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31화 (31/200)

31화. 그녀와의 재회 (4)

한설연을 바라보는 단유소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찰나였지만 단유소의 눈빛을 확인한 한설연의 눈동자에 이채가 담겼다. 단유소의 반응을 통해 자신의 추측이 확실해졌음을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한설연이 알아챘다는 사실을 단유소도 느끼고 있었다.

이미 감추는 게 무의미해진 상황.

단유소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 공자님은 초절정 고수예요. 물속에서 이기어검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했어요. 그리고 백도에 알려진 초절정 고수는 열 명이 안 되죠.”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그 정도로 대단한 고수가 겨우 의천각의 비밀감찰단원이라고요? 나라면 절대 인재를 그렇게는 안 써요. 맹주님과 문상이시라면 더더욱 그럴 리가 없죠. 아마도 그 또한 위장 신분에 불과할 거예요.”

단유소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결국 그런 대단한 고수를 담을 수 있는 조직은 무림맹 내에 신룡대밖에 없어요. 무림맹주 직속인 데다가 모든 게 기밀인 곳이니 모든 조건이 충족되기도 하죠. 단 공자님과 같은 걸출한 고수라면 그 안에서도 지휘관급일 가능성이 높을 거고요.”

솔직히 어제 너무 많은 걸 보여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은, 단유소로서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역시 한설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리했다.

“그렇다면 내가 당신의 질문에 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겠군?”

단유소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입으로 직접 신룡대라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한설연의 말을 인정한 셈이었다. 어차피 부정해봐야 소용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유소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 우리는 이런 대화 자체를 나눈 적이 아예 없는 거야. 알겠지?”

“규정 때문이군요. 신룡대의 기밀 엄수 규정이 엄격하다는 소문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두 사람이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단유소가 말했다.

“출발하지.”

그 말에 한설연이 앉아 있던 바위에서 일어났다.

단유소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때 그의 뒤를 따르며 한설연이 말했다.

“기밀, 누설하지 않을게요.”

그러자 단유소가 돌아서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당신.”

“푸훗.”

몇 걸음 더 걷다가 한설연이 장난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시원하게 밝혀봐요. 무슨 용(龍)인지. 청적황백묵 중에 뭐예요?”

그러자 단유소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황당했다. 아예 대놓고 물어보다니.

그러자 한설연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나는 단 공자님이 말 놓은 걸로 트집 안 잡았잖아요.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죠.”

“그건 주선연 당시에 내가 입었던 상처에 대한 보상 개념이라고 이미 말했을 텐데?”

“에이 그러지 말고 말해줘요. 정말 안 퍼트린다니까요? 아까 나 믿는다고 했잖아요.”

“풋! 당신을 믿는다는 게 아니고, 아까 당신이 했던 그 말만 믿는다는 거였지, 아마?”

“쳇!”

한설연의 반응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단유소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말 놓는 게 억울하면 당신도 놓던가.”

“오호! 그래도 돼요? 괜히 밉보이면 곤란할 것 같아서 말도 못 꺼내고 있었는데.”

“아주 기다렸다는 듯 반응하는군.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도 안 할래요. 단 공자님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내 생명의 은인인 데다가 현월곡의 은인이시기도 한데. 이번 일이 무사히 정리되면 나중에 단 공자님을 현월곡으로 초대해서…….”

그러자 걸음을 옮기던 단유소가 다시 한설연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

“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공동파에 도착해서 당신의 신변이 안전해지면 내 임무도 끝. 그 이후로는 당신과 내가 만날 일이 더 이상 없을 거야.”

그 말에 한설연의 눈동자가 커졌다.

단유소의 표정이나 어조 모두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지만 그가 한 말의 내용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이다.

맞다. 그는 신룡대다.

모든 게 기밀인 조직에 속한 사람이다.

그래서 늘 이중 삼중의 위장 신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름, 얼굴, 소속 등 모든 것을 바꿔가며.

그러니 이번 임무가 끝나면 그는 또 다른 위장 신분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신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그게 당연한 수순이다.

멍하니 단유소의 등을 보며 걷던 한설연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단 공자님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이삼 일 정도인가요?”

“속이 다 시원하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상태에서 단유소가 농담조로 대꾸했다. 하지만 한설연은 웃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조용한 목소리로 다시 물을 뿐이었다.

“따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거나 해도 방법이 없는 거겠죠?”

“공식적으로 맹주님께 고마움을 표하면 되겠지.”

잠시 말없이 걷던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그 후로는 단 공자님을 찾고자 해도 찾을 수 없게 되겠군요. 그쯤이면 단 공자님은 다른 인물이 되어 있을 테니까. 이름도. 얼굴도. 다른 모든 것들도.”

“아마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크지.”

단유소의 대꾸를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두 사람 다,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한설연의 표정은 살짝 어두웠다.

‘이제야 오해도 풀고 서로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쉬움이 생각보다 훨씬 크게 다가왔다. 아마도 근래 그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릴 거야. 준비해.”

잠시 후 단유소가 경공을 펼치기 시작하자 한설연이 멍한 상태에서도 습관적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깔린 시각.

단유소와 한설연은 이미 야영지 물색을 마친 후였다.

야영지를 잡자 한설연이 먼저 털썩 주저앉았다. 오후 내내 계속해서 경공을 펼쳤기에 고단했던 것이다.

단유소도 털썩 주저앉았다. 그 또한 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특히 어제의 일로 체력이며 진기며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소모했던 게 컸다.

그 상태로 약 일각 정도 흘렀을 때 한설연이 말했다.

“씻고 싶어요. 어제 젖은 몸으로 그냥 잔 데다가 오늘 경공을 펼치면서 땀도 좀 흘렸더니 끈적거려 죽겠어요. 옷도 물빨래라도 좀 해야 할 것 같고.”

그러자 단유소가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가서 씻든가. 이 아래 비탈길 약간만 내려가면 계곡 있던데.”

“단 공자님은 안 씻어요?”

“당신 갔다 오면 가지 뭐. 먼저 갔다 와.”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상태에서 한쪽 발을 까딱거리며 단유소가 그렇게 말했다.

그 후로 약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한설연이 움직이지 않자, 단유소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안 가? 끈적거려 죽겠다며?”

그러자 한설연이 봇짐을 품에 안은 상태로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어두워서 그런지 무서워서요. 씻고 있는데 호랑이라도 나오면 어떻게 해요.”

“푸하하하!”

고개를 젖히며 시원하게 웃어젖힌 단유소가 말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해줄까? 재수 없게 절정 고수와 마주친 그 호랑이 쪽을 걱정해주면 돼?”

“호, 호랑이 말고, 혹시라도 씻고 있을 때 적이 나타나면 어떡해요.”

그쯤 되자 단유소가 눈매를 찡그렸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함께 씻으러 갔다 와요.”

그 말에 단유소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양팔로 상체를 감싸고 몸을 웅크리며 외쳤다.

“싫어! 누굴 잡아먹으려고!”

한설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자, 자, 잡아먹다니,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멀리 떨어져서 씻자는 뜻이라고요! 아까 보니까 군데군데 큰 바위들도 있어서 서로 보일 일도 없고!”

그러나 단유소는 고개를 빠르게 저을 뿐이었다. 한설연이 즉시 말을 이었다.

“아니, 그리고 지금 그 반응 뭐예요? 보여도 내가 보여야 할 반응을 왜 단 공자님이…….”

그러자 단유소가 씩 웃으며 자세를 풀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장난 한번 쳐본 거야. 그러니까 씨알도 안 먹힐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갔다 와. 당신 먼저.”

그 말을 마친 단유소가 봇짐을 베며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 후로 약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설연 쪽에서 움직임이 없자, 단유소가 또다시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누운 상태에서 물었다.

“왜 그러는 거야, 진짜?”

한설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돌아누웠다.

기어들어 가는 듯한 한설연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공포증이…… 있어요.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에 대한……. 그래서 혼자 잘 땐……, 촛불도 안 끄고 자요. 하물며 낯선 어둠 속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누가 곁에 있거나 누군가가 지켜주고 있을 땐 괜찮은데, 꼭…….”

한설연이 일렁이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단유소가 살며시 고개를 돌려 보니 실제로 그녀의 눈동자 또한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결국 단유소가 봇짐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앉아 있던 한설연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녀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유소가 앞장서자 한설연이 뒤를 따랐다.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고마워요.”

“하여간 가지가지 한다니까.”

“헤헤.”

“호랑이 나타날까 무섭고, 적이 나타날까 무섭다고 해서 그보다 더 무서운 걸 끌어들이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네. 전혀.”

“예상했던 대답인데 듣기에 따라서 묘하게 상처가 되는 대답이기도 하군.”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잠시 걷다가 한설연이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단 공자님. 별 이상한 부탁까지 해서.”

“사람은 완벽할 수 없잖아. 누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고 강점이 있으면 약점도 있지. 마음에 드는 여인들 앞에서 긴장하는 것이 내 약점이라면, 이게 당신의 약점인 거지, 뭐.”

뒤따르던 한설연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돼요?”

“물어보지 마.”

하지만 한설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함께하면서 느낀 건데, 저한테 농담도 곧잘 하고 심지어는 장난도 치시더군요?”

“하지 말라니까, 꼭……!”

“한수련 앞에서는 그렇게 긴장하더니 한설연 앞에서는 긴장도 안 되는 거예요?”

그러자 잠시 묵묵히 걷던 단유소가 말했다.

“응, 전혀.”

“아아! 이런 거였구나! 예상했던 대답인데 듣기에 따라서 묘하게 상처가 되는 대답이라는 게.”

씻고 빨래까지 먼저 마친 단유소가 근처에서 한설연을 기다렸다.

약 일각쯤 지났을 때 한설연이 멀리에서 다가오며 말했다.

“아! 개운해.”

단유소가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어둠 속의 몇 장 밖 거리였지만, 이미 그 정도의 어둠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 그의 시야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한설연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단유소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 갔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저 얼굴이 바로 그녀의 본래 얼굴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태껏 수많은 임무들을 수행하며 강호의 미녀라고 소문난 여인들을 상당수 봐왔다. 실제로 그녀들을 보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한설연의 미모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들의 미모가 반딧불이라면 한설연의 미모는 달빛이었다.

그야말로 넋을 놓게 만드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이었다. 마력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일전에 한설연의 미모를 본 후에 멍하니 앉아 있던 오필의 심정이 충분히 납득되었다. 화무십일홍 얘기를 했을 때, 한설연의 아름다움을 모욕하는 건 결코 참을 수 없다고 말하던 그의 기분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괜히 천하제일미가 아니었다.

미모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한설연뿐일 것이다.

단유소가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평상시의 표정을 되찾았을 때쯤, 한설연이 곁으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그다지.”

단유소가 짧게 대꾸하자 한설연이 짐짓 귀여운 척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 어때요? 예쁘죠?”

그 말에 단유소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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