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달갑지 않은 승객 (1)
“치사해요!”
“뭐, 뭐라?”
“듣고 있었으면서도 자는 척했다는 거잖아요!”
그러자 단유소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도 자고 있었거든? 근데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잠시 깼던 거였거든? 그리고 나는 들려달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고. 옆에서 당신이 알아서 혼자 떠들어놓고 이거 왜 이러셔?”
“그, 그래도…….”
단유소의 말이 틀린 게 없으니 결국 기가 눌린 표정으로 한설연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단유소가 딴청을 부리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나름대로 함께 지내온 정이 있어서 그런지, 듣고도 그냥 넘길 수가 없더라고. 그래서 내 동료들 단련시키는 방식으로 당신도 훈련을 시켜줄까 했었지. 뭐, 본인이 싫다면 나도 굳이 더 이상은…….”
그러자 달리는 상태에서 한설연이 양손으로 단유소의 한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면서 비굴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헤헤헤. 그럴 리가요.”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왠지 배에 도착하면 어깨가 뻐근할 것 같군.”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제가 또 어깨 주무르는 건 일가견이 있거든요. 우리 사부님 상대로 수련을 많이 한지라. 헤헤헤.”
단유소와 한설연은 배가 떠나기 직전에 승선할 수 있었다. 운임이 상당히 비싼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배는 범선으로, 주로 크지 않은 강줄기를 오가는 중소형 여객선이었다.
승객이 꽉 찬 배는 아니어서 갑판 위의 공간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갑판 위에 있는 사람들은 선원을 합해도 삼십 명 남짓으로 보였다.
선실 안에도 승객과 선원이 약 이십 명 정도는 있는 듯했다. 그러니 총원은 오십 명 정도일 것이다.
단유소와 한설연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혹시 여기에도 자객이 타고 있나요?]
한설연의 전음이었다.
[글쎄. 아직까지는 딱히 신경 쓰이는 기운은 없는 것 같은데, 또 모르지.]
[이전의 일 때문인지 모든 사람들이 수상해 보여요. 다들 자객 같아서.]
[이봐, 긴장감과 경계심은 속으로만 유지해. 안 그러면 당신이 제일 수상해 보일 테니까.]
[아, 알았어요.]
단유소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이며 물었다.
[설마 배 처음 타보는 건 아니지? 멀미 걱정 같은 거, 안 해도 되지?]
[나 절강 사람이거든요? 이래 봬도 바다를 누비던 몸이라구요.]
[오오.]
단유소가 과장된 반응을 보이자 한설연이 눈을 흘겼다. 잠시 후에 그녀가 말했다.
[지도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이 물줄기를 타고 가면 제법 큰 물줄기와 합류하게 되어 있어요. 그 강은 사천의 중서부를 가르며 내려가다가, 중남부에 이르러서 동쪽으로 꺾여요. 그러면서 아미산 남쪽을 지나는 모양이에요.]
단유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아미파는 청성파와 당문의 남쪽에 있으니 더 안전할 거예요. 그러니 이대로 수로를 이용하여 아미파 근처까지 이동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물론 중간에 배를 몇 번 갈아타긴 해야겠지만.]
단유소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물줄기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자객들이 봤어요. 그러니 수로를 이용하는 이 경로도 안전하지만은 않을 수 있어요. 적들이 예측하고 조치를 취할 테니까.]
[일단은 당신이 말한 식으로 이동하다가 상황을 보도록 하지. 어쨌건 새벽부터 격렬하게 움직이느라 힘들었을 테니 충분히 휴식을 취해두도록.]
그러면서 단유소가 먼저 등과 머리를 벽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한설연이 몸을 가까이 붙이며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가가, 어깨가 뻐근하다고 하셨죠? 제가 주물러드릴게요. 나그읏나긋하게.”
그러자 단유소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단유소가 곧바로 전음을 보냈다.
[괜찮으니 쉬어.]
[아까부터 몇 명이 힐끔거리며 우릴 보고 있다고요. 괜히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자연스럽게 행동하셔야죠? 누가 봐도 연인으로 보이게끔?]
단유소가 티 나지 않게 훑어보니 과연 한설연의 말대로였다. 자연스럽게 행동해야 할 때였다.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한설연 쪽으로 등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천하제일을 다투는 우리 연매의 안마 솜씨에 어깨를 맡겨볼까나?”
그러자 한설연의 전음이 들렸다.
[방금 그 말투, 느끼해요.]
[시끄러. 누군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겉으로 드러나는 대화와는 분위기가 정반대인 대화가 전음으로 오갔다.
“후훗. 가가도 참.”
한설연이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아, 시원하다!”
두 사람은 그 후에도 연인들이 나눌 법한 대화를 하며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애정 표현, 행동, 목소리 등 모든 부분에서 타인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정도의 선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러니 누가 봐도 평범한 연인이었다.
어깨를 다 주무르고 나서 두 사람이 나란히 벽을 기대고 앉았다.
그 상태에서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바짝 붙어 앉더니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말했다.
“역시 가가의 어깨가 제일 든든해요. 이대로 조금 쉬어야겠어요.”
한설연이 그러자마자 바로 단유소의 전음이 들렸다.
[적당히 해라, 응?]
[보는 눈을 생각해서 이러는 거예요. 요즘 같은 날씨에 어떤 연인이 떨어져서 앉아요? 심지어는 더운 여름에도 찰싹 붙어 다니는 게 요즘 연인들이라고요.]
단유소가 자상하게 웃으며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웃음은 가식이었고 한숨은 진심이었다.
“편하게 쉬려면 이편이 더 낫겠지.”
단유소가 그렇게 말하며 한 팔로 한설연의 어깨를 감싸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한설연의 고개가 단유소의 가슴께에 닿는 자세가 되었다. 옆얼굴이 가슴께에 닿으니 단유소의 심장 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후에 단유소는 옆에 벗어두었던 피풍의를 한설연에게 덮어주기까지 했다.
“이러니 훨씬 덜 춥지?”
단유소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묻자 한설연이 곧바로 전음을 보냈다.
[그, 그래도 이 정도는 좀…….]
[이 서늘한 날에 강바람도 찬데 어떤 연인이 이 정도도 안 하겠어? 안 그래?]
단유소의 전음을 들은 한설연이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따뜻해요, 가가.”
“좀 쉬어, 연매.”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표정이 편안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이 자세를 취한 이후로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들며 계속해서 가슴이 쿵쾅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왜 이러는 거야, 한설연!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억지로 이러고 있는 것뿐이야. 그러니 진정하라고!’
혹시라도 단유소가 알아챌까 봐 그게 더 염려되었다.
그가 오해하는 상황도 싫고 놀리는 상황도 싫은데.
‘별거 아냐, 한설연. 아무 것도 아니야. 남자의 품에 이런 식으로 기댄 경험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야. 단지 그것뿐이야.’
속으로 어릴 적 부르던 노래들을 불러도 보고, 도경을 외워도 봤지만 마음을 다스리는 건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문득 단유소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볼을 그의 가슴에 대고 있는 상황이니 박동이 자연스럽게 전해져왔다.
자신과 달리 단유소의 심장 박동은 느리고 평온하기만 했다.
이런 게 초절정 고수의 평정심인가 싶다.
한편으로는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치! 그래도 천하제일미라고 불리는 여인이 안겨 있는데 이렇게 평온할 것까지는 없잖아.’
어쨌거나 여전히 가슴이 쿵쾅거리는 상황임에도 분명한 건 하나 있었다.
‘그래도 든든하고……, 따뜻해.’
한설연이 어느새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일각쯤 흘렀을 때.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단유소가 살며시 눈을 떴다.
한설연의 한 팔이 갑자기 자신의 목 언저리를 끌어안았기에 놀란 것이다.
단유소가 눈을 지그시 뜬 상태에서 눈동자만 돌려 보니 한설연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억지로 자는 척하는 게 아니었다. 호흡과 맥박이 모두 평온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단유소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문득 바람둥이 서백풍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조장님, 여자가 가장 예쁘고 귀여울 때가 언제인 줄 아십니까? 바로 잠들어 있을 땝니다. 그거 보고 있으면 약간 있었던 억하심정도 금세 사라져요.”
지금에 와서 보니 서백풍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들어 있는 한설연을 잠시 바라보던 단유소가 이윽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러지 마라, 한 소저. 정 들라.’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던 한설연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 갔다. 자신이 어떤 자세로 잠들어 있었는지가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단유소의 품에 안긴 상태였다. 한 팔을 단유소의 목 언저리에 두르기까지 한 채로.
‘어, 어, 어쩌다가…….’
든든하고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에 들긴 했지만, 이건 그래도 부끄러웠다.
슬며시 단유소의 눈치를 살펴보니 그는 잠들어 있는 듯했다.
한설연이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목 언저리에서 팔을 뗐다. 그는 초고수이니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에도 깨어날지 모른다. 그래서 조심한 것이다.
한설연의 동작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의 품에 기댄 채로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진정하라고 한설연. 제발.’
단유소는 잠들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곤히 잠들어 있는 한설연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잠자코 있었을 뿐.
한설연이 깨어난 것도 이미 알아차렸다.
그녀가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팔을 원위치시키는 것도 확인했다. 그럼에도 잠자코 있는 건, 자신이 반응하면 그녀가 부끄러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팔을 원위치시킨 후에도 한설연은 자신에게 기댄 채로 미동도 없었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더 자게 내버려두려는 배려일 터.
하는 짓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참 질긴 인연이다.
주선연으로 시작되어 임무로 얽혀 함께하게 되었고, 그녀가 주선연의 당사자인 한수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 강호에 홀로 남겨진 그녀를 떠안게 되었다.
그래도 공동파에만 데려다주면 임무도 끝나고 그녀와의 연도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마저도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아 지금에 이른 것이다.
사천에는 백도의 명문이 세 곳이나 있다. 당문, 청성파, 아미파다.
그 세 곳이 쉽게 무너질 가능성은 적으니, 목적지인 아미파에 도착하면 결국 이 평범하지만은 않았던 임무와 함께 한설연과의 질긴 인연도 끝날 것이다.
‘시원섭섭할 것 같군.’
단유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뱃머리 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갑자기 호각 소리가 들렸다.
삑삑삑 삐익― 삑삑삑 삐익―
그러자마자 갑판 위의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실 안에 있던 선원들도 빠르게 갑판 위로 뛰쳐나왔다.
강줄기를 따라 거침없이 나아가던 범선의 속도도 점점 줄어들었다.
호각 소리가 들렸을 즈음 단유소는 눈을 뜨고 있는 상태였다. 한설연이 바로 앉으며 전음으로 물었다.
[잘 잤어요?]
단유소가 고개만 끄덕여 보이자 한설연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이 배의 운임이 왜 예상보다 훨씬 비쌌을까?]
단유소가 되묻자, 고개를 갸웃하며 답을 생각하던 한설연이 이윽고 무릎을 탁 쳤다.
[아! 수적(水賊)! 그들 때문이겠군요!]
[맞아. 그리고 이런 건, 운임이 너무 비싸다는 걸 안 순간부터 예상을 해야 하는 거야.]
[그렇군요. 어쨌거나 저는 수적들이 큰 강에서만 활동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군요.]
[도적떼들은 어디에나 있지.]
한설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주의를 주는 눈빛으로 전음을 보냈다.
[노파심에서 말하는 건데,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서지 마. 알았어?]
[이 인근의 도적떼들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할 거면 아예 참견하지 말라는 뜻이죠? 어설프게 참견했다가는 나중에 이 배의 선원들만 곤란해질 테니까. 이들에게만 더 큰 피해가 갈 테니까.]
[오오오오!]
그런 것도 다 아느냐는 표정으로 단유소가 반응하자 한설연이 살짝 입술을 삐쭉거렸다.
[치! 그 정도는 저도 안다구요. 이들에게도 이들만의 법칙이 있다는 것쯤은. 강호 초출이라고 누굴 철없는 애송이로 아시나. 걱정 말아요. 단 공자님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먼저 나설 일, 없을 테니까.]
그 말에 단유소가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