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달갑지 않은 승객 (2)
세 척의 배가 물줄기의 정면과 양쪽 측면에서 다가오며 뱃길을 막았다.
보아하니 양쪽 강가에도 또 다른 두 척의 배가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선장으로 보이는 사십 대 후반의 중년인이 뱃머리에 서서 정면의 배를 향해 외쳤다.
“아이고! 우리 대협 나으리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자 건너편 배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이 선장! 안녕하셨는가!”
“안녕하다마다요. 다 대협들 덕분이지요. 허허허.”
“크허허! 앞으로도 안전에 관해서는 걱정 말게! 그리고 우리 두령님께서도 안부 전해주라고 하시더군!”
“어이쿠! 두령님이 보잘것없는 이 사람의 안부도 다 물어주시고.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크허허허! 알겠네! 내, 돌아가서 꼭 말씀드림세!”
인사를 주고받는 모양새만 보면 결코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게 된 자들의 대화처럼 들리지 않았다. 지인들끼리 오랜만에 만나서 나누는 대화 같았다.
건너편 배에서 다시금 외침이 들려왔다.
“자! 그럼 다른 때처럼 빨리 끝내고 헤어지세!”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 말이 끝나자 건너편 배에서 이쪽 배로 기다란 나무판자가 놓였다. 그것을 밟고 다섯 명의 수적이 차례로 건너왔다.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험상궂게 생긴 자들이었다. 다섯 명 모두, 망나니들이나 쓸 법한 큰 칼을 쥐고 있었다.
멀리에서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전음으로 말했다.
[커다란 덩치나 험악한 인상에 비해 전혀 강하지 않은 자들로 보여요. 결국 겁주려고 일부러 저렇게 생긴 자들만 골라서 보낸 거겠죠? 하나같이 저렇게 무식하게 생긴 칼을 들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렇지. 이런 일은 상대로 하여금 겁을 먹게 만드는 게 중요하니까.]
그 즈음 선원 한 명이 수적에게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고 있었다. 부피로 볼 때 동전일 리는 없었다. 아마도 은전 꾸러미일 것이다.
주머니를 건네받은 텁석부리 거한이 선장에게 말했다.
“매번 협조해줘서 고맙소.”
“늘 말씀드리지만 대협들 덕에 우리가 안전하게 되는 것이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협이라는 호칭도 그렇고 고맙다는 말도 그렇고, 마음에 없는 말일 게 빤했다. 그럼에도 선장의 어조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쪽 세계는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군요…….]
그녀의 어조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어려운 문제야. 의외로 수많은 관계들이 얽혀 있거든. 철없는 의협심만 가지고 어설프게 나설 일이 아니야.]
[단 공자님은 이런 일, 많이 봤겠어요.]
[셀 수도 없지.]
[혹시 개입해본 적도……, 있으신가요? 그냥 단 공자님 개인적으로.]
한설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단유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왠지 안타까운 일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미, 미안해요. 괜한 걸 물어서…….]
단유소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즈음에는 이쪽 배로 건너왔던 다섯 명의 수적들이 자신들의 배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선실의 문 쪽에서 한 줄기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왜 배가 안 가고 멈춰 있나 했더니 겨우 도적떼들 때문이었나?”
승객, 선원, 수적들을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는 이십 대 중후반 쯤 되어 보이는 준수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청색의 비단 옷을 입었고, 한 손에는 접힌 부채를 들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삼사십 대의 사내들 예닐곱 명이 서 있었는데, 모두가 상인 복장이었다.
뒤돌아서 청년을 바라보는 선장의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즈음, 청년을 바라보는 한설연의 눈빛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단유소가 빠르게 전음으로 물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인가?]
이에 얼른 고개를 끄덕인 한설연이 빠르게 답했다.
[위지척(尉遲陟). 그가 바로 위지세가의 차남이에요. 사오 년 전에 맹주님의 생신 축하연 때 무림맹에서 얼굴을 본 적이 있어요.]
위지세가는 강호의 오대세가 안에 들지는 못하지만 십대세가 안에는 이름을 올리고 있는 세가였다. 원래는 십대세가 안에도 못 끼었는데 근 이십여 년 전부터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 세가였다.
재력을 통해서였다.
서역과의 교역을 통해 커다란 부를 축적, 그 자금력을 이용하여 당당한 십대세가의 일원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좋지 않아요. 오만불손하고 경솔하다는 쪽이죠. 놀고먹던 망나니였는데 근래 세가의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아마도 서역과의 교역에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인 모양인데, 하필 이 배에 타고 있었을 줄이야…….]
마지막 순간에 한설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위지척의 성격상, 일이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갈 게 빤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실 안에서 무인으로 짐작되는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던 거로군. 당장 위지척 곁에 있는 상인 복장의 사내들도 모두 무인들이고.]
단유소와 한설연이 전음을 주고받는 동안, 선장은 위지척을 말리고 있었다.
“고, 공자께서는 부디 말씀을 삼가십시오!”
선장이 부탁조로 외쳤지만 위지척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가 대꾸했다.
“훗! 선장께서는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구려. 말을 삼가라니요? 그게 불의에 맞서 분연히 일어선 사람에게 할 소리요? 도적떼들을 도적떼들이라 칭한 게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오? 세상이 대체 어떻게 되려고 정의를 외치는 자에게 침묵을 요구한단 말이오?”
선장과 선원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선장이 서둘러 위지척을 향해 외쳤다.
“공자께서 어디의 누구시든, 어떤 분이시든 상관없습니다! 제발 지금이라도 말씀을 삼가십시오! 지금 공자께서 이러시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승객들은 물론이거니와 당장 이 배를 운행하는 우리에게도 말입니다!”
하지만 위지척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의 누구냐고 하셨소? 소생, 위지세가의 위지척이라 하오.”
그 말에 선장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라 해서 위지세가의 명성을 모를 리 없었다.
위지척이 냉소를 머금은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위지척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셨소? 입 다물고 저 쓰레기 같은 것들의 눈치나 살피고 있으라고? 우리 위지세가가 저런 잡것들을 두려워할 곳처럼 보이는 거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되었소! 어쨌든 선장이 저놈들에게 넘긴 돈뭉치에 어차피 내 돈도 포함된 것이나 마찬가지니, 내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하겠소. 우리 위지세가는 결코 도적떼들 따위와 타협하지 않소!”
“위지 공자!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그러자 위지척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후후. 우리 위지세가가 어지간히도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군.”
그렇게 말한 위지척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순간 이후로는 이 강호의 누구라도 절대 저런 생각을 못 하게 만들어줍시다.”
그러자 위지척의 뒤에 서 있던 사내들 중 한 명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위지척에게 전음을 보내는 모양이었다.
전음을 들은 위지척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전음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위지척의 반응을 보니 그 내용이 대강 짐작되었다. 아마도 사내는 위지척을 말리고자 했을 것이다.
사내의 입술이 다시 달싹거렸다.
그러자 위지척이 역정을 냈다.
“고작 도적떼들 혼내주는 일에 복잡할 게 뭐가 있단 말이오! 게다가 이런 식이면 내 꼴이 뭐가 되겠소! 나아가서 우리 세가의 위신은 또 어찌 되겠느냔 말이오! 세가의 명성에 누를 끼치고 이대로 돌아가면 아버지께서 퍽이나 좋아하실 것 같소?”
사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위지척이 더욱 언성을 높여 말했다.
“저런 잡배들 처치하는 것쯤, 여러분에게는 오래 걸릴 일도 아니잖소! 그러니 월봉만큼이나 높다는 그 실력들, 어디 한번 실컷 발휘해보시란 말이오! 잔말 필요 없소! 지금 즉시 모두 나와서 놈들을 처치하시오!”
그러자 선장이 위지척을 향해 외쳤다.
“위지 공자……!”
“어허! 선장께서는 잠자코 계시오!”
“우리가 괜찮다는데 왜 자꾸 이러십니까!”
그러자 위지척이 눈매를 찡그리며 선장을 쏘아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가만히 보니 선장께서는 아까부터 정의의 편보다는 악의 편을 들어주려 하시는구려. 이게 무슨 경우요? 저들과 뒷거래라도 있는 것이오?”
“뒤, 뒷거래라니요! 말씀을 가려서 하십시오, 공자!”
“그게 아니면 잠자코 계시란 말이외다! 자꾸 그러시면 저놈들과 내통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내, 내통이라니……!”
선장은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위지척에게 전음을 보내며 말렸던 무인도 결국 포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가 선실 안쪽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선실 안에서 몇 사람이 더 튀어나왔다. 그들이 원래 나와 있던 사내들에게 빠르게 병장기를 건넸다. 선원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고, 승객들은 아예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던 한설연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아! 저 꼴통이 기어이……!]
그녀의 어조에 탄식이 가득 섞여 있었다.
한설연이 곧바로 다시 전음을 보내어 단유소에게 물었다.
[만약에 일이 터지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그러나 단유소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반응 자체가 아예 없었다.
다만 그는 뱃길을 막고 있는 수적들의 배 쪽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대위지세가의 자제분을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수적들의 우두머리가 위지척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처음에 선장과 인사를 주고받던 바로 그자였다.
위지척의 고개가 그를 향해 홱 돌아갔다.
그러자 우두머리가 다시 외쳤다.
“위지 공자! 이쯤 하십시다!”
이에 위지척이 눈매를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뭐라는 것이냐? 어디서 개가 짖기라도 하는 것이냐?”
그러자 수적의 우두머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헛! 개소리라 하셔도 상관없소이다! 그저 이쯤 하시자는 말씀을 공손히 드리는 것뿐이외다!”
“허! 어이가 없구나! 버러지만도 못한 도적 따위가 감히 내게 말을 거는 것도 모자라서, 뭐? 이쯤 하자고? 푸허! 그야말로 개 풀 뜯어먹는 소리로구나!”
“우리가 비록 수적질이나 해먹고 사는 처지이나, 위지세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압니다! 그런 위지세가에 대적하고 싶지 않소이다!”
그러자 위지척이 비릿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이 꼴에 주제는 아는구나! 그러나 그만두고 말고를 결정할 권한 따위가 네놈에게 있을 성싶으냐?”
“허허허! 가차 없으시구려! 이 정도만으로도 위지 공자의 패기와 의협심은 충분히 알겠소이다! 다른 승객들도 그 점을 분명히 느끼고 있을 터! 그러니 우리가 위지 공자의 준엄한 꾸짖음에 겁을 먹고 물러간 것으로 정리하십시다!”
“웃기고 있구나!”
“오늘 받은 은자꾸러미는 돌려드리고 가겠소이다! 그러면 되지 않겠소?”
위지척과 수적 우두머리의 대화를 듣던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했다.
처음에는 수적답지 않게 수완이 좋은 자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다.
‘여유로워……?’
그랬다. 위지세가의 무인들을 앞에 두고도 수적의 우두머리는 전혀 주눅 든 모습이 아니었다.
가만히 보니 겉으로만 여유로운 척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는 자의 여유였다.
빠르게 배를 몰아 도망칠 심산이었으면 지금쯤 돛이라도 펴고 있어야 했다. 한데 그렇지도 않았다. 줄행랑을 칠 생각에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뭘까.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걸까.
설마 수적들이 절정 고수라도 보유하고 있는 건가?
한설연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때, 위지천의 대꾸가 들렸다.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 우리 위지세가는 절대 도적떼들 따위와 타협하지 않는다고?”
위지천이 곧바로 무인들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어서 처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