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녀와의 재회 (2)
단유소가 깨어난 건 깜깜한 밤중이었다.
자리에 눕자마자 잠에 빠졌었다. 얼마나 피곤했었는지 모른다. 근래에 내공과 체력을 이 정도로 소모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일어나니 그나마 몸이 개운했다.
살 것 같았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니 대략 축시초(오전 1시)로 보였다. 대략 두 시진(4시간)쯤 잔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설연은 쭈그리고 앉아서 잠에 빠져 있었다.
불편하게 왜 저러고 자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길 잠시, 곧바로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잠결에 잠시만 눈 좀 붙인다고 말하고 그냥 잔 것이다. 그녀에게도 자라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어제는 그녀에게도 힘겨운 하루였을 텐데.
보아하니 그녀는 나름대로 번을 선답시고 버티다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미안한 마음도 들고 고맙기도 하여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낙엽을 모아서 바닥을 더 따뜻하고 푹신하게 만들었다. 그 위에 자신의 옷들을 깔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를 안아 들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혔다.
문득 묘한 느낌이 든 것은 그녀에게 피풍의를 덮어주려 할 때였다.
그녀가 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그녀의 골격, 체형, 키, 팔다리의 길이 등, 많은 부분들이 새삼스레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도 그녀를 보면서 종종 의아해했었던, 근거를 찾기 힘든 익숙한 느낌이 다시금 강하게 든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다가 쭈그리고 앉아서 그녀에게 피풍의를 덮어주려 할 때였다. 그녀의 하얀 손과 목덜미에 난 미세한 점들이 차례로 시야에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위치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본 느낌이었다.
피풍의를 덮어준 후, 옆에 조용히 앉아서 생각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많은 부분에서 익숙한 느낌을 주는 거지?’
이 정도로 익숙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면 이전에 자신과 연관이 되었던 사람일 것이다. 내지는 아는 사람 중에 그녀와 매우 닮은 누군가가 있거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연관되었던 사람도 없고 닮은 사람도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주변에는 그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여인 자체가 없었다.
‘주선연에서 만난 여인 중에도 없…….’
거기까지 생각하던 중, 퍼뜩 떠오른 누군가가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주선연을 겪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주선연을 꼽으라면 역시 최근의 주선연일 수밖에 없었다. 최근이어서 더 기억에 남지만, 단 한 번 용기를 냈다가 아픔을 겪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 주선연.
그리고 그때의 여인.
‘한수련!’
자고 있는 한설연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눈동자를 부릅떴다.
‘말도 안 돼…….’
생각해보면 어제부터 바뀐 그녀의 목소리도 분명히 한수련이라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처음에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매우 익숙한 느낌이었지만, 어제는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시간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냥 지나갔던 것이다.
결국 모든 증거들이 한설연과 한수련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그 두 여인이 다른 인물이라는 증거를 찾기가 더 힘들 정도였다.
두 여인이 동일 인물이라는 게 확실해지니, 여태껏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보였던 몇 가지 의아한 모습들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자신의 앞에서만 말을 하지 않던 모습.
그 후에는 괜히 억지로 변형시킨 느낌을 주던 그녀의 목소리.
‘그녀가 내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겠지. 그래서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던 거고.’
확실해졌다.
주선연의 상대였던 한수련이라는 여인이 바로 눈앞에 있는 한설연인 것이다.
그래서 충격이었다.
잠시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으니 그녀와 주선연을 하면서 나눴던 대화들이 자연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취미가 독서라고 했었다.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네.’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그녀이니 당연히 책은 많이 읽을 것이다.
하는 일은 없고 그저 집안의 일을 돕는 정도라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 집안이라는 게 결국 현월곡이었던 거고.
“하!”
헛웃음이 나왔다.
평생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되다니.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 자체가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이라는 점이 더 신기했다. 적어도 그녀와 자신이 주선연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최익조차도 양금영 대신 나온 사람이 한설연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니까.
상황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
피식 웃어 보인 단유소가 이윽고 가부좌를 틀더니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대라유유선공이 운용되기 시작하자 그의 기운이 서서히 대자연 속에 녹아들었다.
다음 날.
편하게 누워서 자고 있던 한설연은 어렴풋이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이 녀석들, 잘 있었지? 청비는 살이 좀 올랐구나. 그리고 간지럽잖아, 설화. 하하!”
목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단유소였다.
‘뭐지? 누구지?’
잠에서 깨어나는 와중에도 그런 의문이 먼저 들었다. 잠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둘뿐이었는데 그새 누가 찾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한설연이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제 심신으로 피곤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느낌은 의외로 개운했다.
멀리 보이는 산 위로 해가 살며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시각.
묵었던 곳에 단유소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근처 관목 숲의 어딘가에 있는 듯했다.
점점 정신을 차려가던 한설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어?’
어젯밤에 자신의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일어난 곳은 단유소가 누워 있던 자리였다.
보니까 자신의 몸에는 피풍의가 덮여 있었다. 아마도 단유소의 것으로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는 낙엽뿐인 바닥이었는데, 누워 있는 곳에는 옷가지들이 깔려 있었다. 역시 자신의 옷은 아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원래 자신이 누워 있었어야 할 곳에는 낙엽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단유소가 그곳의 낙엽까지 긁어모아서 이 아래에 깔아준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한설연이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그가 자고 있는 나를 들어서 이곳에 눕혔다는 얘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전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리 자고 있었다 해도, 아무리 피곤했다 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아직 위험한 지역이고 이제 현월곡의 식구들은 아무도 곁에 없다. 그런데도 완전히 곯아떨어진 것이다.
‘한설연, 미친 거야?’
이건 긴장감과 경각심의 문제였다.
그가 뭐라 생각했을까.
완전히 개념 없는 강호 초출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천하태평이라며.
‘정신 차리자, 한설연. 정신 차려.’
짝! 짝!
한설연이 양 손바닥으로 자신의 볼을 가볍게 때렸다.
그녀가 곧바로 피풍의와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개기 시작했다.
그래도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이 최대한 편하게 잘 수 있도록 배려해준 그 마음이.
잠자리를 정리한 한설연이 검을 뽑아 들었다. 검면을 거울 삼아 매무새를 확인한 그녀가 이윽고 단유소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단유소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대화를 나누는 그의 어조를 보아하니 상대가 매우 친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누굴까.
열 걸음 남짓 이동하자 관목들 사이로 단유소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뒤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그 말에 단유소가 상체를 틀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즈음 한설연의 시선을 확 잡아끈 게 있었다. 단유소의 팔 위에 뭔가가 있었던 것이다.
새였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였다.
그녀가 얼른 단유소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어어? 그게 뭐예요?”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곁으로 다가간 한설연이 흥미로움 가득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와아! 매네요?”
가까이에서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두 마리의 매를 바라보던 한설연이 말했다.
“둘 다 멋있게 생겼는데요? 하나는 중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아이 같은데 덩치가 더 큰 것 같네요! 하얀 아이는 음……, 보라응 같은데.”
그 말에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매들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청비, 누나한테 인사해야지? 설화, 너도 언니한테 인사해.”
단유소가 하는 말을 통해 두 마리 매들의 성별과 이름을 알 것 같았다.
한설연이 청비와 설화를 쓰다듬었다. 두 마리의 매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유. 귀여워. 둘 다 단 공자님이 키우는 아이들인가요?”
이번에도 단유소가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응? 그러고 보니…….’
근래에 종종 봤던 기억이 있다. 높은 하늘에 떠 있는 두 마리의 매를.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런 경우는 모두 단유소가 자신의 근처에 있을 때였다. 그리고 지금, 그가 두 마리의 매와 함께 놀고 있다.
왠지 모르게 그 매들이 이 아이들인 게 아니었을까 하는 강한 추측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몇 번 봤어요. 하늘에 매 두 마리 떠 있는 거. 혹시…….”
“이 녀석들이었을 거야. 늘 내 위에 떠 있는 건 아닌데, 그런다고 해서 아주 멀리 벗어나지도 않지.”
“아하.”
대꾸를 하면서 한설연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미묘한 괴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유소가 매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 이제 너희들도 가서 놀아.”
그 말과 함께 단유소가 허공을 향해 팔을 털었다.
두 마리의 매가 날개를 펄럭이며 힘껏 날아올랐다.
훨훨 날아가는 매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단유소가 이윽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야영지를 향해서였다. 한설연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야영지로 돌아온 한설연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아, 참! 덕분에 편히 잤어요. 고마워요.”
그러자 단유소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미소 짓더니 대꾸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더군.”
한설연의 양 볼이 붉어졌다.
“그, 그건…….”
변명을 하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는 변명거리가 없었다.
“짐 챙겨. 오늘도 갈 길이 머니까.”
그렇게 말한 단유소가 뒤돌아 앉아서 먼저 봇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여태껏 느끼던 묘한 괴리감의 정체를 한설연이 눈치챈 건 그 즈음의 일이었다. 그녀가 단유소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근데 왜 갑자기 말을 놓으시는 거예요?”
그러자 단유소가 앉아 있는 상태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내가 여자에 대한 이해도가 평균 이하인 남자라서 그래. 그러니까 하대하는 것도 그냥 그렇거니 해.”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이에 단유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원래 내가 어느 한 부분에서도 매력을 느낄 수 없는 남자잖아. 한결같이 답답할 뿐인 남자라는 거, 당신도 잘 알잖아? 그러니까 말 놓는 건 그냥 그렇거니 하라고.”
한설연이 두 눈을 부릅떴다.
단유소가 왜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주선연의 마지막 순간에, 헤어질 때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고 있었다. 즉, 그때의 한수련이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그가 알아차렸다는 뜻.
한설연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고 단유소는 의미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한설연이었다.
“지금 단 공자님이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전에, 단 공자님께서 한 가지는 알아주셨으면 해요.”
단유소가 눈짓으로 궁금함을 표하자 한설연이 다시 말했다.
“예. 제가 그런 말을 했었죠. 주선연이 끝나고 헤어질 때의 솔직한 심정이 그랬어요. 단 공자님에게서 호감이나 매력을 전혀 못 느꼈어요. 답답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죠.”
“친절하네. 상처에 소금까지 뿌려주고.”
단유소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띤 채로 그렇게 대꾸하자 한설연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