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뜻밖의 훈련 (1)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한설연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지나오면서 상인들을 살펴보니 경계의 빛을 띠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일단 그들이 의심스러웠다.
중년인은 원래 의심스러운 부류는 아니었지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 아닌가 하여 의심스러웠다.
중년인이 대꾸했다.
“우리처럼 사람 많이 상대하는 일을 하다 보면 딱 봐도 알 수 있습죠. 허허허. 누가 봐도 다정한 한 쌍이시구려.”
그러자 한설연이 단유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유소는 여전히 한설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상태였다.
“가가, 우리가 잘 어울린대요. 새벽부터 기분 좋은 얘기 들었는데 어때요? 조금 사드릴까요? 마침 입이 심심하기도 하고.”
“연매가 먹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한설연은 단유소가 한수련의 ‘련’ 자를 따서 연매라 부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중년인이 말했다.
“제가 취급하는 견과류들은 비옥한 땅에서 자란 것들이라 품질이 매우 좋습죠. 견과류를 적당히 섭취해주면 두뇌 발달에도 좋고, 피부 미용에도 좋고, 노화 방지에도 좋다는 건 아시지요?”
“우와! 정말요?”
물론 한설연은 이미 견과류의 효능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 대꾸한 것이다.
단유소가 다정한 표정으로 한설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침 잘됐네. 요새 연매의 피부가 예전 같지 않게 까칠해진 느낌이었거든. 그러니 많이 먹고 피부 좋아져야지.”
그 말에 한설연이 이를 악문 채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놀리는 걸 잊지 않는구나. 아, 얄미운 사람.
“후훗. 제 피부 걱정까지 다 해주시고. 역시 가가밖에 없다니까요.”
그러자 중년인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자께서 참 자상하시군요. 소저께서는 행복하시겠습니다.”
조용히 해, 이 양반아. 사람 속도 모르고.
“그렇다마다요. 우리 가가가 이렇게 자상하답니다.”
그러자 단유소가 중년인에게 말했다.
“주인장 성격 보니 안 먹어봐도 알 것 같구려. 보시다시피 우리가 짐을 늘릴 형편이 되지 않으니 조금씩만 주시오. 호두는 한 열 알. 땅콩과 잣은 각각 한 줌 정도씩.”
그러면서 단유소가 동전 일곱 냥을 내밀었다.
환해졌던 중년 상인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공자. 요즘은 사 먹는 식사 한 끼도 열댓 냥은 합니다요. 공자께서 주문하신 양이면 그 정도는 받아야 저도 인건비 정도가 남습니다요. 일곱 냥은 너무…….”
“열 냥. 더 이상은 안 되오.”
“그 가격이면 제 쪽이 손햅니다요.”
중년 상인이 대꾸하자마자 단유소가 한설연에게 말했다.
“연매, 가자.”
단유소가 단호하게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니 중년 상인이 얼른 단유소의 옷깃을 잡았다.
“아이고, 거참! 젊은 분이 지독하시군요. 알겠습니다요. 드립죠! 드립니다요!”
중년인이 얼른 자신의 수레로 가더니 단유소가 주문한 만큼의 호두와 땅콩 등을 한 움큼씩 집어서 볏짚으로 만든 작은 주머니에 담았다.
얼른 되돌아온 중년인이 주머니를 단유소에게 넘기며 한설연에게 말했다.
“소저께서는 나중에 이분 공자와 혼인하시면 적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그려. 아주 그냥,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철저한 분이시군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중년인은 웃고 있었다. 그러자 단유소가 그의 손에 동전 다섯 냥을 더 쥐여줬다.
살짝 놀라는 중년인을 향해 단유소가 웃으며 말했다.
“이곳 인심이 어떤지 한번 확인해보려고 그랬던 겁니다. 많이 파십시오.”
“어이쿠! 고맙습니다요, 공자! 그럼 살펴 가십쇼!”
중년인에게서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한설연이 전음으로 물었다.
[저 상인은 자객이 아닌가 보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견과류에 독이 묻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만질 때는 아무렇지 않아도 먹으면 효과가 나타나는 종류의 독은 많으니까. 그럼에도 결국 사셨잖아요. 단 공자님이 괜히 그러셨을 리가 없죠. 그렇다면 저 상인은 자객이 아니라는 뜻이고.]
[글쎄.]
단유소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이후에도 몇몇 상인들이 두 사람을 붙잡았지만 두 사람은 적당히 둘러대며 그들을 지나쳤다. 그러는 동안에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저들 중에 자객이 있긴 있는 거예요?]
[당신더러 알아내라고 했을 텐데.]
“치.”
한설연이 작은 소리로 불만을 표출하자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한 가지 조언을 해주지. 자객을 파악해내는 일과는 별개로, 이 거리의 지형지물을 유심히 관찰해두는 게 좋을 거야. 지형지물은 때때로 누구보다 훌륭한 아군이 되어줄 수 있거든.]
상황이 이렇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유소의 방금 그 말이 마음속에 깊이 남았다.
이윽고 한설연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공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태껏 자객에만 몰두한 나머지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인지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거리의 모든 공간과 지형지물들이 입체화되어 한설연의 뇌리에 저장될 즈음, 두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에서 창검을 든 관병들이 다가왔다. 얼추 삼십 명 정도는 되어 보였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세 명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선두에 위치한 자가 말을 멈추더니 외쳤다.
“새벽부터 수고들 많으시오! 잠시 호패 검사 좀 하겠소! 협조만 해주면 금방 끝날 것이오!”
“갑자기 웬 호패 검사랍니까?”
“요새 흉흉한 소문이 있다고 하더이다. 우리야 뭘 알겠소. 윗선에서 하라니 하는 게지.”
상인이고 행인이고 할 것 없이 주섬주섬 호패를 꺼냈다. 지휘관들을 제외한 병졸들이 상인과 행인들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호패를 검사하기 시작했다.
병졸들이 점점 가까워지자 한설연도 호패를 꺼냈다.
하지만 단유소는 권태로운 눈으로 병졸들을 바라볼 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드르륵― 드르르륵― 드륵.
다만 아까 산 호두 세 알을 한 손에 쥐고 소리 내어 그것들을 굴릴 뿐이었다.
[뭐 하세요? 호패 안 꺼내고.]
[보여달라면 그때 꺼내지, 뭐.]
하여간 태평한 사람이라니까.
행인들이 한설연과 단유소를 지나치며 오가는 가운데, 병졸 두 명이 다가왔다.
“실례하오. 호패 좀 보여주셔야겠소.”
“아, 네…….”
호패를 내밀려던 한설연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그 순간.
챙!
한설연이 검을 뽑는 동시에 뒤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의 검이 뒤에서 날아오던 단검을 쳐냈다.
카앙!
보아하니 근처에서 만두를 팔고 있던 상인의 짓이었다.
그 순간 두 자루의 비수가 그녀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만두를 먹고 있던 자가 날린 단검이었다.
슈슉―
한설연의 눈이 더욱 커졌다.
깜짝 놀랐으되, 그녀의 몸은 이미 반응하는 중이었다.
급격히 몸을 비틀어 신형을 뒤로 뽑으며 두 자루의 비수를 쳐낸 것이다.
카강!
아직 초입이긴 하나, 그녀도 절정 고수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한 빠른 대처였다.
첫 공격을 막아낸 후 두 번째 공격을 막아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이 찰나간에 벌어졌다.
‘이들은 절대로 자객이 아닐 것이라 여겼는데…….’
한설연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호패를 조사하러 왔던 두 명의 병졸이 놀라서 외쳤다.
“뭐, 뭐냐!”
“이게 무슨……!”
그들이 한설연과 단유소를 보호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순간.
슉― 슈악―
두 명의 병졸이 거의 동시에 한설연과 단유소를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한설연은 또다시 깜짝 놀라야 했다.
병졸들도 한패였을 것이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탓이다.
한설연이 자신을 찔러오는 창의 촉을 빠르게 쳐냈다.
카앙!
동시에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왼팔을 병졸에게 뻗었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에서 장력이 발출된 순간, 한설연이 그 반탄력을 이용하여 단유소 쪽으로 이동했다.
다른 병졸의 창이 단유소의 등을 찔러가고 있었다.
“……!”
그 광경을 목격한 한설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단유소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여전히 한 손으로 호두알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미, 미친……!’
아무리 도와주지 않겠다고 했기로서니, 창이 찔러오는데 어찌 피하지도 않는단 말인가. 단유소는 완전히 작정한 느낌이었다.
한설연의 왼발이 최대한의 힘으로 땅바닥을 박찼다.
탓!
그녀의 신형이 거의 지면과 수평을 이루며 측면에서 단유소의 앞을 막아갔다. 병졸의 창을 쳐내기 위해 검을 최대한 앞으로 뻗은 것이다.
타앙!
한설연이 검면으로 창대를 쳐냈다. 다행하게도 검극 부분이 겨우 창대에 닿은 것이다.
창촉이 단유소의 등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럼에도 단유소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기가 부딪친 반탄력을 버티지 못하고 창을 든 병사의 팔이 허공으로 쳐들렸다.
반대로 지면과 거의 수평을 이뤘던 한설연의 신형은 앞으로 고꾸라지는 중이었다.
순간적으로 한설연이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을 이용해 땅바닥을 짚었다. 다가오던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제비를 돈 한설연이 병졸의 복부에 오른발을 꽂아 넣었다.
퍼억!
“커헉……!”
병졸의 허리가 접히며 뒤로 쭉 날아갔다.
착!
땅바닥에 착지한 한설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단유소가 빙그레 웃으며 빠르게 말했다.
“잘 좀 해. 나 죽을 뻔했잖아.”
“대체 뭐 하는 짓……!”
단유소에게 따져 묻던 한설연의 눈동자가 또다시 커졌다. 말하는 와중에 단유소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뒤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만두를 팔던 노점상 옆에는 건어물을 싣고 있는 수레가 있었다. 단유소가 가리킨 방향은 수레의 아래쪽이었다. 마침 한설연에게는 정면이기도 했다.
그늘진 어둠 속의 인기척을 느낀 찰나, 그 안에서 수십 개의 점들이 번쩍였다.
피슈슈슈슈슈슈슈슛―
수십 개의 침이 단유소와 한설연을 향해 폭사되었다.
저 많은 암기를 막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피해야 했다.
하지만 단유소가 문제였다. 방금 전에도 확인했지만 그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고민은 찰나였다.
결정을 내린 한설연이 검을 들지 않은 한 팔로 단유소의 허리를 감쌌다. 그러는 동시에 지붕 위를 향해 도약했다. 그곳으로 뛰어올라 도주할 심산이었다.
두 사람이 떠오른 직후, 발 아래로 은색의 침들이 스쳐 지나갔다.
떠오르면서 보니 단유소의 몸이 의외로 가벼웠다. 그나마도 경신법 정도는 써준 모양이었다.
이윽고 고개가 막 지붕 위로 올라온 순간, 한설연은 또다시 놀라야 했다.
지붕 위에도 누군가가 있었다.
그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왓장을 향해 이미 쌍장을 뻗고 있었다.
콰앙!
파바바바바바밧!
폭음이 들린 순간 기왓장들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들이 일제히 한설연과 단유소에게 날아왔다.
하나하나에 담긴 위력이 실로 대단하여 한설연의 입장에서는 막기도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발 디딜 곳 없는 허공.
위기였다.
척!
들고 있던 검을 빠르게 검집에 꽂은 한설연이 정면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이를 악물며 최대한의 힘으로 장력을 발출했다.
날아오던 기왓장들과 한설연이 발출해낸 강맹한 장력이 그녀의 바로 앞에서 맞부딪치며 폭발을 일으켰다.
퍼버버버버벙!
그 반탄력에 의해 한설연과 단유소가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날아갔다.
한설연이 허공에서 몸을 비틀었다.
예상 낙하지점은 거리의 중앙에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한설연은 애초에 그 나무를 이용할 심산으로 방금 전의 반탄력을 이용했던 것이다.
이런 임기응변이 가능했던 건,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단유소가 해준 조언 덕분이었다.
이 거리의 모든 공간과 지형지물들을 뇌리에 담아두지 않았다면 결코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왓장이 날아오는 순간 당황하여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설연의 오른발이 나무 꼭대기 부근의 가지를 가볍게 밟았다. 여전히 단유소의 허리를 왼팔로 끌어안은 채였지만 그녀의 몸놀림은 새처럼 가볍고 유연하기만 했다.
가지를 밟자마자 그녀의 신형이 허공으로 높게 튀어 올랐다. 목표 지점은 반대편 지붕 위였다.
‘아아……!’
왜일까.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위험천만한 상황인데도 몸이 가벼웠다.
반대편 지붕 위에서도 적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데도 알 수 없는 흥분과 희열이 느껴졌다.
무공을 익힌 이후로 이런 기분을 느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대체 왜일까.
멈추고 싶지 않다.
이 기분, 계속 느끼고 싶다.
단유소의 전음이 들려온 건 바로 그 때였다.
[여기까지. 수고했어, 한 소저.]
응?
이 사람이 대체 왜 그만두라 하는 걸까.
이렇게 기분 좋은 순간에.
의아해할 새도 없이 단유소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이제부터는 내가 하지.]
그 직후, 단유소가 지붕 위의 적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호두 한 알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지붕 위의 적을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