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섬전승천검뢰 (1)
뭐?
다리를 끊어서 그녀를 추락사시키든 말든 하라고?
어린놈이 배짱을 부리며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오니 그건 또 그것대로 난감했다.
갖은 잔혹한 방식으로 사람을 많이도 죽여봤지만, 천하제일미라 불리는 미인을 추락사로 보내기에는 역시 아쉬웠다.
저런 전리품이 세상천지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오랜만의 강호행이니 이왕이면 부수적으로 즐길 수 있는 건 최대한 즐겨야 한다.
그러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는 일.
오히려 이런 땐 강하게 나가는 게 더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추가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수틀리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일조차 없을 것이다. 이 어르신이 뭐가 아쉬워서 다리 따위를 끊는 수고를 자처하겠느냐? 네놈의 목만 따버리면 간단할 일을.”
그러자 단유소가 씩 웃으며 대꾸했다.
“설령 다리가 멀쩡하다 해도, 내가 당하는 동안에 저 여인은 가만히 있을까?”
“흘흘흘. 네놈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그래, 솔직히 저 아이가 뛰어내려서 뒈져버리면 이 어르신의 입장에서는 아쉽기야 하겠지.”
이추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나대로 할 일을 마친 셈이니 크게 아쉬울 것까지는 없단 말이다. 세상천지에 미인은 널리고 널렸다. 이 나이쯤 돼서 굳이 최상품을 바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뒈진 네놈과 저 아이만 손해라는 뜻이니라.”
말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전에 한설연도 말했다시피, 여태껏 마주쳤던 적들도 꼭 그녀를 생포하겠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추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놈이 요행을 써서 다리를 끊고 저쪽에 고립된다 해도 딱히 미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공동파의 주변에 우리 측 사람들이 쫙 깔려 있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강한 자들이 대기하고 있거든. 시간문제라는 말씀이니라.”
그러자 단유소가 대꾸했다.
“결국 당신들을 죽이고 최대한 조용히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군.”
어차피 숨어 있는 자와 이추를 달고 도망칠 수는 없다. 혼자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한설연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얘기다. 결국은 두 사람을 처치해야 한다.
단유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이추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어린놈의 기질이 만만치 않아 쉽게 포기할 상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놈이 싸우려 하면 할수록 천하제일미를 얻을 확률도 높아진다.
‘이쯤에서 마지막으로 놈의 자존심을 한 번만 건드려주자.’
이추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뒤쪽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다.
“형님, 뭘 그렇게 뜸을 들이시오. 어차피 그놈만 죽이면 간단히 끝나는 문제가 아니오? 얼른 처리하고 간만에 재미나 좀 봅시다.”
투박하다 생각되는 목소리였다.
그가 바로 이추의 조력자일 것이다.
사내의 목소리를 들은 한설연이 몸을 움츠렸다.
그가 말한 ‘재미’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었다.
단유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살짝 틀고 이추가 말했다.
“알겠네, 아우. 오랜만의 강호행이라서 그런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구먼.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우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어둠 속의 조력자에게 그렇게 대꾸한 이추가 단유소를 쏘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아우가 자꾸 보채니 빨리 끝내야겠구나.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을 끝내자마자 이추가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흔들렸다 싶은 순간 그는 단유소의 바로 앞에 나타나 있었다. 그의 낫의 날을 타고 연적색의 강맹한 빛무리가 길게 솟아 있었다.
무인이 발산해낼 수 있는 기운 중에서 가장 단단하고 강력하다는 기운.
강기였다.
샤샥―
양방향에서 휘둘러진 이추의 낫이 연적색의 긴 꼬리를 남기며 단유소의 목과 팔을 베어왔다.
잔상이 길게 남는다는 건 그만큼 낫을 휘두르는 속도가 빠르다는 뜻.
단유소도 빠르게 반응했다.
그는 어느새 양손에 쥐고 있는 쌍소검으로 두 자루의 낫을 막아가고 있었다.
카강!
어두운 공간에 불꽃이 튀었다.
이추가 재차 낫을 휘둘렀다.
두 자루의 낫이 이번에는 같은 방향에서 각각 단유소의 어깨와 허리를 베어왔다.
단유소가 다시금 쌍소검으로 두 자루의 낫을 막아갔다.
카강!
또다시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단유소에게 공격을 가하면서도 이추는 내심으로 의아해하고 있었다.
‘강기를 맨 무기로 막아? 아무리 무기가 신병(神兵)이라도 그럴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꼼수 따위로 강기를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저 어린놈이 강기는 아니더라도 강기와 맞먹는 어떠한 기운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그 즈음, 살 떨리는 심정으로 전투를 지켜보고 있는 한설연도 이추와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추의 낫에 맺힌 빛무리는 분명히 강기였다. 그것도 매우 강력한 강기였다.
그런데 단유소의 쌍소검에는 아무런 빛무리도 맺혀 있지 않았다. 강기를 쓰지 않은 것이다.
강기를 막을 수 있는 건 강기뿐이다. 무인들에게는 상식과 같은 개념이었다.
그런데 단유소는 강기를 쓰지 않고도 이추의 강기를 막아내고 있었다. 보아하니 그가 들고 있는 쌍소검도 멀쩡해 보였다. 계속해서 강기를 막아내고 있는데도 그 상태라는 건, 요행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태 단유소가 싸우는 모습을 많이 봤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가 강기를 쓰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그런데도 저렇게 강할 수 있다는 게 더 신기했다.
콰앙!
진기와 진기가 맞부딪치며 한 차례 폭음이 들렸을 때, 이추가 공격을 멈추고 신형을 뒤쪽으로 뽑았다. 한설연을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기에 단유소도 굳이 그를 쫓지 않았다.
이추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단유소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놈! 이상한 기운을 쓰는구나!”
단유소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한참이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단유소를 바라보던 이추가 스스로 어떠한 결론을 내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오냐, 인정하마. 네놈이 내 예상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붙어보니 알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저렇게 강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놈은 방심해서는 안 될 상대였다. 결코 깔볼 수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추가 여전히 단유소에게 시선을 둔 상태에서 살짝 고개를 뒤로 비틀며 말했다.
“두(豆) 아우! 아무래도 아우가 나서지 않으면 오래 걸릴 것 같군.”
그 말이 끝났을 때였다.
퍼러러러러러럭―
이추의 뒤쪽 어둠 속에서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이내 이추의 옆에 한 사내가 착지했다.
그는 건장한 체구의 백발노인이었다. 한데 이추와는 달리 머리카락이 풍성했다. 얼굴도 홍안이어서 건강해 보였고 주름도 훨씬 적었다.
외모만으로는 환갑도 안 되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가 한참 늙어 보이는 이추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외모상의 나이 차로만 따지면 이추가 숙부뻘은 되어 보였으니까.
이추의 곁에 착지해서도 그의 시선은 한설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상태로 그가 이추에게 말했다.
“소제 또한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방금 형님과 싸우는 걸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더군요. 함께 빨리 처리하고 술이나 한잔하러 가십시다.”
그의 눈동자에 욕망이 가득했다.
한설연은 두려웠다.
단유소는 초절정 고수답게 적의 기척을 감지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덕분에 위기를 모면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단유소는 이추의 기척은 물론이고 방금 나타난 백발노인의 기척마저도 감지하지 못했다. 두 노인이 그만큼 대단한 고수라는 뜻이다.
실제로 보니 이추는 강력한 강기를 구사하는 고수였다. 백발노인도 그에 준하는 고수일 가능성이 높았다.
단유소의 강함을 잘 알고 있지만 상대는 초고수 두 명이다. 아무리 그라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너무 염려가 되었다.
“공동파든 화산파든 소림사든 상관없어.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할 뿐이야. 어떤 경우든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대비하는 게 내 역할이고.”
문득 단유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까 빨리 공동파에 오고 싶다며 보챘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결국 그의 말대로 최악의 경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이 보채지 않았다면 그가 더 충분한 회복의 시간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그러면 그의 불가사의한 무위를 감안할 때, 이 상황도 조금은 더 나았을 테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루든 이틀이든 더 기다려줄 것을…….’
그나저나 단유소가 저들을 막아내지 못하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절대 안 되겠지만, 만의 하나 그렇게 된다면 단유소의 말대로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지는 편이.
그런 생각을 하던 한설연이 고개를 저었다.
요새 왜 이렇게 비관적으로 변한 걸까.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옆에 두고.
‘이러면 안 돼, 한설연!’
마음을 다잡은 한설연이 눈을 감았다.
기억을 더듬으며 백발노인의 정체를 유추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라도 단유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 했다.
‘이추가 말한 그의 성은 두씨. 그리고 무기는 극(戟).’
잠시 생각을 계속하던 그녀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한설연이 즉시 단유소에게 전음을 보냈다.
[참고하시라고 말씀드릴게요. 저 노인도 전대 고수로, 패천혈극(覇天血戟) 두진(豆溱)이라는 작자예요. 타고난 힘이 강한 데다가 세 갈래로 갈라진 창촉의 변화가 무쌍해서 상대하기가 까다롭다고 알고 있어요. 십여 년 전에 종적을 감췄는데 그 전까지는 최절정의 경지였고요.]
단유소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일 때 패천혈극 두진이 말했다.
“아까 보니 어린놈이 건방깨나 떨더구나. 뭐? 어디의 개냐고? 그렇게 궁금하면 염라대왕 앞에 가서 물어보거라. 그 전에…….”
잠시 말을 멈춘 두진이 음흉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네놈을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상태로 만들어놓고 좋은 구경을 시켜주마.”
반병신으로 만들어놓고 한설연이 능욕당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뜻.
그 말에 단유소가 씩 웃었다.
그러자 두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허! 웃어? 미쳐가는 모양이구나.”
두진에게서 느껴지던 살기가 더욱 강력해졌다.
“그래. 미친놈은 빨리 죽여줘야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추와 두진이 동시에 단유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추는 지면을 스치듯 다가오며 두 자루의 낫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즈음 두진은 낮게 도약하여 이추의 머리 위에서 단유소를 향해 극을 찔러 넣는 중이었다.
이추의 낫에도, 두진의 극에도, 강력한 강기가 맺혀 있었다.
이추의 낫은 단병, 두진의 극은 장병이다. 다리 위의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각자가 들고 있는 무기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며 최선의 합격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손발이 그만큼 잘 맞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설연은 그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했다.
그런데 왜인지 단유소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오른손에 쥔 장검을 바닥에 늘어뜨린 채였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바로 대처해도 부족할 판인데 왜 저러고 있단 말인가.
“단 공자님……!”
한설연이 그렇게 외쳤음에도 단유소는 움직이지 않았다.
반대로 이추와 두진은 득의양양해진 상태였다.
역시 어린놈은 어린놈이었다.
기세에서 완전히 눌린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놈이 언제 초절정 고수 두 명이 펼치는 합격술을 겪어봤겠는가 말이다.
사실, 누구라도 그런 경험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긴 했다. 강호에 살면서 만나기도 힘든 게 초절정 고수라는 존재들이니까.
어느새 두 자루의 낫과 한 자루의 극이 어린놈의 몸에 닿아가고 있었다.
이쯤이면 놈이 아무리 대처를 한다 해도 이미 늦었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양쪽이 낭떠러지인 다리 위인지라 피할 데도 없었다.
놈은 끝이다.
이제 중요한 건 저 뒤에 있는 천하제일미였다.
그녀가 혹시라도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기 전에 그녀를 낚아채야 한다.
다리에 힘이 풀린 한설연이 난간을 붙잡았을 때였다.
파앗!
갑자기 단유소와 두 늙은 고수의 사이에서 섬광이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