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37화 (37/200)

37화. 사천으로 (1)

“그럼 가지. 군데군데 솟아 있는 돌들을 밟으며 이동할 거야. 내가 밟은 곳을 밟으면서 따라와. 이끼 같은 것 때문에 미끄러울 수가 있으니 주의해야 할 거야. 꼭 필요한 말이 있을 때는 전음으로 하고.”

“알았어요. 그리고…….”

한설연이 말을 멈칫하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했어요. 빨리 공동파에 오자고 재촉했던 거……. 제가 도움이 되기보다는 뭣도 모르고 자꾸 실수만 하는 것 같아서 더 미안하고…….”

그러자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눈으로 잠시 한설연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실수를 해. 익숙하지 않으니까. 모르니까. 경험이 실수를 줄여줄 뿐이지. 그래서 강호는 실력이 셋에 경험이 일곱이라고 하는 거야.”

강호의 선배들은 다들 저런 말을 한다.

강호는 실력이 셋에 경험이 일곱이라고.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었다.

오로지 실력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실력만 있으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진심으로.

단유소가 말했다.

“그리고 나한테 미안해해야 할 정도로 당신이 실수한 것도 딱히 없어. 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마음에 두지 마.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지금 해야만 하는 것에 집중해. 알겠어?”

그러자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단유소를 바라보던 한설연이 오른 주먹을 왼 가슴에 대며 말했다.

“충(忠)!”

장난기 어린 그녀의 표정을 보며 단유소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윽고 돌아선 단유소가 돌부리들을 밟으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만 보면 쟤도 정상은 아니야.’

생각은 그랬지만, 단유소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한동안 가실 줄을 몰랐다.

그녀도 애쓰고 있는 것이다.

힘을 내려고.

그리고 힘을 주려고.

절벽 사이의 계곡은 달빛조차 들지 않아 매우 어두웠다. 물 흐르는 소리까지 제법 시끄러워서 은밀하게 이동하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워낙 깊은 낭떠러지 아래라서 확인은 되지 않지만 아직까지 위쪽이 소란스러운 것 같지는 않았다.

한설연은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그 싸움이 너무 일찍 끝난 탓이겠지.’

적들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절정 고수인 이추와 두진이 그렇게 빨리 당하리라고는.

사실, 상식적으로 따져도 벌어질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그렇기에 적들은 아직까지도 그 두 사람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단유소가 그 두 사람을 순식간에 처리한 것이 결국 적들의 허를 찌르는 효과까지 불러온 것이다.

얼마간을 이동하니 절벽 지형이 끝나며 양쪽으로 완만한 산지가 이어졌다. 더불어 계곡의 경사도 완만해지며 계곡물도 냇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물줄기를 따라 한참을 거침없이 이동하던 단유소가 어느 순간 멈춰 섰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앞쪽에 적의 무리가 있어. 많지는 않지만 들키는 것도 좋지 않아.”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이어 말했다.

“조용히 지나치려면 은밀하게 근접한 후에 입수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야. 수심도 마침 허리 높이 정도니까, 조금만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네, 알겠어요.”

두 사람이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적들의 근처로 다가갈수록 느낄 수 있는 건, 그들의 경계가 허술하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아예 경계를 하고 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두 가지의 예상이 가능했다.

여태껏 적이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파악을 했다 해도 이들에게는 아직 전해지지 않았거나.

둘 중 어느 경우라도 단유소와 한설연에게는 호재였다.

적당히 근접한 단유소가 조용히 시냇물 안으로 발을 넣었다. 최대한 물소리가 나지 않게끔 냇물의 중앙으로 이동한 후 천천히 입수했다. 한설연이 그 뒤를 따랐다.

입수하여 엎드린 자세를 취한 후 고개만 내민 상태에서 단유소가 전음을 보냈다.

[옆에서 한 손으로 내 허리띠를 잡아.]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단유소가 다시 전음을 보냈다.

[얼른.]

그제야 한설연이 순순히 단유소의 허리띠를 잡았다. 그 후에 단유소가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자 한설연도 잠수했다.

이윽고 단유소가 잠수한 상태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한설연은 깜짝 놀라야 했다.

‘헙!’

물속을 나아가는 단유소의 속도 때문이었다.

아무리 물살이 흐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해도 이건 너무 빨랐다. 무공 고수들이 일반인보다 빨리 헤엄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매우 빨랐다. 단유소가 양팔을 휘저을 때마다 소리도 없이 몸이 쭉쭉 앞으로 나아갔다.

수공만을 전문적으로 익힌 고수들은 물속에서도 마치 물고기처럼 자연스럽고 빠르게 움직인다고 들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들이라 해도 이 정도로 빠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전에 강물에 빠졌을 때도 그가 헤엄치는 속도는 상당히 빨랐던 것 같다. 그때는 경황이 없었기에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을 뿐.

지금까지 단유소를 알아온 과정은 놀람과 놀람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또 놀라고 있다. 그는 못 하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만능인 사람 같았다.

그것이 대라유유선공의 현묘함 때문임을 한설연이 알 리 없었다.

기본적으로 대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도 때때로 그 자연스러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게 바로 대라유유선공의 묘리였다.

물도 자연이니 그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단유소가 대라유유선공의 극대화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잠수한 채로 상당한 시간이 흘러 한설연의 숨이 가빠올 때쯤, 단유소가 물풀들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어서 고개를 내민 한설연이 최대한 조용히 숨을 몰아쉴 때, 단유소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그가 말했다.

“아직은 근처에 적들이 듬성듬성 있어. 사라질 거면 확실히 사라져줘야 해. 당분간 물길을 이용할 거야.”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녀의 호흡이 안정되길 기다렸다가 두 사람이 다시 입수했다.

단유소와 한설연은 이후로도 몇 번이고 그런 과정을 반복하며 점점 공동파와 멀어져 갔다.

* * *

사흘 후, 저녁.

단유소와 한설연은 사천성 서북쪽의 작은 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원래 공동산에서 정남향으로만 이동하면 사천의 중심인 성도에 도착하게 된다.

성도에는 유명한 당가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는 명문거파인 청성파가,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도 역시 명문거파인 아미파가 있다. 도착만 하면 다리 뻗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성도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남쪽으로 직행하지 않았다.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경로를 택했다.

이추를 통해서 얻은 정보 때문이었다.

단유소는 곧장 남쪽으로 향하다가는 적과 조우할 위험이 매우 크다고 판단, 안전하게 우회한 것이다.

그간 두 사람은 별다른 위험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일단 단유소가 초반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적의 이목을 피한 것이 주효했다. 이후에는 계속해서 산지였기에 단유소 특유의 잠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위험이 없었다고 해서 편한 시간이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간 두 사람은 거의 쉬지 않고 이동했다. 이왕 적의 이목에서 벗어난 김에 최대한 빠르게 이탈해야 한다는 게 단유소의 뜻이었다.

“아아……!”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자 한설연이 탄성을 내뱉었다. 감격에 겨운 탄성이었다.

그동안 마주친 사람이라고는 적들밖에 없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일반인들이란 말인가.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벅차서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한설연에게 단유소가 핀잔을 줬다.

“당신, 촌티 나.”

하지만 한설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거 상관없어요. 신경 안 써요. 그냥 이 순간의 기분을 최대한 느끼고 싶어요.”

“나도 그 기분 망치고 싶지는 않아. 다만 당신 때문에 남들의 시선을 끌까 봐 하는 말이지. 그래서 좋을 것 없잖아.”

“쳇.”

입술을 삐쭉거리긴 했지만 한설연은 순순히 단유소의 말을 따르는 중이었다. 면사 안에서 눈동자만 움직일 뿐 더 이상 두리번거리지 않았다. 그의 말을 따르면 절대로 손해 볼 일이 없다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확실히 깨달은 그녀였다.

하지만 한설연의 다소곳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와아아!”

저잣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또다시 탄성을 내지르며 가게들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단 공자님!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정말 배 터지게 먹어봐요! 먹고 싶은 거 다 먹구요!”

“스읍.”

단유소가 주의를 주자 한설연이 움찔했다.

“아니 뭐……, 아, 알았어요. 조심할 테니까, 밥은 맛있는 거 먹자구요. 배 터지게.”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까 오두방정 좀 그만 떨어.”

핀잔을 듣긴 했지만 한설연은 싱글벙글이었다.

잠시 걷던 그녀가 말했다.

“좋은 객잔에서 묵어요, 우리.”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술도 한잔해요, 우리.”

그러자 단유소가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뭐어어? 수우우울? 정신 차려. 우리 아직 마음 놓을 때 아냐.”

“많이 안 마시면 되잖아요.”

“임무 중이야. 규정상 음주는 금지야.”

“나만 비밀로 하면 되잖아요. 그간 압박감이 심했으니 기분만 내자는 거잖아요. 게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내공으로 주독을 몰아내도 되고…….”

“규정뿐만이 아니야. 내 원칙이기도 해.”

단유소가 완고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한설연이 또다시 입술을 삐쭉거렸다.

“치! 남자가 그렇게 너무 딱딱하게 구는 거, 여자들이 별로 안 좋아한다구요. 때에 따라서 조금은 융통성도 발휘할 줄 알아야지.”

“누군 술 싫어하는 줄 알아? 임무 때문에 자제하는 거지. 그런 것도 못 이해해 줄 여자라면 애초에 관심도 없어. 그리고 당신은 내 눈에 여자도 아니니, 당신이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는 문제고.”

“뭐, 뭐라고요? 여자도 아니라니……!”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자 단유소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상태로 그가 말했다.

“뭘 발끈해? 우리 서로에게 그런 관계 아니었나?”

한설연은 대꾸하지 못했다.

이상했다.

단유소의 말이 맞긴 한데, 왠지 마음속 한구석이 멍한 느낌이었다.

조용히 걷는 한설연에게 단유소가 말했다.

“먹는 건 먹는 거지만 그 전에 필요한 물품들부터 보급해야 해. 옷도 좀 사야 할 테고.”

그로부터 반 시진여가 흐른 후.

단유소와 한설연은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을 둔 채로 마주 앉아 조용히 서로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음식은 젓가락 한 번 대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공간이 넓은 특실이었다.

안전상의 이유로 단유소가 큰 방 하나만을 원했고 한설연도 그 뜻에 동의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같은 방을 쓰게 된 것이다. 어차피 여태까지도 수많은 밤들을 함께 보낸 두 사람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불편할 건 딱히 없었다.

한설연은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세안을 하고 인피면구를 벗어둔 상태였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놔두고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다가 한설연이 한 손을 식탁 위로 들었다. 그러자 단유소도 그녀를 따라 한 손을 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손이 식탁의 중간 부분에서 마주쳤다.

틱!

작은 사기그릇이 마주치는 소리가 들렸다.

실제로도 두 사람은 작은 술잔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젖히며 술잔 안의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탁탁!

두 사람이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키야아! 쥐이익인다!”

기분 좋게 인상을 찡그린 한설연의 반응이었다.

“크으.”

입술을 소매로 훔치는 단유소의 표정에도 활기가 돌고 있었다.

한설연이 말했다.

“거봐요. 얼마나 좋아요. 이렇게 한잔하니까.”

그러자 단유소가 째진 눈으로 대꾸했다.

“신나셨네, 아주. 그리고 쥑인다가 뭐야, 쥑인다가. 현월곡 어른들 앞에서도 그래?”

이에 한설연이 눈을 흘겼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꼭 분위기 깨는 소리 하시긴.”

그 말에 단유소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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