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그녀와의 재회 (3)
한설연이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키듯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거예요. 그때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던 건 사실이니까. 처음부터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면 금방 끝날 일이었는데.”
단유소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철이 없었어요. 내 입장에서만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말을 내뱉었었죠. 그게 미안했어요. 물론 이제 와서 이런 말하는 거, 단 공자님이 볼 때는 간사해 보일 거예요. 단 공자님이 대단한 고수라는 게 밝혀졌고, 지금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단 공자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일방적으로 내가 단 공자님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니까.”
단유소는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알아요. 누가 나더러 염치없는 년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죠. 그래도 단 공자님이 이 정도의 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는 무관하게, 솔직히 미안해했었어요. 믿고 말고는 단 공자님 마음이겠지만.”
단유소가 미소를 거두고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한설연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단유소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짐 챙겨. 갈 길이 멀어.”
“네.”
반사적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짐을 챙기던 한설연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근데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예요?”
단유소가 봇짐을 챙겨서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고.”
정작 질문에는 대답하지도 않은 채, 단유소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관목 숲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가, 같이 가요!”
이에 단유소가 멈춰서 고개를 돌리더니 대꾸했다.
“자세 낮춰. 목소리는 더 낮추고.”
한설연이 흠칫했다.
다시 돌아서서 걸어가는 단유소의 등에 대고 한설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치! 물어보는 거에는 하나도 대답 안 해주고.’
두 사람은 산길을 계속해서 걸었다. 목적지는 역시 공동파였다.
단유소가 경로를 잡는 방식은 여전했다. 약간 돌아가는 길이더라도 최대한 적의 시야에 잡히지 않을 곳으로만 이동했다.
출발한 후로 한 시진이 지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불편하잖아…….’
한설연의 입장에서는 아침에 그런 일도 있고 했으니 먼저 말을 걸기가 왠지 어색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이지만 자존심도 상했다.
엄밀히 따졌을 때 자신이 그에게 잘못한 건 주선연이 끝나고 헤어질 당시의 일뿐이었다. 그때도 처음에는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내려고 했었다. 실제로도 그랬었다. 그가 계속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일이 그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신에게도 귀책사유가 있는 거잖아!’
다만 의도치 않게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자신이 미안해야 할 입장이 되었고, 염치없는 처지가 된 것뿐이다.
‘흥! 그 상황이었으면 나뿐만 아니라 어떤 여자라도 그랬을 거라고! 그리고 그때 보여준 당신 모습 그대로라면 많은 여자들이 한심하고 답답하다고 했을 거고!’
그런데 마치 때는 이때라는 듯이, 약점이라도 잡은 양, 갑자기 그가 고자세로 나오니 약간의 억하심정도 들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저자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런단 말인가. 사람 서럽게.
안 그래도 근래에 겪은 일들이 충분히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는데. 버텨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중인데.
‘에휴. 그래도 참자. 내가 참아야지 뭐.’
불만은 있지만 그를 미워할 수 없는 건, 어제 그가 자신과 현월곡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이자 현월곡 전체의 은인이었다. 앞으로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단유소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 즈음이었다.
그가 앞을 보고 걸어가는 도중에 말했다.
“오늘 새벽이었어. 쭈그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당신을 옮겨 눕혔을 때.”
“네?”
“당신이 그때의 그 한수련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 말이야. 아까 물어봤잖아.”
“아아.”
“당신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전부터였어. 그리고 내 앞에서만 말을 안 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상하다는 생각도 했었고. 왜 그러는지 의아했었는데 오늘 새벽에 의문이 풀린 거지. 대답이 됐나?”
“네에.”
그렇게 대꾸한 한설연이 잠시 걸음을 옮기다가 입을 열었다.
“억지로 감추려던 건 아니었어요. 단지…….”
“당연히 감춰야지. 내가 한수련이었소, 하고 밝히는 게 더 이상한 거잖아.”
“그, 그건 그렇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단유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까 당신이 했던 말, 믿어. 내가 고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관계없이, 주선연 당시의 일로 내게 미안해했었다는 그 말.”
여태까지 가졌던 불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그가 진솔한 사람이라는 건 주선연 때부터 이미 확인했던 바니까. 그가 자신에게 억지로 거짓말할 필요가 없는 입장이기도 하고.
“고마워요…….”
한설연이 어렵게 그 말을 꺼내자 단유소가 대꾸했다.
“고마워할 건 없어. 게다가 그때 내가 한심하고 답답했던 게 사실이기도 했고.”
단유소의 등을 보면서 걷는 한설연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이렇게 쉽게 인정하다니.
주선연에서 이미 확인했던 그 진솔함만큼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그 후로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딱히 방해되는 게 아니라면 이런저런 얘기 좀 해도 돼요? 심심하기도 하고.”
“좋으실 대로.”
단유소가 대꾸하자 잠시 후에 한설연이 말했다.
“사실 난……, 애초에 주선연 같은 거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내가 그런 데에 나갈 수 있는 입장도 아니잖아요. 몰래 정체를 속이고 나가서 사내들 골탕 먹이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유소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한설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금영이 그 아이의 부탁으로 사정을 전하러 나간 것뿐이었어요. 돌이켜 보면 거기에서 끝냈어야 했는데 결국 그러지 못했죠. 젊은 사람들이 다들 한다는 주선연이라는 게 어떤 식인지, 한 번쯤 경험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갑자기 들었던 거예요. 평생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단유소가 걸음을 옮기던 와중에 또다시 고개만 한 차례 끄덕였다.
“이런 데 나오는 남자들은 어떤 남자들인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단 공자님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어차피 한수련이라는 가상의 인물로 나가는 것이니 상관없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적당히 겪어보고 좋게 헤어지며 마무리를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었죠. 어차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의도가 불순했지만, 그땐 그런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계속 들이댔던 거로군. 당신은 그래서 더 귀찮았을 것이고.”
“그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어서……, 얼떨결에 그런 식으로 대처하고 말았죠. 아무튼 이게 내 변명이에요.”
“후. 어쩐지 이번 주선연은 나가기가 싫더라니.”
단유소의 말에 한설연이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우리 일행에 단 공자님이 합류한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들키면 내 꼴이 우스워질 것 같아서 안 들키려고 노력했죠. 그 후에 단 공자님이 고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더더욱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만약에 들키면 나로 인해 일행 전체에 피해가 갈까 봐 조바심까지 들었죠. 결국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두 사람은 걷다가 경공을 펼치기를 반복했다. 시야가 트인 곳에서는 최대한 몸을 숨기는 형태로 걸어 다녔고, 삼림이 울창한 곳에서는 어김없이 경공을 펼쳤다.
한참 동안 앞서서 경공을 펼치던 단유소가 맑은 물이 흐르는 도랑에서 멈췄다.
“마침 점심때니 좀 쉬지.”
두 사람은 흐르는 맑은 물을 마신 후에 바위 위에 앉아서 육포를 뜯었다. 어제 젖었던 걸 제대로 말릴 시간도 없어서 눅눅했지만 그런 걸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식사를 하던 중에 한설연이 물었다.
“이대로라면 공동파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길 따라 가는 게 아니고 최대한 은밀하게 이동하는 중이라서,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는 더 걸릴 거야. 이르면 모레 낮, 늦으면 밤쯤이지 않을까 싶은데.”
“아아.”
고개를 끄덕인 후에 육포를 찢어서 오물거리던 한설연이 또 물었다.
“어차피 쉬는 시간인데 사적인 것들 좀 물어봐도 돼요?”
그러자 단유소가 말없이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안 되면 안 된다고 말을…….”
“오필이 가니까 또 다른 수다쟁이가 왔군. 내가 수다를 부르는 상인가 싶어서.”
한설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풉! 오필 공자도 수다가 많았어요?”
“응. 당신만큼이나. 참! 그리고 헤어지던 순간에 녀석이 특별히 내게 부탁하더군. 당신 얼굴 꼭 다시 보게 해달라고 말이야.”
“오호. 오필 공자 덕분에 조금은 더 안심해도 되겠군요. 단 공자님이 오필 공자 생각은 끔찍하게 하는 것 같으니까.”
단유소가 피식 웃었다.
한설연이 원래 수다쟁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왜 계속해서 수다를 떨려고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녀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것이다.
의지하던 현월곡의 식구들을 잃은 게 겨우 어제의 일이었다. 그들의 생사가 불분명한 상황이다. 충격도 크고 아픔도 클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그녀는 이 넓은 강호에 홀로 내동댕이쳐진 처지였다.
그녀에게는 많이 외롭고, 슬프고, 힘든 시간일 것이다. 가뜩이나 강호 초출이니 힘겨움의 무게가 훨씬 더할 것이다.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고 밝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다. 참는 게 무조건 좋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니까.
임무로 인해 강호의 철없는 후기지수들을 제법 접해봤는데, 적어도 한설연은 그들과는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장단을 좀 맞춰주자.
“묻고 싶은 게 뭔데.”
단유소가 그렇게 말하자 한설연이 곧바로 물었다.
“단 공자님은 주선연, 많이 나가봤어요?”
의외의 질문이었지만 굳이 속일 일도 아니었다.
“응.”
“몇 번이나요?”
“글쎄. 세어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한 서른 번쯤 되려나?”
“우와!”
놀란 반응을 보인 한설연이 다시 물었다.
“그중에서 계속 만나본 소저는 있었어요? 그러니까 사귀었다거나.”
“없어.”
“왜요? 그 많은 사람 중에 마음에 드는 소저가 한 명도 없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단유소가 대꾸하지 않자 한설연이 농담조로 말했다.
“눈 많이 높으신가 봐.”
이번에도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한설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설연이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해요. 불쾌했다면…….”
그러자 한설연의 말을 자르며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마음에 드는 소저들은 있었지. 적어도 몇 명은.”
“몇 명씩이나 있었는데 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신이 아는 대로야. 내가 마음에 드는 여인 앞에서는 좀 한심하고 답답해지거든.”
“아, 아니 그때 내가 했던 말은 그러니까…….”
“당신 불편하라고 하는 얘기는 아냐. 아까도 말했지만 그건 나도 인정하는 사실이라서. 어쨌건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긴장하게 되거든. 그러다 보니 결국 그녀들의 호감을 못 얻은 거고.”
그러자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싸울 땐 그렇게 용감한데. 지금껏 수많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긴장 같은 건 전혀 안 하는 것 같던데. 단 공자님이라면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인데.”
단유소가 피식 웃어 보이자 한설연이 다시 말했다.
“어쨌거나 마음에 들었던 그 몇몇 분들한테도 계속 만나자고는 해봤을 거 아니에요. 저와의 주선연에서 보여준 모습대로라면 단 공자님은 됨됨이가 악하지 않고 진솔한 느낌이라, 마음을 받아준 소저가 한둘쯤은 있을 것 같은데.”
“매력 없고 답답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병 주고 약 주나? 누구 놀려?”
“그,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그때 보니까 단 공자님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보다, 실제로는 더 용기가 있으신 것 같아서.”
“용기를 냈던 건 처음이었어, 그때가.”
한설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단유소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쨌든 그만하지, 이런 얘기. 재미도 없고.”
단유소가 그렇게 말한 후에 다시 도랑으로 향했다.
그가 물주머니에 물을 채워서 한 모금을 들이켰을 때쯤 한설연이 말했다.
“다른 질문, 해도 돼요?”
그러자 단유소가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단유소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부디 내 주선연의 흑역사에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었으면 좋겠군.”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대꾸한 한설연이 곧바로 물었다.
“단 공자님, 신룡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