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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33화 (33/200)

33화. 공동파 (2)

“강호가 평화로운 시기는 언제나 암중 세력이 일을 꾸미는 시기라고 했지? 말 한번 잘했어. 그 안에 답은 다 있거든.”

“그러니까, 선문답은 그만하고 그 답이나 말해보시라고요.”

“당신이 암중 세력이라고 쳐. 강호가 평화로운 시기에 몰래 열심히 힘을 모았어. 그런데 아무리 암중으로 힘을 모아도, 본인들의 그 순순한 힘만으로 현 강호의 질서와 역학 구도를 바꿀 수 있을까? 그게 쉽게 될까?”

그러자 한설연의 양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그녀가 심각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설마…….”

“내가 그들이라면 절대 그렇게 안 해. 스스로의 힘을 키우는 것과는 별개로 포섭이나 이간질, 협잡 등의 외부 공작도 함께 하겠지. 그 편이 현재의 질서를 깨기도, 역학 구도를 바꾸기도 훨씬 쉽거든. 안 그래?”

그러자 한설연이 놀란 눈으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지금 단 공자님의 말씀은……, 백도의 구성원들 중에서도 그들에게 포섭된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무림맹이 강호의 패권을 잡고 있고, 그 구심점인 맹주님에 의해 지금의 질서가 유지되어 왔어. 그러나 당신도 알다시피 그 안의 문파나 조직 그리고 구성원들 모두가 지금의 질서에 만족하고 있을까? 무림맹이 내세우는 기치처럼 한마음 한뜻일까? 나름의 불만이 하나도 없을까?”

단유소가 바로 말을 이었다.

“결코 그럴 리 없지. 이 순간에도 서로간의 알력 다툼이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을 거야. 거대한 조직인 무림맹은 연합, 연맹의 개념이니까.”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적의 세력이 거대할 것이라는 당신의 말, 나도 십분 공감해. 그런데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자들이 아무나 포섭할까? 적어도 내 상식엔 그들이 잔챙이들이나 포섭했을 것 같지가 않거든. 물론 당장 공동파가 포섭당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아.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가정하에 움직여야 하지 않겠어?”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적이 위험한 자들이며 그 세력이 거대할 것이라는 추측만 했을 뿐.

한설연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혼란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많은 이들이 질서를 원하지. 반대로 질서가 오랫동안 유지되면 여기저기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법이야. 지금의 질서에 만족하지 못하는 거지. 욕망을 드러내고 싶은 거야. 밤이 길면 꿈도 길어진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거든.”

그의 말이 백번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거대한 적 세력의 출현만을 가지고도 판을 이 정도까지 깊게 보고 있는 단유소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 공자님이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칭찬을 하든지 놀리든지 둘 중 하나만 해.”

“칭찬이에요, 분명히. 단 공자님을 다시 보게 된 계기니까.”

그러자 단유소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기에는 이 강호가 내게 이면의 진실들을 너무 많이 가르쳐줬거든.”

그 말을 끝으로 단유소가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산중의 대로를 따라 전진하던 단유소가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한설연도 곧바로 속도를 줄이며 물었다.

“왜 그래요?”

“이상해. 원래 이쯤이면 몰래 우리를 주시하는 공동파 측의 움직임이 있어야 해. 예전에도 밤중에 공동파에 온 적이 있어서 알거든.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가 않아.”

공동파만 한 거대 문파는 아니지만 현월곡도 그랬다. 특히 현월곡의 정문으로 이르는 길에는 항시 정찰조가 몸을 숨긴 채로 대기하고 있다. 방문객의 정체나 규모 등을 미리 파악하여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된 걸까요?”

“아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겠어. 더 이상 편한 길로는 못 간다는 거.”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근처의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한동안 숲속을 달렸다.

한 식경(약 30분)쯤 달렸을까.

단유소가 또다시 걸음을 멈추더니 주변의 땅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설연도 그의 시선을 따라 땅바닥을 훑었다.

그러던 그녀가 한순간 놀란 음성으로 낮게 말했다.

“이, 이거 핏자국 아니에요? 어? 여기도! 또 여기도!”

핏자국이 군데군데 많았다. 핏물이 고여서 생긴 핏자국들이었다. 시체는 남아 있지 않았지만 최소 예닐곱 명 이상의 핏자국임을 알 수 있었다.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말라붙은 정도를 보니 최소 사나흘 전의 혈흔으로 보이는군. 그보다 더 되었을 수도 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나흘 전후라고 해도 최근인데, 그것도 공동파가 지척인 이곳에서…….”

단유소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의 눈빛은 여전히 심각했다.

“일단 최대한 조심하면서 더 올라가 보는 수밖에.”

말을 마친 단유소가 다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만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그는 천천히 경공을 펼쳤다.

산을 오르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이전과 같은 혈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현장이 계속해서 발견될수록 단유소의 표정도 더욱 심각해져 갔다.

우회하여 산을 오르던 단유소가 이윽고 숲 속 한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턱짓으로 전방을 가리키자 한설연이 안력을 돋우며 그곳을 확인했다.

곧 그녀의 눈동자가 커져 갔다.

“설마 저곳이……, 공동파의 정문이에요?”

그녀가 속삭이며 묻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아무도 없죠?”

정문뿐만 아니라 그 너머에서도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단유소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라고 해서 알 리가 없는 일이었다.

“가서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겠어. 대신, 은밀하게.”

단유소의 말에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숲을 따라 정문의 옆으로 이동했다.

역시나 담 안쪽으로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담 너머로 제법 커다란 건물을 발견했을 때 단유소가 한설연을 향해 턱짓했다.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담을 뛰어넘어 사뿐히 착지했다.

그늘진 어둠 속에 숨어 안을 살피던 두 사람의 눈동자가 이윽고 급격하게 커졌다.

“이건……!”

한설연이 저도 모르게 낮게 외쳤다.

두 사람의 눈앞에 드러난 건 검붉은 대지였다.

일전에 한 번 겪었던, 적의 시체들이 폭발하면서 퍼진 독에 의해 죽어버린 땅.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고 믿기 싫은 광경이었다.

강호 십대 문파라는 그 거대한 공동파가 이렇듯 초토화되다니.

잠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한설연이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 올라오면서 본 혈흔들을 보면서 설마 했는데 공동파가 당했을 줄은…….”

“적이 이 수법을 썼다면……, 그럴 만도 하지.”

단유소의 대꾸에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처치했다고 생각했던 시체들이 터질 것이라는 생각을 누가 했겠는가 말이다.

그때 단유소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자신들도 똑같은 수법에 당했을 것이다. 물론 최초로 위험을 알린 사람이 최익이 아니라 단유소였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이제 어떻게 할까요?”

한설연의 물음에 단유소가 고개를 저었다.

그도 모르겠다는 뜻.

그러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한설연이 말했다.

“이곳을 좀 더 둘러보는 게 어떨까요? 적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정보 같은 게 남아 있을 수도 있고 또 생존자가 있을 수도…….”

단유소가 조용히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공동파로 올 것이라는 점을 적들도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위험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다가 위험해질 수도 있어.”

“하지만 잠시만이라도…….”

한설연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혹시 모를 현월곡의 생존자들이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단유소의 입장에서도 무림맹 측에 보고할 최소한의 내용들이 필요하기도 했다.

한설연의 눈동자를 응시하던 단유소가 말했다.

“잠시. 아주 잠시야. 확인된 후에는 바로 떠나야 해.”

“네!”

두 사람은 그늘진 어둠 속으로만 은밀하게 이동하며 경내를 살폈다.

여기저기 파손된 건물들만 있고 살아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을씨년스러웠고, 불어오는 바람도 괜히 스산하게 느껴졌다.

기억을 더듬어 문주의 거처에까지 가봤지만 그곳 또한 다른 곳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두 사람이 산 위로 올랐다.

공동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동굴이 많다. 그런 이유로 예로부터 도인들이 많이 머물기 시작하면서 점점 하나의 문파가 된 곳이 바로 공동파였다.

그런 이유로 공동파의 문도들은 산 위의 동굴에서 수련하는 전통이 남아 있었다. 혹시 그곳에는 생존자가 있지 않을까 하여 산 위쪽으로 향한 것이다.

모든 동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군데군데 확인을 해본 결과, 그곳에도 생존자는 없었다.

희한한 건, 혈흔은 남아 있으되 시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경내를 돌아볼 때에도 그랬는데 동굴을 돌아보는 지금도 그랬다.

물론 독에 닿은 시체가 흔적도 안 남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독에 당하지 않은 곳에도 혈흔은 있되 시체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동굴에서 나와, 달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 몸을 숨긴 후 단유소가 말했다.

“안타깝지만 아무도…… 없어.”

한설연이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월곡의 식구들 중에 혹시라도 생존자가 도착해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가 무너진 탓이다.

단유소가 말없이 침묵을 지키며 그녀에게 시간을 주었다.

여태껏 충분히 힘들었을 텐데도 한설연이 계속해서 밝은 모습을 유지하려 애썼던 이유를 단유소는 잘 알고 있었다. 헤어졌던 곡의 식구들 중 누가 되었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텨온 것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상심이 오죽할까.

단유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허공을 보며 숨을 길게 내쉰 한설연이 말했다.

“그들이 시체조차 한 구도 남기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마음을 다잡은 표정과 어조였다.

단유소로서는 그게 의외긴 했다. 이렇게 빨리 마음을 추스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당신도 예상하고 있고 나도 예상하는 바로 그 이유겠지.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자들이니까.”

“강시대법…….”

강시대법을 쓰는 순간 무림공적이 된다. 그게 알려지면 관에서까지 개입하게 되어 있기에, 이제는 천마신교에서조차 강시대법을 쓰지 않는다.

만약 적들이 강시대법을 쓸 계획으로 시체들을 가져갔다면 그들은 작정하고 무림공적으로 몰릴 각오를 했다는 뜻이다. 금군의 표적이 될 각오도 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거칠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니 죽은 자들에게는 무슨 짓을 못 할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한설연이 중얼거리듯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키히히힛! 어차피 죽어서 뼈와 살만 남은 육신,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의미 있는 일이라도 하면 더 낫지 않겠느냐?”

두 사람의 위쪽에서 난데없이 한 줄기의 음성이 들려왔다.

단유소의 고개가 빠르게 위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시에 한 팔로 한설연을 보호하며 그녀를 자신의 등 뒤에 위치하게 했다.

자신이 있는 곳의 바로 옆에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잎이 무성한 그 나무의 가지 위에 하나의 인영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등 뒤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작정하고 은신한 고수의 기척까지 잡아내긴 어려웠다. 하지만 수많은 강호 경험을 돌아봐도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런 고수를 만난 것이다. 바로 지금.

그 인영이 땅바닥으로 착지했다.

“웃차!”

착지하는 소리 자체는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과장된 기합 비슷한 소리가 훨씬 크게 들렸다.

그는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었다.

앞머리와 윗머리가 완전히 벗겨진 채 옆쪽과 뒤쪽에만 하얀 머리카락이 남아 있었는데, 많지 않은 그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다.

이목을 끈 것은 그가 들고 있는 무기였다. 그는 한 손에 두 자루의 낫을 든 채였는데, 달빛에 비친 날이 섬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키히힛! 반갑구나. 둘 다.”

단유소 쪽을 바라보던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빠진 이 때문인지 그 미소가 괴기스러워 보였다.

그러자 단유소의 뒤에서 한설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귀쌍겸왕(鬼雙鎌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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