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귀빈 방문
엄주평이 보니 챙이 넓은 죽립을 깊게 눌러쓴 자였다. 얼굴 중에서 보이는 부분이라고는 턱 언저리뿐이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상대의 목소리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도검이 에워싸고 있는데도 그의 자세는 차분하기만 했다. 태평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현월곡의 무인이 불청객에게 다시 물었다.
“적이 아니면 왜 말없이 침입했단 말인가? 어서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할 것이다!”
“침입한 게 아닙니다. 급하게, 조용히 방문하려다 보니 이렇게 된 겁니다. 곡주님이 소생의 목소리를 아실 겁니다. 그러니 진정들 하세요.”
상대는 여전히 여유롭기만 했다.
‘목소리라?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같기도 하고…….’
엄주평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방 안에서 단목수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분 말씀이 맞네. 내 귀한 손님이시니 모두 물러가시게.”
“곡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 말을 끝으로 무인들이 멀어져 갔다. 그러자 방 안에서 단목수헌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엄 단주도 일단 물러가시게.”
방문자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곡주의 명령은 명령.
“그리하겠습니다.”
엄주평마저 물러가자 단목수헌이 송채령에게 말했다.
“저분을 안으로 모신 후에 네가 가서 직접 차를 내오너라.”
그 말에 송채령이 살짝 놀랐다.
곡에 어떤 손님이 방문해도 사부가 자신에게 직접 차를 내오라고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번만 해도 몇 년 만의 일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이러시는 걸까.
“알겠습니다, 사부님.”
송채령이 나간 후, 죽립을 쓴 방문객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단목수헌이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니 방문객이 손을 내저었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아직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결례를 끼치게 되는군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앉으시지요.”
방문객이 맞은편에 앉자 단목수헌이 그를 향해 공손히 포권했다.
“현월곡의 단목 모가 맹주를 뵈오이다.”
그러자 방문객이 눌러썼던 죽립을 벗었다.
단목수헌의 말마따나 그는 무림맹주 백리우였다. 놀랍게도.
백리우도 단목수헌을 향해 마주 포권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기별도 드리지 않고 불쑥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맹주신데요.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어인 일이십니까? 보아하니 수행원도 없이 오신 듯한데.”
“개인적인 볼일이 있어 절강지부 쪽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문득 곡주님이 뵙고 싶어 왔지요.”
백리우가 짐짓 능청스러운 척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단목수헌이 웃으며 말했다.
“푸허허허! 맹주께서는 여전하시군요.”
절강지부 쪽에 볼일이 있다는 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현월곡에 들른 이유는 단순히 자신이 보고 싶어서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한설연 쪽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함일 것이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을 때 송채령이 차를 내왔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녀가 깜짝 놀란 건 당연했다.
“매, 매, 맹주님……!”
“허허.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송 소저.”
송채령이 다구를 얼른 내려놓고 백리우에게 예를 취했다.
“맹주님을 뵈옵니다.”
“송 소저께서는 볼 때마다 아름다워지시는 것 같습니다. 현자와 미인은 모두 현월곡으로만 모이나 봅니다. 허허허.”
“과, 과찬이십니다.”
송채령이 탁자의 옆쪽에 앉아서 차를 따랐다. 그녀가 할일을 마치고 일어서려 할 때 단목수헌이 백리우에게 말했다.
“맹주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이 아이가 들어도 되는 문제겠지요?”
“물론입니다, 곡주님. 송 소저께서는 현월곡의 대공녀시잖습니까. 그 모든 걸 떠나서, 아시다시피 소생은 미인을 존중합니다.”
“허허허헛!”
“푸흡!”
단목수헌과 송채령이 웃었다.
그 와중에도 단목수헌은 백리우의 분위기를 면밀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백리우는 본디 유쾌한 사람이었다. 오늘도 유쾌하긴 한데, 왠지 평소와는 미묘하게 달라 보였다. 어딘가 모르게 어두운 느낌이랄까?
무슨 일 때문에 어두운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게 오늘 자신을 찾아온 이유일 것이다.
차를 한 모금씩 들이켠 후에 단목수헌이 말했다.
“설연이 일로 무림맹에서 본곡을 기꺼이 도와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현월곡은 무림맹의 좋은 친구이자 동반자입니다. 당연히 도와드리는 게 맞지요.”
이에 단목수헌이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물었다.
“소식……, 들으셨겠지요?”
“예.”
“그쪽 일행의 반 이상이 당한 것도?”
“예. 그들이 사용한 흉악한 수법에 대해서까지도 들었습니다.”
단목수헌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후에 백리우를 조용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맹주께서 말씀하셨듯 본곡과 무림맹은 좋은 벗이자 동반자입니다. 그렇기에, 도움을 주신 점에 대해 감사하는 한편으로 그 과정상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단목수헌의 말에 백리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신룡대에 대한 말씀이시군요?”
역시 백리우다웠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금세 알아차린 것이다.
강호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주저 없이 자신과 제갈윤을 꼽는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꼽는 가장 똑똑한 사람은 바로 백리우였다. 사람들 대부분이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일전에 무림맹에서는 최대한 빨리 신룡대를 합류시키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최근에 구홍립에게서 받은 보고에 의하면 아직까지도 신룡대가 합류하지 않았다고 했다.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도.
단목수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룡대가 미리 투입되었으면 상황이 훨씬 낫지 않았겠는가 하는 아쉬움입니다. 이번 사안의 잠재적 위험성이나 중요성에 관해서는 맹주님이나 문상께서도 충분히 인식하고 계셨잖습니까.”
그러자 백리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부분에 관해서라면, 곡주님께서는 전혀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목수헌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하나였다.
“그 말씀인즉, 이미 투입되었다는 뜻입니까?”
“예, 곡주님. 심지어는 처음부터 투입되어 있었습니다.”
단목수헌의 눈이 더 커졌다.
“그랬군요. 송구합니다, 맹주님. 이 늙은이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역시 무림맹이고 역시 신룡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홍립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모양인데 이미 투입되어 있었을 줄이야.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소생의 탓입니다. 신룡대의 운용에 관한 사안은 아시다시피 맹 내에서도 극비로 관리되는지라.”
“알지요.”
고개를 끄덕인 단목수헌이 천천히 열었다.
“내내 조용하다가 인적 드문 산지가 많은 감숙에 진입해서야 문제가 생겼습니다. 의도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신룡대가 함께하고 있는데도 첫 습격의 피해가 그 정도였다면 앞으로는…….”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실은 그 일 때문에 찾아뵌 겁니다.”
백리우의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건지 궁금했다. 그게 바로 맹주가 오늘 자신을 찾아온 이유이리라.
“공동파가…… 당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었다.
당했다니?
그 명문거파가 대체 무슨 일을 당했단 말인가?
“그곳은 지금 거의 초토화 상태로, 문도의 삼분지 일 정도만이 살아남아 사천 쪽으로 피신 중에 있습니다.”
“헉!”
“마, 말도 안 되는……! 대체 무슨 일입니까?”
송채령과 단목수헌이 깜짝 놀랐다.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한설연 소저 일행이 겪었다던 그 수법, 시체를 터트리면서 독을 퍼트리는 바로 그 수법에 당한 모양입니다.”
충격이 여전한 와중에도 이해가 되긴 되었다.
적이 그 수법을 썼다면 아무리 공동파라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명문거파가 이리도 허무하게 당하다니……. 대체 언제 그렇게 되었답니까?”
“문상에게서 받은 전서에 의하면 사흘 전, 밤중의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무림맹 사천지부장과 소생 그리고 문상뿐입니다. 일단은 정보를 통제하라고 지시했지만, 지금쯤이면 그쪽 인근에는 소문이 점점 퍼지고 있을 겁니다.”
백리우와 제갈윤이 그 사실을 공표하지 않은 이유는 대책을 수립하기 위함일 것이다. 대책 없이 공표했다가는 동요만 커질 테니까.
지그시 눈을 감고 뭔가를 생각하던 단목수헌이 말했다.
“강호의 일원으로서 사안의 심각성을 통감합니다. 허나 그 전에…….”
그러자 그의 말을 끊으며 백리우가 말했다.
“한설연 소저에 대한 걱정이 더 크시겠지요. 곡주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러실 수밖에요. 이해합니다.”
“설연이 일행은……, 공동파 쪽에 의탁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쪽에서는 이 사실을 모를 텐데…….”
단목수헌의 표정에 염려가 가득했다.
“일단 그쪽 신룡대원에게도 전서응을 날려 공동파의 일에 대해 알리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전서응이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민감한 질문인 줄은 압니다만 신룡대의 전력이 얼마나 투입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걸 알아야 그쪽에 대한 대책도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럽니다.”
그러자 단목수헌을 가만히 바라보던 백리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 명입니다.”
단목수헌의 눈이 커진 가운데 그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신룡대의 구성원들 모두가 대단한 고수들이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겨우 한 명이라니.
‘구색만 갖추려 했음인가?’
실망스럽기도 했고 너무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까 괜히 사과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까지 부탁했었는데 고작 한 명을 투입했었다니.
단목수헌의 표정을 살피던 백리우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쪽 일행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곡주께서도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각오하셨겠지요.”
“예.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룡대의 투입에 대해 맹주께 특별히, 간곡하게 청했었지요.”
단목수헌의 어조에서 불편한 감정이 약간이나마 드러났다.
그러자 백리우가 말했다.
“그러나, 적어도 한설연 소저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무사할 겁니다.”
백리우의 눈동자는 또렷했다. 그의 말에서 확신이 느껴졌다.
단목수헌은 그 확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설연 일행은 현재 아무것도 모른 채 공동파로 향하고 있다. 공동파가 적도들에 의해 점령당했으니 그들은 적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당연히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위험해질 것이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연히 백리우도 그 상황을 알 텐데, 어떻게 한설연의 안전을 확신하고 있는 걸까.
“왠지 확신하고 계신 듯하군요.”
“예.”
“근거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최악의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소저의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그조차도 지켜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이 강호상의 그 누구도 지킬 수 없다는 얘기가 되거든요.”
단목수헌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그렇다면 맹주께서 투입했다던 그 신룡대원이 설마…….”
“예. 곡주께서 생각하시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묵룡.
그일 수밖에 없었다.
신룡대 최고의 고수로 통하는 그 묵룡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결코 맹주에게 아쉬움을 토로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엎드려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단목수헌이 결국 양손을 방바닥에 대었다.
“송구합니다. 이 늙은이가 맹주님의 깊은 배려도 모르고…….”
“자세를 푸십시오, 곡주님. 불편합니다.”
단목수헌이 자세를 바르게 하자 백리우가 말했다.
“이미 그를 도울 대원 한 명이 그쪽으로 향했습니다. 다른 대원들 또한 지금 맡은 임무를 빠르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임무가 끝나면 그들도 바로 투입될 겁니다. 그들이 합류하기 전까지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으로선 ‘그’를 믿어볼 수밖에요.”
물론 묵룡이 함께 있다 해도 한설연이 염려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맹주의 말마따나 지금으로선 묵룡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다.
한설연 이외의 다른 식구들 또한 최대한 무사하기를 빌어볼 수밖에.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야 합니다, 곡주님.”
공동파의 사건으로 인해 환란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일에 대한 대처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를 하자는 뜻.
단목수헌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이 늙은이의 능력이 쓸모없어졌다며 맹주께서 내치시지 않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씀대로라면 곡주님과 소생은 평생 함께 일해야겠군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