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공동파 (1)
저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까지 지으니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속내를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러네.”
단유소가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그렇게 말하자 한설연이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문제는 그 모습마저도 아름답다는 점이지만.
“에게? 반응이 겨우 그 정도예요? 이래봬도 나름 천하제일미 소리 듣는 얼굴이라고요.”
“그래서, 천하제일미께서 친히 얼굴까지 보여주시니 성은이 망극하다고 해줘야 하나?”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얼른 인피면구나 써.”
그러자 한설연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씻고 나서 바로 쓰면 피부에 안 좋으니까 벗고 있는 것뿐이라고요. 흥! 안 그래도 조금 있으면 쓸 거예요.”
단유소가 대꾸도 안 하고 앞장서서 걸었다.
한설연이 뒤따라오며 물었다.
“단 공자님도 면구 쓰고 있죠?”
이번에도 단유소가 대꾸하지 않자 한설연이 말했다.
“뭐, 기밀 때문에라도 쓰고 있겠죠, 당연히. 암튼 그거, 씻은 후에 바로 쓰면 피부에 좋지 않아요. 얼굴 완전히 건조시키고 써야 한다고요.”
“내 피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 피부나 열심히 가꿔.”
“모르는 말씀 하시네. 요즘은 젊은 남자들도 다들 관리한다고요. 여자들도 동안인 남자 좋아하고.”
역시 단유소에게서 대꾸가 없자 한설연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면구 벗은 모습 한 번만 보여주면 안 돼요? 단 공자님 원래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데.”
“꿈도 꾸지 마. 그리고 내가 그럴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거, 이제는 당신도 잘 알지 않나?”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우린 곧 헤어질 텐데. 그 후로 단 공자님은 다른 용모와 이름으로 살아갈 거고. 그러니 내가 단 공자님의 본모습을 안다 해도 바뀌는 건 없지 않겠어요?”
“일없어.”
“치! 나는 보여줬는데, 치사하게.”
그러자 단유소가 코웃음을 쳤다.
“피부 관리 차원에서 어쩔 수 없었다며? 그리고 누가 보여달랬나?”
“치.”
단유소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걸음을 빨리 걷기 시작했다. 한설연이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가, 같이 가요!”
* * *
동이 터오는 시각.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던 단유소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잠결이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눈을 부스스 뜨며 주변의 상황을 인지하던 그가 흠칫하며 몸을 한 차례 크게 떨었다.
“헙!”
어찌나 놀랐던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외침이 흘러나왔다.
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한설연이 자신의 옆에 딱 붙어서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붙어 있던 단유소의 몸이 크게 떨린 데다가 그가 놀라서 소리까지 냈기 때문인지, 그 즈음 한설연도 눈을 뜨고 있었다.
“으음…….”
잠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돌리던 그녀의 눈과 단유소의 눈이 마주쳤다.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눈을 빠르게 몇 차례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단유소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설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이, 이이이……! 음적(淫敵)!”
휙―
동시에 그녀의 손바닥이 단유소의 볼을 향해 날아갔다.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단유소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턱!
단유소에게 팔목이 잡힌 상태에서 한설연이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이잇! 이이잇! 안 놔요? 뭘 잘했다고!”
“정황을 보아하니 일단 내 잘못은 아닌 것 같아서.”
“뭐요?”
“봐. 여긴 내 자리라고.”
그러자 한설연이 고개를 돌려 위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은 원래 단유소의 잠자리였다.
두 사람이 눈동자가 마주쳤다.
한설연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데 반해, 단유소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로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여전히 한설연의 팔목을 붙든 채로 단유소가 물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지?”
“그, 그게…….”
“방금 당신 하는 거 보니까 잘못한 사람이 따귀 맞는 분위기던데. 맞아?”
“아,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러자 단유소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적이라고 했겠다?”
“헤헤. 단 공자님. 일단 이건 놓고 얘기하시는 게 어때요?”
한설연이 짐짓 애교를 부리듯 그렇게 말하자 단유소가 고개를 저었다.
“교태는 나중에 당신이 좋아한다는 사람 앞에서나 부려. 나한텐 안 통하니까. 그리고 이 팔은 쉽게 못 놔주지. 까딱하다가 꼭두새벽부터 부당하게 귀싸대기 맞을 뻔했는데. 게다가 이미 억울하게 음적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태어나서 그렇게 상스러운 소리를 듣기는 오늘이 처음이라.”
“헤헤. 그건 그러니까 저도 모르게…….”
그러자 단유소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적 대신 여자한테 쓸 수 있는 비슷한 표현은 뭐가 있을까나? 그래! 색녀! 이 정도면 적당하겠군.”
그러자 한설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새, 새, 색녀라니……. 어찌 그리 천박한……!”
“음적은 뭐 고급스럽고? 가뜩이나 당신과 다르게 나는 잘못도 없이 그런 소릴 들었는데?”
한설연으로서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단유소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슬슬 출발하실까? 색녀님?”
그 말을 끝내며 단유소가 한설연의 손목을 놓았다.
“사, 사과할 테니까 그 천박한 표현만은 제발…….”
“우리 색녀님 하는 거 봐서.”
* * *
공동산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단유소는 결코 서두르거나 무리하지 않았다. 여태껏 해왔던 대로 최대한 조심하며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만 이동했다.
그러는 와중에 휴식 시간도 넉넉하게 가졌다. 이동하는 중간에도 그랬을 뿐만 아니라, 어제 저녁에는 해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야영지를 잡고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그는 휴식을 취할 때마다 운기조식을 하며 축기를 했다. 한설연에게도 그러게 했다.
그런 식으로 이동하던 두 사람이 공동산 인근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산자락을 따라 경공을 펼치던 단유소가 적당한 공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좀 쉬지.”
한설연도 걸음을 멈추고 물을 두어 모금 들이켰다. 그 후에 단유소에게 물었다.
“늦어도 오늘 밤 안에는 도착한다더니, 아직인가요?”
그러자 단유소가 어느새 육포를 꺼내어 질겅질겅 씹으며 대꾸했다.
“이제 다 왔어. 저 앞에 보이는 골짜기를 넘어서 조금만 더 가면 산 위로 향하는 넓은 길이 나올 거야. 그 길을 따라가면 공동파지.”
“아아! 드디어……!”
한설연이 탄성을 내뱉었다.
일행이 처음 습격을 당한 이후로 그렇게도 오고 싶던 공동파였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이렇듯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니 감격에 겨운 것이다.
“얼마나 걸리나요?”
“글쎄. 우리가 경공을 펼치는 속도면 한 시진도 안 걸릴 정도?”
그러자 한설연이 밝아진 안색으로 말했다.
“그럼 쉬지 말고 어서 가요. 지금 나 하나도 안 피곤해요. 이왕 쉴 거면 공동파에 가서 쉬어도 되잖아요?”
그 말에 단유소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눈빛으로 한설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시금 육포를 씹으며 대꾸했다.
“안 돼. 여기에서 최소한 한 시진은 머물 거야. 식사도 하면서.”
한설연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곡의 식구들 중 누군가가 공동파에 이미 도착해 있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천천히 왔으니까 분명히 누군가는 도착해 있을 거예요.”
기대감과 조바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단유소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의 반응을 보며 한설연이 아미를 찡그렸다.
“대체 왜 이렇게 느긋한 거예요? 곡의 식구들 중에 생존자가 있는지도 확인하고 싶고 얼른 가서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도 하고 싶단 말이에요. 따뜻한 물에 씻고 잠도 제대로 자고 싶고요.”
“도사들이 먹는 밥, 그다지 맛있지 않아. 공동파의 도사들이라고 다르진 않을 거고.”
“맛없어도 돼요. 질리도록 먹었던 육포와 건량만 아니면 뭐라도 상관없어요. 그러니 그만 늑장 부리고 얼른 가요. 네?”
한설연이 계속 보챘지만 단유소는 여전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한 소저.”
단유소가 목소리를 깔며 그렇게 말하자 한설연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말을 놓은 후로 그가 소저라는 호칭을 쓴 건 처음이었다.
“당신의 심정은 이해해.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나는 나대로 준비가 필요해. 지금까지는 숨어서 이동하느라 큰 상관이 없었지만 우리는 이제 드러나게 돼. 그러려면 최소한의 준비가 필요해.”
“최소한의 준비라니요?”
“뭐겠어? 당신과 나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지.”
그러자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공동파는 무림맹의 한축인 데다가 우리의 동도인데, 우리를 보호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나요?”
그 말에 단유소가 또다시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한설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질구레한 설명은 다 빼고 그냥 쉽게 얘기하지. 공동파든 화산파든 소림사든 상관없어.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할 뿐이야. 어떤 경우든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대비하는 게 내 역할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 시진 정도의 준비 시간이 꼭 필요해.”
단유소가 그렇게 말하더니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런 단유소를 바라보는 한설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공동파에 가는데도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고 대비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솔직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무림맹의 큰 축 중 하나인 공동파에 가는데 최악의 경우 같은 걸 왜 생각한단 말인가. 정파의 동도이자 동지인데.
하지만 그런 의문과는 별개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대비하는 그의 모습이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결국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고마웠다.
결국 한설연도 그의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로부터 한 시진 남짓이 흘렀을 때, 두 사람은 공동파로 향하는 널따란 산길로 접어들어 있었다. 나란히 걷기를 잠시, 단유소가 말했다.
“이제부터 달리지.”
“잠시만요. 잠시만 걸어요.”
“왜? 빨리 가고 싶다고 그렇게나 보챌 땐 언제고?”
“아까 단 공자님이 했던 얘기 중에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아까 단 공자님은 공동파든 어디든 상관없이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했어요. 그 전에 자질구레한 설명은 다 빼고 그냥 쉽게 얘기한다고도 했죠. 그 자질구레한 설명이 뭔지 궁금해요.”
그 말에 단유소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참 궁금한 것도 많아.”
“얘기나 해줘요.”
그러자 잠시 걸음을 옮기던 단유소가 물었다.
“우리가 상대했던 적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 말에 한설연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음……,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강호에 끼칠 파장은 매우 클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큰 환란이 닥칠 수도…….”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일이류고수 수백, 수천 명을 그냥 소모품으로 쓰는 자들이잖아요. 정신금제를 가하고 시체까지 터트리고. 그뿐만 아니라 절정 고수조차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강자들을 다수 보유한 세력이기도 하고요.”
한설연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드러난 게 그 정도면 드러나지 않은 부분은 훨씬 크다고 봐야겠죠. 누군지, 어떤 세력인지, 목적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로 거대한 세력이 강호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죠.”
“너무 앞서나간 거 아냐? 그저 그들이 당신 한 사람을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 수도 있잖아?”
“그런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들의 손속을 보니 나를 무조건 생포하려 한다는 느낌은 아니었거든요. 그렇다면 하나의 추측이 가능하죠. 그들이 노리는 건 나 자체가 아니라, 나의 희생이나 실종으로 인해 벌어질 어떤 후폭풍이 아닌가 하는.”
그러자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단유소가 손가락으로 한설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오.”
제법이라는 표정.
그러자 한설연이 단유소를 흘겨보며 대꾸했다.
“나, 천재는 아니지만 나름 배운 여자거든요?”
“푸하하!”
단유소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단유소를 향해 입술을 삐죽거리던 한설연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강호사를 돌이켜 보면 강호가 평화로운 시기는 언제나 암중 세력이 일을 꾸미는 시기였어요. 그리고 그들도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있으니 발톱을 드러냈을 테죠. 우리가 겪고 본 모든 것들도 결국 그들이 준비한 것의 일부에 불과할 거예요.”
단유소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향해 한설연이 물었다.
“답이 되었다면 이제 얘기해주시죠? 아까 말했던 그 자질구레한 설명이라는 게 뭔지. 왜 공동파로 가면서도 그렇게까지 조심하려는 건지.”
그러자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