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상황 돌변 (2)
선장의 말마따나 승객들은 일단 안전했다.
그 와중에 선상에서의 전투는 단유소와 한설연을 제외하면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장을 주시하던 한설연이 전음으로 말했다.
[이 정도면……, 수적들 쪽이 우세하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나지막한 그녀의 어조에 다분히 놀람이 섞여 있었다.
수적들에게 뭔가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음에도 막상 이런 결과가 나오니 놀랍긴 놀라웠던 것이다.
지금의 수적들은 결코 그들의 수준에서는 낼 수 없는 힘과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빠르고 강력했다.
지금의 모습으로만 따지자면 수적들은 대부분이 일류 고수급이었다. 그 중에서도 더러는 보통 이상의 실력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수적들은 결코 스스로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검에 몸을 찔린 상태에서도 괴기스럽게 웃으며 기어이 위지세가의 무인들에게 병장기를 휘두르는가 하면, 다리를 베여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도 무인들의 하체를 공격하기도 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수적들은 어떻게 해서든 위지세가의 무인들을 공격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들은 모두가 광기에 차 있었다.
위지세가의 절정 고수 다섯 명이 한데 모여 있었으면 상황이 조금은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나뉜 상태. 결국 위지척의 자충수가 된 꼴이었다.
전장을 주시하던 한설연이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단유소는 눈을 감은 채로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그녀가 전음으로 물었다.
[단 공자님, 어디 불편해요?]
단유소가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젓자 한설연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갑자기 표정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서…….]
단유소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만 지었다.
그가 인상을 찡그린 이유는 수적들이 어떻게 저런 힘을 보이는 건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수적들이 복용한 것은 아마도 모종의 약일 것이다.
예상 가능한 그 약의 효과는 대강 세 가지 정도.
일단 하나는 광기와 살기를 극도로 끌어올려 인간의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게 하는 효과일 것이다.
또 하나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효과일 것이다. 괜히 저들이 도검에 의해 큰 상처를 입은 채로도 웃고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단유소가 인상을 찡그린 이유는 마지막 효과 때문이었다.
‘체내의 모든 진원진기를 한순간에 폭발시키다니…….’
혼원태극공 자체가 진원진기와의 공명을 이용하는 무학이었다. 그렇기에 단유소는 진원진기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민감했다.
인간이 저런 식으로 진원진기를 소모한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저들은 설령 이 전투에서 살아남는다 해도 그들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꼴이 될 것이다.
그야말로 악마의 약이라 할 수 있었다.
수적들이 스스로 저런 약을 만들어서 먹고 있을 리는 없다. 저런 효과를 보이는 약이라면 약과 독에 도통한 누군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물건이다.
즉, 누군가가 수적들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대량으로 유포되었다면 개인이 아닌, 조직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악마의 손길에 넘어간 수적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 손길을 내민 자였다. 그 방식 자체가 너무도 악랄하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결코 수적들에 대한 연민은 없다. 어쩌면 그들은 여태껏 지은 죄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저 약이 더 널리 통용될 경우가 문제였다.
그 경우, 이 강호는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저 약만 먹으면 한두 경지 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악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강호를 넘어서 대륙 전체에 퍼질 가능성도 크다. 어차피 진원지기를 폭발시켜 한순간에 큰 힘을 얻는 식이니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이라 해도 얼마든지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대체 어느 조직일까.
속단할 수는 없지만 이번 임무로 인해 얽힌 바로 그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악랄함을 생각할 때 충분히 이러고도 남을 테니까.
이제 수적들은 완전히 승기를 잡아가는 모양새였다. 전투가 시작된 후로 겨우 일각 남짓이 흐른 시점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도중에 수적들이 증원됐기 때문이었다. 증원된 수적들은 강변에서 출발한 두 척의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이었다.
이미 수적의 우두머리 쪽 배에서 싸우던 위지세가의 무인들은 많이 죽었다. 중과부적이었다. 약을 복용한 수적들이 목숨을 도외시한 채로 달려들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쪽에 있던 절정고수 중에서 한 명은 가까스로 위지척 쪽으로 합류했다. 나머지 두 명은 혈로를 뚫다가 결국 최후를 맞이했다.
여객선의 선실 쪽 상황이라 해서 좋을 리 없었다.
원래 위지척의 호위역으로 남아 있던 무인은 총 다섯 명, 그중에서 절정 고수는 두 명이었다.
처음에는 큰 무리 없이 수적들을 막아내던 그들도 중반이 지나면서부터는 밀리기 시작했다. 다른 배 쪽을 정리한 수적들이 합류한 탓이었다.
선실 쪽을 지키고 있는 무인들의 실력이 워낙 뛰어난 탓에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그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마저도 일류 고수들은 이미 쓰러진 상태로, 남은 건 절정 고수 세 명뿐이었다.
위지척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크게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그의 모습이 멀리에서도 확인될 정도였다.
그런 위지척의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한설연이 전음을 보냈다.
[처음엔 나도 저렇게 비춰졌었겠죠? 단 공자님의 눈에는?]
단유소는 한설연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조언을 듣지 않고 철없이 굴다가 모두를 위험에 빠뜨렸던 과거의 그녀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동병상련이라도 느끼는 건가?]
단유소가 되묻자 한설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남을 통해서 보니 더 크게 와 닿네요. 나도 저렇게 한심했겠구나 싶어서. 결과에 대해서 책임도 못 지고 있는 위지척의 모습을 보니 더 그렇고요.]
약간의 자책이 담겨 있는 어조였다.
[그래서, 그에게도 기회를 주고 싶은 거야?]
[솔직히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워요. 수적들의 존재나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어요. 그렇다고 하여 융통성 없이 오만과 독선에 빠져,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생업을 위태롭게 한 위지척의 무책임함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죠. 결정적으로 저 자체가 누구를 구하고 말고 할 능력도, 자격도 안 되는 사람이고…….]
잠시 침묵하던 한설연이 물었다.
[만약에 단 공자님이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세상사에 정답이 하나로 정해져 일은 거의 없어. 상황에 따라서 해답이 있을 뿐인데, 그조차도 바뀌게 마련이지. 어떤 때는 분명히 맞는 것도, 어떤 때는 틀릴 수가 있거든.]
한설연은 단유소의 말이 정확히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단유소가 바로 말을 이었다.
[상황이 바뀌었어. 수적들은 지금 이지를 상실해가는 상태야. 곧 그들은 위지척 일행뿐만 아니라 선원들과 승객들을 공격하기 시작할 거야.]
[그, 그렇다면…….]
[어차피 우리도 수적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야. 단, 움직인다 해도 그들이 승객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후에야 움직일 거야. 그래야 선장도 납득할 거거든. 만약 하늘이 위지척을 돕고자 한다면 그때까지 살아 있게 하겠지.]
단유소의 말대로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위지척 쪽이 채 정리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수적들이 승객들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선장이 승객들 앞을 막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나리들! 왜 이러시는 게요! 나요! 나 이 선장이오!”
하지만 수적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짐승들이나 낼 법한 소리를 계속해서 흘릴 뿐이었다.
“크흐흐…….”
“크크크크…….”
“나리들! 이러지 맙시다! 승객들은 죄가 없소! 게다가 우리가 뭘 잘못한 것도 아니잖소!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할 사이에……, 헙!”
선장은 제대로 말을 마치지 못했다.
선두에 서 있던 수적 한 명이 다짜고짜 선장을 향해 도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휘익―
도는 정확히 선장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선원들과 승객들이 깜짝 놀라서 비명을 내질렀다.
당장에라도 선장의 목이 날아갈 것 같은 아찔한 상황에서 단유소의 몸이 흔들렸다.
채앵!
수적이 들고 있던 도가 그대로 날아가 물속으로 빠졌다.
그 광경에 모든 이들이 또다시 놀랐다. 한편으로 선장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정면의 수적들을 주시하며 단유소가 말했다.
“저들은 현재 이지를 상실하여 돌이킬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선장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통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계속해서 우리를 공격할 겁니다.”
“그, 그럴 수가……!”
선장이 그렇게 외쳤을 때, 방금 무기를 잃은 수적이 단유소를 향해 달려들며 주먹을 휘둘렀다.
단유소가 주먹을 살짝 흘리더니, 수적이 달려드는 힘을 역이용하여 측면에서 손바닥으로 그의 몸통을 살짝 쳤다.
파앙!
수적의 몸이 붕 뜨더니 그대로 강물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자마자 수적들이 일제히 단유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단유소의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적들의 기세가 흉흉하다고는 하나 상대는 초절정 고수인 단유소였다. 그들이 아무리 광기에 휩싸여 엄청난 능력을 발휘한다 해도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단유소인 것이다.
단유소가 개입한 후로 채 반각이 흐르기도 전에 선상에서의 상황은 대부분 정리되었다.
남은 수적들이라고는 선실 쪽에서 싸우는 자들 삼십여 명뿐이었다.
단유소는 굳이 그쪽을 지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위지세가의 무인들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적들의 상태도 급격히 나빠져 있었다. 진원진기로 인한 일시적인 힘이 다한 것이다.
뒤쪽에 있던 선원들과 승객들이 단유소의 근처로 빠르게 다가왔다.
“아이고 대협 덕분에 살았습니다!”
“대협! 정말 감사합니다!”
단유소가 대꾸했다.
“나는 대협 소리 들을 만한 사람도 아니고, 나 살자고 한 일일 뿐입니다. 대협이라는 호칭은 자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보다도 선장님.”
“예, 대협. 아, 아니 공자.”
“아까 저들이 뭔가를 먹은 후에 이렇게 된 것을 보셨을 겁니다. 사람을 흉포하게 만드는 종류의 약으로 판단됩니다.”
선장도 본 게 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소가 바로 말을 이었다.
“분명히 무서운 배후가 있을 겁니다. 그들이 오면 더 위험해집니다. 내가 그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전속력으로 배를 몰아야 할 겁니다.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공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으로 이쪽에서 운항을 하는 건 매우 위험할 겁니다. 게다가 근래 강호에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 이 인근도 위험지역에 속합니다. 이번 일도 그 소문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고요.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고 있는지 아실 겁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자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생업이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겠지요. 어차피 선장께서 결정하실 문제니 더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선장이 서둘러 선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단유소는 수적들의 돌발 행동에 대비했다.
위지세가의 무인들이 남은 수적들을 모두 정리한 건, 배가 출발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수적들을 정리하자마자 위지척이 무인들을 대동하고 단유소 쪽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피범벅이 된 상태로, 군데군데 상처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위지척이 먼저 포권하며 인사를 건넸다.
“아까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위지척이라 합니다. 귀인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위지척의 뒤에 있던 세 명의 절정 고수들도 단유소를 향해 일제히 포권했다.
위지척의 태도도, 무인들의 태도도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단유소가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수임을.
단유소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기만 하자 위지척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로 물었다.
“귀인의 존성대명이라도 알고 싶습니다만…….”
단유소가 여전히 반응하지 않자 위지척이 비굴한 느낌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핫. 제가 정신이 없어 살피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적도들을 상대하느라 귀인께서도 피곤하셨겠지요. 선실에 좋은 술이 있습니다. 자, 가시지요. 옆에 계신 소저께서도 함께.”
그러자 단유소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 느껴지나? 당신을 바라보는 저 많은 시선들이?”
“예……?”
위지척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선원들도 승객들도 모두 곱지 않은 시선으로 위지척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유소가 말했다.
“뭐? 술? 저들 모두가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단 말이다. 그런데 당신은 저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나? 조금도 신경이 안 쓰여?”
언성이 높지도 않았고 역정을 내지도 않았다. 훈계하는 투도 아니었다.
단유소의 목소리에서는 고저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더 무서웠다. 그와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한설연조차도 등골이 서늘할 정도였다.
위지척이 쩔쩔매며 대꾸했다.
“저, 저는 일단 목숨을 구해주신 귀인의 은혜에 먼저 보답코자…….”
“착각하지 마.”
위지척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며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 따위를 구해주려고 나섰던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