀어지자 단유소가 곧바로 한설연에게 전음을 보냈다.

[다음부터 연인 행세는 자제하지.]

그러자 한설연이 장난조로 대꾸했다.

[나름 재밌는데, 왜요? 마침 천생연분 소리도 들었으니 이게 제일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천생연분 같은 소리 한다.]

[그럼 무슨 관계로 보이는 게 좋을까요?]

[차라리 오누이가 낫겠군.]

[그러기엔 우리의 지금 얼굴, 너무 안 닮았다구요.]

[몰라. 어쨌든 연인 말고 다른 걸로, 당신이 생각해.]

단유소가 타협은 없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한설연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그 표정?]

[아, 아니에요.]

한동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던 단유소가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한설연은 여전히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함께하게 된 이후 처음으로, 왠지 그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강변에 닿자 승객들이 모두 단유소에게 다가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떠나갔다.

두 사람이 배에서 내릴 때에는 선원들이 저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위지척은 몇 걸음 떨어져서 잠시 단유소를 째려보다가 동쪽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유, 저걸 그냥 한 대 콱 쥐어박을 수도 없고.”

한설연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할 때, 호위무사들 중 선임만이 단유소에게 조용히 목례하더니 서둘러 위지척의 뒤를 따라갔다.

단유소와 한설연은 정박지 근처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며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그런 후에야 두 사람은 동쪽으로 난 산길을 천천히 걸었다.

원래 두 사람의 행선지는 사천의 남부였다. 그쪽으로 가려면 당연히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다가 배를 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동쪽으로 향한 까닭은 혹시 모를 적의 추적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한동안 천천히 길을 걷다 보니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했다. 곧 두 사람의 신형이 산속으로 사라졌다.

단유소와 한설연이 선장이 말한 마을에 도착한 건 저녁때가 지난 시점이었다.

두 사람은 일단 허름한 객잔을 찾아 간단하게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면서 대충 들어보니, 첫 배편은 내일 새벽인 듯했다.

결국 두 사람은 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큰 방이 모두 찼다고 하여 작은 방 하나를 잡았다.

세안을 마치고 나온 한설연에게 단유소가 말했다.

“오늘은 어제처럼 술 마시자고 안 조르네? 웬일이래, 술꾼께서?”

“어머나? 지금 누굴 술꾼 취급하시는 거예요?”

“아니었나? 어제 보니 제법 술꾼 같던데.”

“하……! 어젠 그저,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너무 힘들고 해서 마시자고 한 것뿐이거든요?”

그러자 단유소가 씩 웃으며 되물었다.

“술 먹고 또 주사 부릴까 봐 미리 조심하는 건 아니고?”

“그, 그게 어떻게 주사예요!”

한설연이 발끈하자 단유소가 여전히 씩 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듣기론 술 먹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도 주사라고 하던데. 뭐,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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