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탈출 (1)
두 번째 전투가 있은 후로 이틀이 흘렀다.
그동안 한설연 일행은 계속해서 공동파 쪽으로 달렸다.
최대한 적의 이목을 피하는 방향으로 경로를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도중에 몇 번이고 적과 마주쳤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전처럼 수백 명의 흑의인들과 마주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간 일행이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다.
단유소가 설정한 경로를 따라 이동한 덕분이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훨씬 어려운 과정을 겪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아니, 필시 그랬을 것이다. 직접 겪진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하지만 적의 이목을 피하는 것도 슬슬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가면 갈수록 마주치는 적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일행이 공동파 쪽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적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애초부터 포위망을 넓게 구축한 상태였다.
일행이 여태껏 적이 밀집된 곳을 용케 피해 오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포위망 안이었다. 소수의 적들과는 계속해서 마주쳐왔으니, 그들도 대강의 경로를 예측하고 그쪽으로 인원을 증원하고 있는 것이다.
해가 서산에 닿기 직전의 늦은 오후.
산지의 내리막길을 향해 빠르게 달리던 한설연 일행이 잠시 멈춰 섰다. 마침 시야가 트인 곳에서 전방이 보였기에 휴식 겸 멈춘 것이다.
저 멀리, 비탈 아래쪽으로 넓은 평지가 보였다. 자잘한 나무들과 넝쿨들이 무성한 평지였다. 그 뒤쪽으로 강줄기가 보였고, 강가에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다. 한쪽에는 나루터도 보였다.
“사천으로 흘러 나가는 강줄기입니다. 공동파로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저 강을 건너야 합니다.”
최익의 말에 구홍립과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저 강이라도 건너면 상황이 좀 나아지겠지요? 빨리 건너고 싶군요.”
구홍립의 말이었다.
강 너머에서는 공동산이 가까우니 한 말이었다.
명문거파인 공동파가 지척에 있는 만큼, 적어도 지금처럼 흑의인들이 대놓고 활개를 치지는 못할 테니까. 설령 적이 공격해온다 해도 공동파라면 막아줄 수 있을 테니까.
단유소는 묵묵히 평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지까지는 아직 먼 거리였기에 고수인 단유소로서도 기척을 감지할 수는 없었다. 안력을 돋워도 뭔가를 파악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낌이 좋지 않았다.
“아직 긴장을 풀기엔 이릅니다.”
단유소가 그렇게 말하자 한설연이 곧바로 대꾸했다.
“맞는…… 말씀이에요. 매복하기에…… 좋은 지형이죠.”
그 말에 단유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는 듯.
언젠가부터 한설연은 단유소 앞에서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간혹 한 번씩만 말을 보태는 정도였다. 아예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
한설연은 그마저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본래의 목소리를 최대한 감추기 위해 음성을 어느 정도 변조했을 뿐만 아니라, 말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중간중간에 천천히 말을 늘어트리는 방식까지 썼다.
편안해졌던 구홍립과 최익의 눈빛이 두 사람의 말에 의해 다시금 긴장감을 담아갔다.
맞는 말이었다.
적은 치밀한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쉽게 강을 건너게 할 리 만무했다. 여태껏 매우 고된 행군이었는데, 마침 희망이 보이는 듯하여 순간적으로 마음이 해이해졌던 것이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구홍립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두 사람, 의외로 죽이 잘 맞는 느낌이란 말이야.’
지난 이틀간 지켜본 결과였다.
개인적인 대화는 전혀 없고 지휘부가 함께 있을 때조차도 대화를 거의 주고받지 않는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묘하게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다행한 일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전에 단유소에게 부탁도 했었지만, 어쩌면 그에게 온전히 한설연을 맡겨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그 상황이 온다 해도 조금은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에게.
구홍립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최익이 단유소에게 물었다.
“앞쪽에 매복이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면 우회로를 택해야겠지?”
“그래야 하겠지요. 어차피 우측은 돌산인 데다가 넘어봐야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강가에 도달할 뿐입니다. 결국 좌측의 큰 봉우리를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까마득히 보이는 골짜기까지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한다. 경사가 매우 가팔랐다. 내려가는 것도 문제지만 저 아래에서부터 다시 올라가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왔던 길로 약간 되돌아가서 완만한 경사를 타고 우회하는 게 더 낫겠군.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그렇습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일정한 시간은 소모되는 만큼 적들도 어느 정도는 대처를 할 겁니다. 어차피 우리가 강을 건너려 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강변을 따라 이동하기만 하면 되는 문제니 우리는 최대한 서두를수록 좋습니다.”
단유소가 대꾸하자 구홍립이 말했다.
“알겠네. 다들 어느 정도 쉬었을 테니 바로 이동하지.”
그 후, 일행이 우회하기 위해 뒤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선두에서 달리던 단유소가 갑자기 한 팔을 수평으로 뻗으며 일행을 멈추게 했다.
구홍립이 얼른 다가와서 물었다.
“무슨 일인가?”
“뒤쪽에 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런……!”
아직은 완만한 지형이 나오기 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골짜기로 내려갈 수도 없다. 적들이 그 사실을 알아채고 골짜기로 쏟아져 내려오면 답이 없어진다.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전력이 많습니다!”
원래대로 전진하자니 매복이 있을 게 빤하고 이제는 우회로도 없어진 상황. 그렇듯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들려온 단유소의 낮은 외침은 절망적이기만 했다.
“포위된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구홍립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그러자 최익이 말했다.
“아무리 포위된 형국이라 해도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최후의 시도는 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자 구홍립이 서둘러 최익에게 물었다.
“대협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차피 양쪽 모두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전력입니다. 이 상황에서 후방을 뚫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어찌어찌 살아남는다 해도 결국은 적들의 감시망 안에 걸릴 테고, 그러면 영영 그들이 짜놓은 천라지망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겁니다.”
“결국 싸우더라도 강변의 적을 상대하는 게 낫다는 말씀이시군요.”
“어차피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는 곳을 택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구홍립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자네에게 또 부담을 지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군.”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전투가 끝나면 일행은 거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어떤 적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적의 입장에서도 최후의 포위망이었다. 그런 만큼 그들도 단단히 준비했을 것이다. 때문에 일행에게는 더없이 처절한 싸움이 될 테고.
“다만 비전투력은 미리 제외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오필 말이군.”
“예. 그는 제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가 마음에 걸려서 제가 전투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그게 더 손해입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그를 탈출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합니다.”
단유소가 깊숙한 골짜기 쪽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구홍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소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나무와 덩굴이 무성한 골짜기 쪽에 조용히 숨어서 기회를 노린다면 생존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였다. 어차피 적이 노리는 건 한설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지로 들어가는 마당에 비전투력인 오필을 대동한다는 건, 인간적으로도 할 짓이 못 되었다.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으니까.
“혼자 보내봐야 오래 못 버틸 것이네. 혹여 그의 탈출에 대해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는가?”
단유소에게 물었지만 대답은 옆에 있던 최익에게서 나왔다.
“제가 가야 합니다. 애초에 유소 이 사람과 약조한 바이기도 합니다. 오필을 반드시 탈출시켜주기로.”
그 말에 구홍립과 한설연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익은 든든한 전력이자 고마운 동료였다. 여태 그와 함께하면서 정이 많이 들기도 했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저런 얘기를 꺼내니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보내줄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간…… 너무 감사했어요, 최 대협. 오필 공자와 함께 꼭…… 무사히 귀환하시길 바랄게요.”
한설연의 말이었다. 그러자 최익이 대꾸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송구합니다. 결정적인 상황에서 빠지게 되어 더욱 송구합니다.”
그러자 구홍립이 말했다.
“송구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간 최 대협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최익의 눈동자가 떨릴 때 구홍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인사를 길게 나눌 상황이 아닙니다. 결정이 내려진 김에 바로 움직입시다. 늦어지면 모든 걸 그르치게 됩니다.”
모두가 복잡한 심경이 담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움직여야 할 때였다.
단유소가 구홍립에게 말했다.
“누군가가 골짜기 쪽으로 내려간 흔적을 최대한 남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 제가 잠시 내려갔다 오겠습니다. 일단 구 대주님께서 일행을 이끌고 먼저 출발하십시오.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알겠네.”
일행이 떠나고 세 사람이 남았다.
“우리도 가지.”
최익의 말에 단유소가 오필을 안아 들며 말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알겠네.”
단유소가 이윽고 가파른 경사면으로 뛰어내리며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최익이 혀를 내둘렀다.
오필을 안아 든 단유소의 움직임이 혼자인 자신보다 훨씬 가볍고 경쾌했기 때문이다.
대체 이 청년의 경지는 어느 정도란 말인가.
볼 때마다 놀랍기만 하다.
세 사람이 점점 골짜기에 가까워질 때쯤, 단유소에게 안겨 있던 오필이 말했다.
“쳇! 한 소저와 인사 나눌 시간이라도 주시지.”
단유소가 빙그레 웃었다.
그냥 들으면 철없는 소리 같지만 그게 아니었다. 헤어짐을 준비하는 오필의 방식이자 배려였다. 무겁고 아쉬운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는.
“나중에 현월곡에 가면 한 소저 다시 볼 수 있게 해줄 거죠?”
“그래.”
오필도 빙그레 웃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간 너무 고마웠어요, 단 형.”
단유소는 희미하게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꼭 살아남을 게요. 그리고 열심히 살게요.”
단유소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길지 않은 인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오필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즈음 세 사람이 골짜기에 도달했다.
몸을 숨길 만한 곳에서 오필을 내려놓은 단유소가 최익에게 말했다.
“왠지 대협께 송구한 마음입니다.”
“송구는 무슨. 어차피 자네가 아니었으면 이미 몇 번은 죽었을 목숨일세.”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네와의 약조, 반드시 지키겠네. 그러니 자네는 일행을 잘 지켜주게나. 꼭 살아남고.”
“예.”
훈훈한 미소를 보이며 단유소를 바라보던 최익이 말했다.
“양 소저는 지지리 운도 없는 여자군. 그녀의 친구는 굴러 들어온 복을 발로 찬 여자고.”
“운 좋은 여자와 현명한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때마다 목숨을 걸고 사는 남자와 엮이지 않은 걸로 봐서는.”
단유소의 말에 최익이 웃었다.
아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최익이 말했다.
“그만 지체하고 가보게.”
“알겠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그렇게 대꾸한 단유소가 오필을 바라보았다. 오필도 흔들리는 눈동자로 단유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유소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단유소가 돌아서서 달렸다.
‘넌 끝내 다시 보자는 말을 하지 않는구나.’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일 것이다. 오필은 그런 사람이니까.
‘내 쪽에서 먼저 보고 싶어지게 말이야.’
달리는 도중에 잠깐 뒤돌아보니 오필이 자신을 향해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경공을 펼치는 단유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