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그녀와의 재회 (1)
구홍립은 계속해서 단유소에게 주문했었다.
일행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한설연 자신만 데리고 탈출하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유소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모두를 포기하지 않았다.
단유소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수를 내기 위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굳이 직접 묻지 않아도, 그가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랬다.
그렇기에 마음이 아픈 것이다.
저렇듯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게.
그리고 진심으로 반성한다.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 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괜찮아요?”
한설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억. 허억. 후우. 후우우우…….”
여전히 숨이 거친 상태에서도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찮다는 표시를 하는 듯한데 한설연이 보기에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가 않았다.
“많이 지쳐 보여요. 일단은 앉아서 조금이라도 쉬는 편이…….”
“후우. 후우우. 아무리 강을 건넜다 해도 여기에서는 안 됩니다. 서둘러 은신할 만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도 일단 숨은 고르고…….”
“즉시 움직여야 합니다.”
한설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유소가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더니 실제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한설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단유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아 있는 진기가 한 줌도 안 되었다.
게다가 혼원태극공을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까 나루터에서 한설연을 안고 뛰어오를 때 이미 써버렸기 때문이다.
즉, 위험에 노출되면 전혀 대처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둘러 은신할 만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해야 했다.
두 사람은 바람에 의해 파도처럼 너울거리는 갈대숲 사이를 말없이 걸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방금 전까지의 힘겹고 처절했던 시간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앞서서 걸음을 옮기던 단유소가 걸음을 멈추더니 갑자기 한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한설연도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단유소가 속삭이듯 말했다.
“몸을 낮추십시오.”
그 말과 함께 단유소가 자세를 낮추자 한설연도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적인가요?”
한설연도 속삭이듯 물었다. 그러자 단유소가 강줄기의 상류 쪽을 향해 턱짓했다.
먼 상류에 여러 개의 불빛이 보였다. 그 불빛들이 강을 따라 떠내려오고 있었다.
“저건…….”
“적의 범선들일 겁니다.”
“아아…….”
한설연이 눈을 질끈 감으며 탄식했다.
아까 함께 추측했던 대로 상류에 대기하고 있었던 적의 범선이 출동한 것이다.
한설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쯤이면 다들 강을 건넜겠죠?”
“시간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또 모를 일입니다. 모두가 많이 지쳐 있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적의 대처가 늦은 건 분명히 다행한 일입니다.”
적의 대처가 늦은 게 아니라 일행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적의 포위망을 돌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적들은 아마도 일행이 그 천라지망을 뚫고 탈출할 것이라는 예상 자체를 못 했을 것이다.
원래는 그들의 예상대로 되었어야 했다.
단유소라는 엄청난 변수가 없었더라면 분명히 그들의 예상대로 되었을 것이다. 물론 화공도 큰 몫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몫을 한 건 분명히 단유소였다.
단유소가 말했다.
“저들이 출동한 이상 강 주변은 모조리 위험지역입니다. 아직 저들의 횃불이 닿지 않을 때 서둘러 숲속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이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단유소의 뒤를 따르며 경공을 펼치는 내내, 한설연은 두 가지 이유로 마음이 아팠다.
하나는 헤어진 동료들이 또다시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적의 범선에 의해 발각되는 순간, 살아남기는 거의 힘들다고 봐야 할 테니까.
또 하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워진 단유소의 발걸음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금 그가 경공을 펼치는 속도는 매우 느렸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엄청난 무위를 보여왔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산지로 접어들어 산등성이를 타고 한참이나 달렸다.
한설연이 이쯤이면 되었다고 생각한 지점에서도 단유소는 멈추지 않았다. 호흡이 거칠어진 상태에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안쓰러워서 잠깐만 쉬었다 가자고 해도 그는 듣지 않았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가던 단유소가 발걸음을 멈춘 건 눈앞에 넓은 관목지대가 나타난 후였다.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호흡을 한동안 정리한 그가 이윽고 관목 지대 안으로 들어서서 적당한 자리를 잡았다.
“이곳이 좋겠습니다.”
한설연이 보니 바닥에 낙엽이 알맞게 쌓여 있는 적당한 공간이었다. 주변에 관목이 빽빽하여 바람도 제법 잘 막아주는 곳이었다.
단유소가 등에 메고 있던 작은 봇짐을 공간의 중앙에 내려놓으며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한설연도 조용히 봇짐을 내려놓으며 그 반대편에 앉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단유소가 앉은 상태에서 봇짐을 풀더니 옷가지들을 꺼내었다. 강물에 빠졌던 터라 모든 내용물들이 젖어 있었다.
단유소가 앉은 상태에서 상체를 돌려 공간의 외곽에 대고 옷가지들을 비틀어 물기를 짜냈다. 그것들을 주변의 나뭇가지에 널며 말했다.
“꺼내어 말릴 수 있는 건 말리는 게 좋을 겁니다. 적어도 안 말리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열양지기를 일으켜 말리는 것도 방법이긴 한데, 내공이 넘쳐나지 않는 한 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적어도 무사히 공동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단유소의 말에 한설연이 순순히 봇짐을 풀었다.
단유소에 비해 상태가 약간 낫다 뿐이지, 한설연의 진기도 거의 바닥이었다.
일반인들은 무공 고수가 운기조식 몇 번 하면 단전에 진기가 팍팍 차는 줄 아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야기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전설 속의 고수들을 영웅화시키려 그런 식으로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 내공심법은 강호에 존재하지 않는다. 축기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더딘 일이다. 축기의 효율이 약간 더 좋은 심법들이 존재할 뿐이다.
바닥난 진기를 충만하게 채우기 위해서는 며칠을 푹 쉬며 체력을 보충해야 하고 그러는 와중에 꾸준히 운기조식을 취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물론 무인마다 어느 정도씩의 시간 차는 존재하겠지만.
한설연이 옷가지들을 널고 났을 때 단유소는 이미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일을 마친 한설연이 자리에 앉았을 때 단유소가 말했다.
“잠시만…… 눈 좀…… 붙이겠습니다.”
완전히 피곤에 찌든 목소리였다.
“네에…….”
한설연이 대답한 후로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 때 단유소 쪽에서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크게 거슬리지 않는, 작은 소리였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저럴까. 그는 말 그대로 뒤통수를 대자마자 잠에 빠져버렸다.
한설연이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과 한 달 반 전만 해도 자신은 곡에 있었다.
자신에게 이런 일들이 닥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던 시절이었다. 사실 곡을 출발하여 감숙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 후로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며칠간 겪은 모든 일들이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이 강호의 어딘가에 이렇게 홀로 남겨지는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적어도 곡의 식구들 중 누군가는 자신의 곁에 끝까지 함께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 상황이 매우 낯설었다.
먼 하늘을 바라보던 한설연이 고개를 돌려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작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참으로 희한한 인연이다.
안중에도 없고 관심도 없던 주선연이라는 자리에 얼떨결에 나가서 엮이게 된 인연.
그리고 한심함의 끝을 보여주던 주선연의 상대.
평생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사내.
그 생각을 하던 한설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한심한 건 자신이었다.
주선연 당시에 잠깐 보았던 모습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단정했던, 자신이 바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리고 지금, 그와 함께 밤을 보내고 있다.
그것도 단 둘이서.
희한한 것은, 곡의 식구가 아닌 다른 사람과 단둘이 있는데도 매우 안심이 된다는 점이었다.
그의 성품은 주선연을 통해 엿보았고 그의 강함은 근래의 일들을 통해 직접 목격했으니까.
‘이 사람, 정체가 뭘까?’
뭐? 의천각의 비밀감찰단원?
아닐 것이다.
아까 강을 건너는 도중에 더욱 분명해진 게 있다.
그가 사부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사부는 최절정(最絶頂) 고수다.
최절정 고수라 함은 절정(絶頂) 고수 중에서도 최고의 경지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
무공의 경지라는 게 정해진 기준에 따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나, 통상 검기의 활용이 능수능란해지고 미약하게나마 강기를 엿볼 수 있는 고수들을 최절정 고수라 한다.
최절정 고수를 넘어선 자들을 초절정(超絶頂) 고수라 부른다.
절정을 초월한 고수라는 뜻이다. 강기의 활용이 능수능란해지고 진정한 무공의 여울에 이른 자들이다. 나아가서는 이기어검(以氣馭劍)과 같은 절기를 펼칠 수 있는 자들이다.
단유소는 사부를 능가하는 고수가 확실한 데다가 아까 이기어검까지 사용했었다.
결국 이 강호에서 통용되는 경지 구분에 의하면, 단유소는 초절정 고수라는 뜻이 된다.
백도에 알려진 초절정 고수는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강호에는, 특히 백도에는 은거기인들이 많으니 실제로는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단유소가 백도 십대 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엄청난 고수라는 사실 그 자체다.
세상에. 저 나이에 초절정 고수라니.
그 정도의 실력자가 겨우 무림맹 의천각의 비밀감찰단원이라고?
그럴 리 없다.
의천각의 비밀감찰단원이라는 신분도 결국 위장 신분일 것이다. 그가 얼마 전까지 비마대의 외부 업무 지원조로 신분을 위장했던 것처럼.
‘젊은 초절정 고수. 그리고 무림맹 소속이면서도 전혀 강호상에 드러나지 않은 정체.’
생각을 정리해가는 한설연의 눈동자가 더욱 또렷해졌다.
무림맹은 거대한 조직인 만큼 그 안에 기밀로 유지되는 하부 조직도 적지 않다. 그 기밀 조직 내에는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고수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단유소 같은 초절정 고수의 정체마저 감출 수 있는 기밀 조직이라면…….’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곧바로 뇌리에 떠오르는 조직명이 있었다.
‘신룡대!’
그렇게 가정할 때 많은 부분들이 들어맞는다.
애초에 이 일행이 출발하기 전에, 현월곡에서는 무림맹에 신룡대의 파견을 간곡하게 요청했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도 사안의 위험성을 감안하여 신룡대의 투입 건을 승인했다고 했었다.
그런데 무림맹에서는 여태껏 신룡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일행이 출발한지 한 달 하고도 반이 지났음에도.
무림맹주 백리우와 문상 제갈윤은 결코 헛된 약속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입 밖으로 꺼낸 말을 어떻게 해서든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괜히 무림맹이라는 거대 조직의 최고 관리자들이겠는가.
결국, 요 며칠간 자신이 직접 본 단유소의 실력과 그 외의 모든 정황들을 종합했을 때, 하나의 매우 그럴듯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가 신룡대원이야.’
그리고 초절정 고수인 그의 실력이라면 아마도 신룡대 내에서 다섯 명의 용이라 불리는 자들 중에서 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 하하…….’
신룡대원이었다니.
그런 사람이 주선연의 상대였다니.
생각을 정리한 한설연의 시선이 자고 있는 단유소의 얼굴에 한참이나 머물렀다.
그러던 한설연이 이윽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나저나 어쩌라는 거야?’
잠시 눈을 붙이겠다는 그 말은 곧, 본인이 깨어날 때까지 번을 서라는 뜻이야? 그래야 하는 거면 그러라고 확실히 얘기를 좀 해주던가!
‘이젠 나도 너무 졸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설연은 자리에 눕지 않았다.
쭈그리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정신을 차리기를 계속해서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밤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