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21화 (21/200)

21화. 선녀 강림 (1)

그렇게 묻는 구홍립의 음성도 역시 떨리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절정의 반열에 오른 지 벌써 수 년째였다.

그간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많은 비무를 겪어왔고 많은 고수들을 접해왔다. 나름 실전도 수차례 겪었다.

그 과정에서 느낀 교훈은 두 가지였다.

역시 강호는 넓다는 사실과, 자신도 이 강호에서 어느 정도는 통한다는 일말의 자부심이었다. 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절정 고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아까 목격한 단유소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홍의 청년과 싸우던 모습, 갈색 무복의 고수들을 상대하던 모습 그리고 수백 명의 흑의인들 사이로 뛰어 들어서 그들을 순식간에 정리하던 모습까지.

그 모든 상황에서 단유소가 싸우는 모습을 제대로 목격한 사람은 일행 중에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단유소의 움직임이 워낙 빨랐기 때문이다. 자신조차도 눈으로 겨우 좇을 수 있는 빠르기였다.

그때마다 단유소가 보여준 모습들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기만 하다. 아마도 당분간은 그 모습들이 쉽게 지워질 것 같지가 않다.

차원이 다른 고수.

그게 구홍립의 결론이었다.

단유소는 말이 없었다.

다만 그는 최익과 시선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최익이 입을 열었다.

“그는 대답하기 곤란할 겁니다.”

구홍립이 고개를 돌려 최익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아느냐는 눈빛.

이에 최익이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이제는 비마대원이라며 정체를 숨길 수도 없는 입장이니. 후우…….”

한 차례 한숨을 내쉰 최익이 진지한 눈빛으로 구홍립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내용은 무림맹의 기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홍립도 진지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 내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림맹의 의천각에는 비밀감찰단이라는 조직이 있습니다. 명칭만 듣고도 예상이 되시겠지만, 위장 신분을 사용하여 맹 내의 각 조직과 지부 등을 비밀리에 감찰하는 기관입니다.”

“그럼 이 사람이…….”

구홍립이 살짝 커진 눈으로 그렇게 대꾸하자 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절강에 머무르고 있던 것도 절강지부를 감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때까지는 저도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출발할 즈음 의천각에서 기밀문서가 날아왔는데, 유소 저 사람을 작전에 포함시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한 소저나 구 대주께 미리 밝히지 못했던 건 그런 이유입니다.”

“아아…….”

그렇게 대꾸한 구홍립이 잠시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림맹은 거대한 조직이다. 그 조직을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런 단체도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궁금한 점은 남아 있었기에 단유소를 향해 물었다.

“그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강한가?”

그제야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저도 우리 조직원들이 누구인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지금처럼 감찰 임무 말고도 다른 임무들을 수행할 때가 있는데, 제가 맡는 임무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는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는 구홍립을 납득시켜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지어내서 그렇게 대꾸했다.

단유소의 말에 구홍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홍립은 그 후에도 뭔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우리가 자네의 정체를 알고 있었더라면 당시에 결코 자네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네. 뭉쳐야 한다는 그 의견 말일세.”

“이해합니다. 이 일을 하면서 많이 겪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최익이 말했다.

“처음에 적의 시체가 폭발할 때 제게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도 바로 유소, 이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적습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어느 상황 하나, 그가 없었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그때마다 단유소가 없었으면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구홍립이 단유소에게 말했다.

“현월곡이 자네에게 큰 빚을 졌네.”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고마움은 맹에 표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구홍립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단유소가 침묵할 때 구홍립이 다시 물었다.

“아직도 공동파까지는 나흘 거리가 남았네. 우리, 그곳에 도착은 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제야 단유소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행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상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겠지요. 물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홍립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동파가 코앞이니 이제 와서 행선지를 바꿀 수도 없었다. 공동파 쪽에 가까워진 만큼 무림맹 감숙지부나 섬서 땅과는 더 멀어졌다. 그러니 되돌아간다 해도 어차피 위험하긴 매한가지였다.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결국 위험해질 걸 빤히 알면서도 공동파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방향을 약간 선회하는 둥의 궁여지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아까와 같은 적들이 또 나타난다면 자네가 우리를 도와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테고…….”

구홍립의 말에 최익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연히 더 강한 적이 나타날 겁니다. 그들도 우리가 공동파에 도달하기 전에 결정을 짓고 싶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유소 이 사람이 열심히 싸워준다 해도…….”

그 말에 단유소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홍의 청년 이상의 강자가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를 상대해야 한다. 나머지 적들을 일행이 상대해야 하는데, 그러면 지켜주는 일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구홍립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상태로 뭔가를 고민하던 그가 눈을 뜨고 단유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오늘 밤에 함께 고민을 해봐야겠지. 다만 한 가지, 마침 소공녀님이 안 계시니 따로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네.”

단유소는 왠지 구홍립의 부탁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공녀님은 현월곡의 미래일세. 대공자님이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물론 내가 최선을 다해 지킬 것이네. 그러나 도무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자네가 소공녀님을 모셔줬으면 하네.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러는 게 소공녀님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수일세. 시간은……, 내가 벌겠네.”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한설연을 지키겠다는 구홍립의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오면 소공녀님은 절대 나를 두고 떠나려 하지 않을 게야. 그때는 완력을 써서라도 소공녀님을 모시고 떠나게.”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구홍립이 다시 말했다.

“염치없는 부탁임을 알고 있네. 자네의 입장에서도 부담이 크겠지. 하지만 단지 우리 현월곡만을 위해 이러는 건 아닐세. 이 강호 차원에서도 소공녀님 같은 분은 꼭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일세. 그러니……, 부탁하겠네.”

구홍립을 가만히 바라보던 단유소가 대꾸했다.

“만약의 상황이 오면 구 대주님의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다만 제 역량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가 최선의 수일세. 그런 자네의 역량으로도 감당이 안 된다면……, 그 또한 운명이겠지.”

홀로 남은 한설연의 심경은 매우 복잡했다.

치열한 전투였다.

또다시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대거 희생당했다.

일전에 일행이 희생당했을 때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혼자 몰래 눈물도 훔쳤었다.

이번에도 마음은 많이 아픈데 눈물은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도 연이어 겪으니 무감각해져 가는 건가 싶어 죄책감도 들었다.

전투가 치열했기에 육신이 피곤했고,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과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에 관한 생각에 정신은 더 피곤했다.

하지만 자신은 책임자였다.

지쳐서 주저앉은 일행들을 위로하고 달래야 할 사람도 결국 자신이었다. 그래서 구홍립과 단유소 등을 따라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어찌 소공녀님이 미안해하실 일이겠습니까? 당치 않습니다!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씀,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동료들을 죽인 건 그 악당들입니다!”

“먼저 떠난 동료들을 생각하면 저희들도 마음이 아프지만, 단 한 명도 소공녀님을 원망치는 않을 겁니다.”

“처음부터 위험을 각오하고 나선 길입니다! 오히려 저희들이 소공녀님을 더 안전하게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제명에 죽고자 했으면 애초에 강호인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칼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바닥에 들어온 겁니다. 소공녀님과 같이 훌륭한 분을 지키다가 죽는 것 말씀입니까? 단연코 제 일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무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참느라 몇 번이고 이를 악물어야 했다.

딱히 해준 것도 없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곡에 있을 때 모두에게 더 잘해줄 것을.

벅찬 감동과 함께 그런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언제 피곤했었냐는 듯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점이었다.

현월곡의 무인들을 달랜 후, 무림맹 쪽 무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여섯 명이었다.

현월곡 소속도 아닌데 이런 일들을 겪었으니 더 미안했다. 하지만 천망단 무인들의 반응도 현월곡 무인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너무 고마웠다.

조금은 활기차게 변한 분위기 속에서 한설연이 일어서려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저어…….”

눈치를 보며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보다 한두 살 어려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비마대의 마차에 타기 전, 단유소와 함께 자신에게 인사했던 청년이었다.

“우리 전에 인사 나눴었죠? 오필 공자, 맞죠?”

오필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깜짝 놀랐다.

“하, 하, 하, 한 소저께서 저, 저, 저 같은 사람의 이름까지 기억해주시다니……!”

오필은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처음에 인사를 할 때도 저렇듯 말을 더듬었었다.

“제가 기억력에 관해서는 나름의 자신감이 있답니다. 어쨌거나 오 공자께서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 모양이군요?”

“고, 고, 공자라니 다, 당치 않습니다.”

“이미 그렇게 불렀으니 그냥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그나저나, 하려던 말씀이 무엇인지요?”

“그, 그게…….”

오필은 주저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편하게.”

“부, 부탁이라고 해야 할지 소원이라고 해야 할지…….”

어렵사리 말을 꺼내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그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부탁? 소원? 뭐든 기대되는데요? 말씀해보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천망단의 무인들도 호기심을 보였다.

이윽고 오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천하제일미라고 불리는 한 소저의 미모를 직접 보고 싶…….”

그러자 천망단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며 오필의 말을 끊었다.

“이, 이봐!”

“이 사람이!”

“한 소저께 감히 그게 무슨 불경인가!”

오필이 잔뜩 주눅 든 가운데 천망단의 무인들이 난처함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 소, 송구합니다, 한 소저.”

“모,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이 친구가 아직 어려서 사리분별을…….”

오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두의광이 오필을 다그쳤다.

“뭣 하는가? 어서 한 소저께 정중하게 사죄드리지 않고!”

그 말에 오필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한설연은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면사로 가려져 있어 그녀의 표정을 살필 수는 없었지만.

오필이 결국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소, 송구합니다, 소저. 제가 철없이 망발을…….”

“그렇군요.”

오필의 말을 끊은 사람은 한설연이었다.

“그렇겠군요.”

또다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오필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한설연이 말했다.

“잘 말씀하셨어요, 오 공자.”

그녀의 어조가 밝았다.

아직까지도 그녀의 말뜻이 이해되지 않아 천망단원들이 고개를 갸웃할 때, 한설연이 돌아앉으며 말했다.

“모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어서 그녀가 면사를 젖혔고…….

쭈욱― 쭈우우우욱―

천천히 인피면구를 뜯어내는 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그 상황만으로도 천망단원들과 오필의 눈이 휘둥그레진 건 당연했다.

한설연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며 다시 말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그 후 그녀가 얼굴에 뭔가를 바르는 듯하더니, 그 다음에는 뭔가로 얼굴을 닦는 듯했다.

일련의 과정이 끝났을 때, 한설연이 여전히 뒤돌아 앉은 상태에서 말했다.

“괘, 괜히 긴장되네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윽고 그녀가 천망단원들 쪽으로 천천히 돌아앉았다.

그 순간, 오필을 비롯한 천망단원들 모두가 마치 돌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굳었다.

커진 눈, 그대로.

쩍 벌어진 입,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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