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공동파 (3)
귀쌍겸왕은 사파의 전대 고수였다.
그가 한참 활동할 당시에는 두 자루의 낫을 이용해 상대를 잔혹하게 죽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강호에 낫을 무기로 쓰는 고수가 거의 없으니 대처하기도 까다로운 건 당연지사. 결국 정파의 이름난 고수들도 시비가 붙었다가 그에게 여럿 죽었다.
그로 인해 무림맹의 척살령이 떨어지자 사흑련에 몸을 의탁했는데, 그 후로 몇 년간 활동하다가 종적을 감춘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 바로 귀쌍겸왕이었다.
종적을 감출 당시에도 칠순 정도의 나이였으므로 노환에 의한 사망으로 결론이 내려졌었다. 그게 자그마치 십오 년 전의 일이었다.
거기까지가 한설연이 알고 있는 귀쌍겸왕에 대한 정보였다.
그런데 십오 년 동안 단 한 번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다.
하필이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단유소 쪽을 향해 코를 벌렁거리며 냄새를 맡는 모양새를 취하던 귀쌍겸왕이 말했다.
“좋은 냄새가 나는 아이로구나.”
괴기스러운 표정에 변태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한설연은 더욱 소름이 끼쳤다. 그가 말을 이었다.
“과연 교월이라 불릴 만한 아이로구나. 그래, 아이야. 너는 이 어르신의 함자도 알고 있느냐? 세월이 하도 오래 되어 내 이름도 까먹어서 그런다.”
강호 고수들의 특징과 이름, 성향 등을 외우는 건 현월곡의 제자들에게 있어 필수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범위에는 전대 고수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전전대 고수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한설연이 말했다.
“이추(李椎)…….”
“맞다, 맞아. 내 이름이 이추였지.”
곧바로 그렇게 대꾸한 귀쌍겸왕 이추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아이야, 고마움의 표시로 이 어르신이 너는 죽이지 않으마. 바로 끝낼 테니까, 그러고 나면 이 어르신의 어깨나 좀 주물러다오.”
그 말에 한설연이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한설연을 바라보던 이추가 이번에는 단유소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네놈이 바로 무림맹의 개로구나.”
이추는 여유가 넘쳐 보였다.
그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결코 서두르려 하지도 않았다.
하긴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공동파가 이렇게 되었다는 건 이 인근을 저들이 모두 장악했다는 뜻일 테니까. 어차피 이곳에 단유소와 한설연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렇기에 한설연은 너무 무서웠다.
여태껏 몇 번이나 충격적인 일들을 겪었고 무서운 상황도 겪었다. 하지만 수백 명의 흑의인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보다, 홍의 청년과 갈의 무복인들을 만났을 때보다, 이추라는 한 사람을 만난 게 더 무서웠다.
그가 얼마나 강하고 무섭고 잔인한 사람인지, 문서들을 통해서나마 확인했기 때문이다.
물론 단유소가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라는 건 직접 보고 겪었기에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전대 고수인 이추와도 평수를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단유소는 자신을 보호하며 싸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운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무조건 단유소가 불리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유소를 도울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어차피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할 수 있는 수준의 싸움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단유소는 자신이라는 짐을 안고 도망쳐야 하는데, 이추라는 고수 앞에서 그게 쉬울 리 없다. 게다가 이추와 단유소 간의 간격도 너무 가까웠다. 얼마 가지 않아 따라잡힐 것이다.
‘어찌해야…….’
한설연이 속으로 그런 염려를 하고 있을 때 단유소가 이추에게 대꾸했다.
“어르신, 공동파는…… 전멸한 겁니까?”
매우 공손한 어조.
그러자 이추가 웃었다.
“키히힛! 그 잘난 무림맹의 개치고는 어른 대할 줄을 아는 놈이로구나. 뭐, 어차피 벌어진 일이니 말해줘도 큰 상관은 없겠지. 한 삼분지 일이나 사분지 일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생존자들은 그럼…….”
“여기에서 살아남아서 어디로 갔을지는 빤하지 않느냐?”
“아, 사천이겠군요.”
“그렇지. 뭐, 어차피 그곳도 조만간…….”
편안한 표정으로 거기까지 말하던 이추가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참고할 만한 정보는 되었다.
이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 정도 안다고 해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네놈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말이다.”
그러자 이추를 바라보던 단유소가 표정을 싹 바꾸더니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 당신은 어디의 개요?”
이추가 고개를 갸웃했다.
단유소가 돌변한 태도를 보이니 순간적으로 잘못 들었나 싶은 것이다.
그러더니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헐! 헐헐헐!”
한설연도 놀랐다.
백도의 전대 고수도 아니고 사파의 전대 고수 앞에서 단유소가 왜 그렇게까지 공손한 모습을 보이는지 의아하긴 했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정보를 알아내자마자 이렇듯 갑자기 태도를 바꿀 줄이야.
이추가 말했다.
“키히힛! 네놈이 내게 엿을 먹이는구나. 어쨌거나 격장지계를 쓰려는 모양인데, 실패했다. 이 어르신의 나이쯤 되면 말이다, 화가 나야 할 상황에서도 어지간해서는 그러지 않게 된단 말이지.”
“그러니 당신이 어디의 개인지나 한번 시원하게 밝혀보시오. 그 나이쯤 되셨으니 곧 죽어서 뼈와 살만 남게 될 육신일 텐데, 무덤으로 들어가기 전에 내 궁금증이라도 풀어주는 게 더 의미 있지 않겠소? 자, 나는 무림맹주 백리우의 개. 당신은 어디의 누구의 개?”
이추의 주름진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가 등장하면서 했던 말을 단유소가 그대로 되돌려준 꼴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이추를 바라보던 단유소가 다시 물었다.
“늙은 개가 무엇이 두려워서 주인도 못 밝히실꼬? 설마 밝히면 솥에 삶는다고 하더이까? 당신의 주인이? 그래서 깨갱 하고 있는 거요?”
이추의 얼굴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의 모습을 주시하던 단유소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화나신 것 같소. 누가 봐도 화나신 표정이오. 그럴 거면 화가 잘 안 난다는 둥, 격장지계가 통하지 않는다는 둥의 소리는 왜 하셨소. 그 나이쯤 돼도 화날 일은 다 화가 나는 모양인데.”
그러자 이추가 두 자루의 낫을 양손에 나눠 들며 말했다.
“이 어르신의 앞에서 네놈처럼 건방을 떤 놈은 한 삼십 년 만에 처음인 것 같구나. 젊은 네놈의 실력이 제법이라는 소리는 들었다. 그 어쭙잖은 실력 믿고 까부는 모양인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이추의 눈에 잔혹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그가 말을 씹어 내듯 뱉었다.
“내, 네놈의 심장을 씹어 먹을 것이다.”
이추가 그렇게 말하며 낫을 꽉 움켜쥐었을 때였다.
단유소가 두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삐이― 삐이이이이―
그의 입에서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길게 이어진 순간.
끼이이― 끼이이이―
갑자기 어둠 속 먼 허공에서 그런 소리가 나더니, 시커먼 뭔가가 세 사람 쪽으로 빠르게 하강하는 것이 아닌가?
한설연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게 무엇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청비, 설화.’
두 마리의 매일 것이다.
이추가 뒤쪽의 허공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을 때였다.
단유소가 왼팔로 한설연의 엉덩이 아래쪽을 빠르게 감싸 안더니 그대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의외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설마 단유소가 이 상황에서 삼십육계를 쓸 줄이야.
하지만 한설연은 어느새 단유소의 뒷목덜미를 꽉 붙잡고 있었다. 꽉 붙드는 게 돕는 길이라는 그의 말을 기억하니까.
평지를 몇 걸음 달리던 단유소가 비탈로 뛰어내렸을 때였다.
“이노오오옴!”
허를 찔린 이추가 분노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치며 무서운 속도로 추격해왔다.
그 즈음 단유소가 또다시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삐익― 삑―
한설연은 이번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청비와 설화를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녀석들은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있을 것이다.
가볍게 도약하여 비탈을 내려가는 단유소의 속도도 상상 이상으로 빨랐지만 역시 이추는 이추였다.
그는 단유소와의 거리를 무섭게 좁혀오고 있었다.
특히, 안긴 자세 때문에 후방을 볼 수밖에 없는 한설연에게는 이추의 모습이 더욱 확실하게 보였다.
다가오는 이추의 표정이 너무도 무서웠다.
하지만 한설연은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억지로 참았다.
혹시라도 이추가 공격해오면 바로 단유소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라도 돕고 싶어서였다.
[듣기만 해. 곧 평지에 다다를 거야.]
불현듯 들려온 단유소의 전음에 한설연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당신을 밀쳐낼 테니 곧바로 전방으로 달려. 아까 가봤던 문주의 처소 쪽으로.]
‘아! 그래서……!’
어차피 이추에게 곧 따라잡힐 것이고 결국 그를 상대하긴 해야 할 텐데도 단유소가 왜 도주하는 건지 내내 의아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해가 갔다.
아까 생존자 확인차, 직접 가봤기에 안다.
공동파 문주의 처소는 또 다른 봉우리 위에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게 솟은, 좁은 바위 봉우리였다. 만약 구름이 일정한 높이까지만 깔리면 문주의 처소만 작은 섬처럼 보일 것 같은 장소였다.
그 봉우리는 이쪽 절벽과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 아래는 깊은 낭떠러지였다. 누구라도 떨어지면 절대 무사할 수 없는 높이였다.
다리는 나무로 만든 다리였는데 길이도 제법 길었다. 아무리 경공이 뛰어난 고수라도 서너 번은 도약해야만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단유소는 그곳을 이용하려는 것이다.
그곳이라면 자신을 지키기에 훨씬 용이할 테니까.
기운을 날려 충분히 단유소를 타격할 수 있을 정도의 간격 안에 들어왔음에도 이추는 섣불리 기운을 날릴 수가 없었다.
비탈을 내려가는 단유소가 정석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나무나 바위 등의 장애물을 충분히 이용하며 도주했고, 도약을 해도 낮고 짧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진기를 날려도 적중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비탈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저 아래로 평지가 보이면서 경사가 완만해지자마자, 이추가 허공에 대고 낫을 휘둘렀다.
“와요!”
한설연이 낮게 외치자 단유소도 낮게 외치며 대꾸했다.
“가!”
동시에 단유소가 한설연을 전방으로 밀쳤다.
허공을 날아가는 한설연이 균형을 잡으려 공중제비를 돌 때쯤, 단유소는 신형을 뒤로 비틀었다.
붉은색 기운을 띤 낫 모양의 진기가 팽그르르 회전하며 단유소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단유소가 들고 있던 검을 사선으로 세워 그 기운을 막아갔다.
콰앙!
폭음이 들린 순간 단유소의 신형이 경사의 아래쪽으로 튕겨 나갔다. 허공을 빠르게 날아가는 와중에도 단유소가 몸을 비틀며 균형을 잡았다.
상대가 날린 기운의 반탄력을 이용하여 추진력을 얻는 특유의 임기응변을 다시금 발휘한 것이다.
탓!
바닥을 딛자마자 단유소도 한설연이 달리는 방향으로 빠르게 경공을 펼쳤다.
이추가 매섭게 그 뒤를 쫓았다.
단유소가 경공을 펼치는 와중에도 뒤쪽으로 계속해서 날카로운 기운을 날렸다. 이추를 견제하여 그의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다. 몸이 자유로운 상황인지라 견제도 효과적이었다.
이추의 입장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공격들이 아니었다. 어린놈의 실력이 만만치가 않았다.
결국 이추도 쉽게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잠시 후, 한설연은 문주의 처소로 향하는 다리 위에 서 있었다.
그 다리의 입구를 단유소가 막고 서 있었다.
단유소의 정면에 이추가 있었다.
약 열 걸음 거리였다.
말없이 단유소를 쏘아보던 이추가 입을 열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그러자 단유소가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 혼자만 투입되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소. 기척은 파악이 안 되지만 누군가가 더 있을 것 같았지. 경공을 펼치면서 따라오는 기척을 살펴보니, 과연 한 사람이 더 있더구려. 그가 약간 떨어져 있어서 그나마 우리에겐 다행이었지만.”
이추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의 눈동자가 놀람을 담고 있었다.
한설연도 마찬가지였다.
도주했던 이유가 이 지형을 이용하려는 속셈인 줄만 알았는데, 숨어 있는 상대를 파악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니.
정말이지 알면 알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단유소라는 사람은.
“쥐새끼 같은 놈인 줄로만 알았더니……, 제법 대가리도 굴릴 줄 아는 구나. 허나, 겨우 나무다리 위에 대피시켰다고 해서 저 아이가 안전할 성싶으냐?”
그러자 단유소가 코웃음을 쳤다.
“훗! 그럼 끊으시던가. 내가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천하제일미가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은 낙사밖에 없어 보이거든. 적어도 추잡한 자들에게 능욕당하다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