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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룡무-22화 (22/200)

22화. 선녀 강림 (2)

침어? 낙안? 폐월? 수화?

경국지색? 화용월태?

아름다운 여인을 상징하고 비유한다는 그 모든 말들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미 이 세상의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절로 경외심이 드는 저 아름다움이, 결코 이 구질구질한 세상의 것일 리 없었다.

선녀였다.

그래, 맞다. 선녀일 수밖에 없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선녀가 앉아 있었다.

매우 잠시였지만,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도 들었다. 이런 게 현실일 리 없지 않은가.

약간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이대로 죽어도 큰 여한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 해도 의미 없는 죽음이 될 리 없다. 무조건 뜻깊은 죽음일 것이다. 저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창칼 앞에 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적만 흐르는 가운데 한설연의 볼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시선들이 부담스러웠는지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눈동자를 살짝 굴리곤 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애간장을 녹였다.

“이, 이제 소원 성취……, 되셨지요?”

목소리가 참 단아하고 곱다는 생각이야 얼굴을 보기 전에도 했었다. 하지만 저 얼굴에서 저 목소리가 나오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눈뿐만 아니라 귀까지 정화되는 것 같았다.

한설연은 어색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는데, 천망단원들에게는 그 미소조차 황홀했다.

“예…….”

천망단원 하나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그러자 한설연이 검은 면사를 내렸다.

모두의 눈총이 대꾸한 천망단원에게 향했다. 그 천망단원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럼 편안하게들 쉬세요.”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밤새도록 저 얼굴이 아른거릴 테니까.

이윽고 한설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망단원들에게 꾸벅 인사한 그녀가 사뿐히 걸음을 옮기며 멀어져 갔다.

한설연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모든 천망단원들이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을 때.

천망단원들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대상은 한설연의 물음에 대꾸한 그 천망단원이었다.

“너어어, 이누무 시키…….”

“네가 네 죄를 알렷다?”

“뭐 해! 밟아!”

“아, 아니! 그, 그게 아니고 저는……!”

퍽! 퍼버버벅!

잠시 애정 어린 구타가 이어진 후, 천망단원들이 오필을 에워쌌다. 저마다 오필과 어깨동무를 하고 악수를 청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자네는 우리의 눈과 귀를 구했네. 우리의 혼을 구했어. 자네는 영웅일세.”

“죽을 때까지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앞으로 자네는 우리가 지킬 걸세. 암, 당연하지.”

그렇게 오필은 영웅이 되었다.

일행이 머무는 곳으로 다시 돌아온 세 사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축 처진 분위기에 맥없는 모습들이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활기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구홍립이 근처에 있던 월혼대원에게 다가가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두 사람에게 돌아온 구홍립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랍니까?”

구홍립이 월혼대원에게서 들은 얘기를 전하자 최익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한 소저시군요.”

최익의 말에 단유소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네.’

계산된 의도였는지 순수한 의도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결과는 훌륭했다. 그 초상집 분위기를 이렇게 바꾸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만약 그녀의 의도가 순수했다면, 이 강호에 한설연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던 구홍립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하냐?”

구홍립, 최익 등과 헤어진 단유소가 오필을 찾았다. 오필은 야영지 근처의 바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의 전투로 인해 많은 무인들이 죽었음에도 오필이 살아남은 이유는 최익이 특별히 그를 신경 써줬기 때문이었다. 다행한 일이었다.

“…….”

오필에게서 대꾸가 없자 단유소가 그의 뒤통수를 가볍게 때렸다.

탁!

“악! 뭐예요, 단 형!”

“사람이 왔는데 알은체도 안 해주니까 그러지! 벌써 내외하는 거야?”

“내외는 무슨 내외! 그리고 왜 머리 때려요! 아, 지금 그렇지 않아도……. 아, 진짜!”

“이 자식이……?”

“고수라고 막 하수 때리고, 그러는 거 있어요?”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렇게 말하던 오필이 결국 웃어 보였다. 단유소도 웃었다.

잠시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던 오필이 말했다.

“다시 단 형을 보게 되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 많이 했어요. 저는 무공을 모르니 단 형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는 몰라요. 하지만 최 대협보다, 구 대주님보다 훨씬 고수인 건 알아요. 그러면 뭐, 엄청 고수인 거겠죠. 그리고 그 정도 고수라면, 본맹에서도 중요한 일을 하는 분일 거고.”

단유소가 미소만 보일 때 오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분한테 내가 지금껏 너무 함부로 대한 건 아닌가? 아무래도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지? 그런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그러지 않기로 했어요. 나는 단 형이 좋은 사람이라서 좋아한 거지, 고수라서 좋아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왠지, 내가 아는 단 형은 이러는 걸 더 좋아할 것 같기도 했고. 어때요? 나, 제대로 하고 있는 거, 맞아요?”

단유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오필의 이런 면을 참 좋아한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입장에서는 고민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부담도 많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친했던 친구라도 갑자기 출세하면 대하기가 괜히 어렵고 껄끄러워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물며 오필이 느끼고 있는 어려움이랴.

그럼에도 자신의 입장을 먼저 배려해준 오필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고 대견했다.

“서운하지는 않고?”

단유소가 그렇게 묻자 오필이 대꾸했다.

“정체 안 밝힌 거요? 아니면 고수 아닌 척한 거? 그런 게 왜 서운해요. 적어도 내가 여태껏 봐온 단 형은 솔직한 사람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밝히지 않았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고맙다.”

“이게 무슨 고맙고, 말고 할 문젠가요.”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예쁘던?”

한설연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고 오필이 대꾸했다.

“다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반응이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어요.”

“뭘 그렇게까지 부산들 떨기는.”

“아유. 못 봤으면 말을 마세요. 저만 해도 아까 그 모습, 평생 기억하려고 노력 중이라고요. 그러니 앞으로도 머리는 때리지 마요.”

“정신 차려 인마.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다.”

“나를 모욕하는 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한 소저의 아름다움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요.”

“얼씨구.”

그러자 오필이 미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래요. 이 기분 그대로 유지하면서 잠에 들고 싶어요. 한 소저 꿈 꿀 거예요.”

“가지가지 한다.”

오필이 야영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던 오필이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낭만이 없어, 낭만이. 이 낭만 파괴자!”

그러더니 홱 돌아서 도망치듯 달려간다.

단유소가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윽고 오필이 저만치 사라졌다.

‘넌 끝까지 나에게 지켜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구나.’

오필도 이 상황이 무서울 텐데.

다른 이들보다 훨씬 두려울 텐데.

그런데도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배려한 것이다. 오필다웠다.

“잘 자라.”

깜깜한 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가까웠다.

자리에 누웠지만 한설연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하아…….”

그녀는 계속해서 한숨을 쉬며 뒤척이는 중이었다.

자꾸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잠이 오지 않았다.

무림맹 의천각 소속 비밀감찰단원.

아까 구홍립이 알려준 단유소의 정체였다.

사실, 이곳에 도착한 후로 단유소 생각이 한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무인들을 달랠 때에도 그랬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아까 그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는데.

아니, 대체 난 여태 뭘 걱정한 거야?

단유소가 위험에 처하면 어쩌나 하고 매번 걱정했었다. 심지어는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다가 더 빨리 죽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고수라니.

왠지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주선연 당시에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무림맹 비마대의 외부 업무 지원조에 있습니다.”

결국 그게 위장 신분이었던 것이다.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비밀감찰단원이라면 신분을 감출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저는 무공 쪽으로는 그냥 호신술 정도만…….”

이 사기꾼! 대체 그게 어딜 봐서 호신술이야?

어느 무관에서 호신술을 배우면 그렇게 되는데? 엉?

“요즘 파락호들 무섭거든요. 그냥,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한둘쯤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해본 말입니다.”

뭐어어어? 참 나! 파락호가 무서워?

중원에 있는 파락호들 전체가 덤벼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 같던데?

“흥!”

나만 당신 속인 거 아냐! 당신도 나 속인 거야!

당신이나 나나 서로 어쩔 수 없이 정체를 속였던 거니까, 그 부분은 이걸로 정리 끝!

그러고 나니 그 주선연 당시의 마지막 순간이 또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여드린 모습들만이 다는 아닙니다. 더 많은 것들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매몰차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당신이 자초한 면도 분명히 있었고!

게다가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어? 못 보여준 면이 이런 면이었을 줄을? 감추고 있었던 부분이 이 정도라면 그건 사기라고!

“치이…….”

안다.

이런 자신의 모습, 우습다는 거.

사실, 그에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가 싫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하는 게 현재 자신의 입장이었다. 그 정도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다만 뭐랄까.

주선연에서 봤던 그의 모습과 지금 그의 모습이 너무 달라서, 그 괴리감 때문에 혼자 이러는 것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혼자 괜히 찔려서 이러는 것이다.

미안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속으로 얼마나 그를 우습게 여겼던가. 얼마나 한심하다고 생각했던가.

그런데 그의 도움으로 이렇듯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기에 부끄러웠다.

겉모습만 보고 섣불리 모든 걸 단정했던 자신의 모습이.

그렇기에 양심에 찔렸다.

여전히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고수인 단유소가 있다는 사실에 든든해하는 이 간사한 마음이.

그런 생각들을 하던 한설연의 눈동자가 한순간 진지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그의 앞에서 더 조심해야 해!

내가 한수련이었다는 사실, 절대 들켜서는 안 돼!

* * *

꼬깃꼬깃한 전서를 확인한 현월곡주 단목수헌이 눈을 부릅떴다. 전서를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곡주님, 왜 그러십니까?”

앞에 앉아 있던 엄주평이 그렇게 물었다. 전서를 가져온 사람이 그였다. 단목수헌 앞으로 온 전서였기에 임의로 확인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했던 것이다.

“사부님……?”

옆에 있던 송채령도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단목수헌이 말했다.

“설연이 쪽이…… 공격을 받았다는구나.”

단목수헌의 수호위이자 은월조장인 석문의 전서였다.

“헛!”

“그런……!”

엄주평과 송채령이 깜짝 놀랐다.

“어떻게! 어떻게 됐답니까?”

“사매는요? 무사하대요?”

두 사람이 동시에 그렇게 묻자 단목수헌이 지그시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감숙 땅을 지나던 길에 정체불명의 적에게 공격을 받았고 전력의 반 이상이……, 죽었다고 한다.”

“그럴 수가……!”

“일단 설연이와 구 대주는 무사한 모양이다. 지금은 공동파 쪽으로 가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돌아오기에는 너무 멀리 갔으니, 일단 공동파에 머물며 재정비를 하려는 것이겠지. 그곳에서 무림맹에 도움도 요청하려는 것일 테고. 나쁘지 않은 판단이긴 하구나.”

그러자 엄주평이 단목수헌에게 물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노린 것일까요?”

“확실치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다더군. 그간 너무 순조롭기에 걱정스럽긴 했는데.”

“하면 앞으로도 공격받을 가능성이…….”

엄주평의 말에 단목수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삑― 삐익― 삐이이익―

갑자기 밖에서 비상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다!”

그런 외침들과 함께 병장기 뽑는 소리들이 들리며 바깥이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놀랍게도 단목수헌의 거처 바로 밖이었다.

엄주평이 즉각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갈 때쯤, 현월곡의 무인으로 추정되는 목소리를 방 안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누구냐!”

그러자 상대방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 자. 진정들 하세요. 소생은 적이 아니니 이렇게들 소란 피우실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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