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의문의 청년 (3)
단유소가 즉시 산개하여 퇴각하라고 외쳤지만 일행 중에서 움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휘부의 구홍립, 한설연, 최익이 채 명령을 내릴 새도 없이 다섯 명의 강자가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다섯 명 모두 갈색 무복을 입고 검은색의 복면을 착용한 자들이었다.
파바밧!
단유소의 신형이 여러 개의 잔상을 남기며 청년에게서 멀어졌다.
이미 상황이 벌어졌으니 최대한 일행의 근처에서 그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단유소의 등 뒤로 강력한 기운이 날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슈웅―
청년이 발출한 장력이었다.
달려가던 단유소의 고개가 홱 돌았다.
그가 입고 있는 옷 색깔과 비슷한 검붉은 색의 기운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찰나간 단유소의 양 눈썹 사이에 골이 패었다.
자신이 피하면 저 강맹한 장력을 일행이 고스란히 맞아야 하는 상황.
피할 수 없다. 막아야 한다.
단유소가 장력이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신형을 비틀었다. 동시에 호신강기를 끌어올리며 양팔을 교차시켰다.
검붉은 장력이 단유소의 교차된 하박(下膊)에 닿았다.
퍼어엉!
기운과 기운이 격돌하며 폭음을 냈다.
단유소의 신형이 튕기듯 일행들 쪽으로 날아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일행 모두의 눈빛에 놀람과 염려가 담겼다.
그러나 단유소의 눈동자는 차분하기만 했다.
단유소는 청년의 장력에 당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 짧은 순간에도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더 빨리 일행에게 다가갈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진기의 폭발에 의한 반탄력을 이용하여.
휘리리릭―
허공에서 제비를 돌던 단유소가 일행의 바로 앞에서 땅바닥을 디뎠다.
탓!
바닥을 딛자마자 단유소의 신형이 또다시 튕기듯 일행의 좌측으로 이동했다.
갈색 무복을 입은 다섯 명의 적들 중 한 명이 이미 최익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앙!
적의 검과 최익의 검이 강하게 부딪쳤다.
‘큭!’
최익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켰다. 검을 쥔 손아귀가 크게 저려왔기 때문이다.
경공을 펼치는 모습만으로도 이들의 강함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직접 붙어보니 수준 차이가 체감이 되었다. 단 한 번의 격돌이었을 뿐인데도.
슈욱―
적의 검이 뱀처럼 휘어지며 최익의 어깨를 노렸다.
최익이 빠르게 몸을 숙이며 그의 하체를 공격했다.
샤악―
그 순간에 최익의 머리 위로 날카로운 기운 하나가 지나갔다. 원래 최익의 어깨를 노렸던 적의 검에서 검기가 발출된 것이다.
“커억!”
최익의 뒤쪽에서 비명이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최익이 빠르게 확인해보니 자신의 뒤에 서있던 천망단원 한 명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고 있었다.
최익이 이를 악물었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상황을 최대한 줄이고자 어쩔 수 없이 피했었다. 손아귀가 못 버틸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 결과로 부하가 죽은 것이다. 이제는 피하지 말고 최대한 막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긴 했지만, 최익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절망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도 상대를 공격했었다. 그런데 상대는 너무도 간단하게 그 공격을 피했다. 자신의 검은 상대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실력 차가 그 정도였다. 상대가 너무 강했다. 절정에 들어선 자신조차도 이 한 명을 감당하는 게 버거울 정도니, 어찌 절망감이 안 들겠는가.
슈슈슉―
상대가 세 차례에 걸쳐 검을 찔러왔다. 각각 최익의 상단, 중단, 하단을 노리고 있었다.
너무 빨라서 눈으로 좇기도 힘든 속도였지만 최익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채재쟁!
어찌어찌 막았다 싶은 순간.
스윽―
어느새 상대의 검이 옆구리에 닿고 있었다. 이미 막기도, 피하기도 힘들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최익의 입장에서는 역동작에 걸려 제대로 반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상대가 그 점을 노린 것이다.
최익이 이를 악물며 몸을 비트는 동시에 후방으로 신형을 뺐다.
그러나 역부족.
결국 베어오는 검의 사정권 안이었다.
결과가 예상되어 최익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질 때였다.
푸욱!
갑자기 상대의 가슴을 뚫고 검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누군가가 상대의 등을 찌른 것이다.
상대의 신형이 무너지며 그 뒤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최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유소!’
놀라웠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상대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도 없었다. 상대 또한 자신이 어떻게 죽은지도 모르고 죽은 눈치였다.
‘그런데 어느새……!’
단유소는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건가.
여전히 놀란 상태의 최익을 바라보며 단유소가 말했다.
“일전에 제가 드렸던 부탁, 잊지 말아 주십시오.”
오필에 대한 당부일 것이다.
최익이 채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단유소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단유소의 몸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최익이 보니 검붉은 그림자 하나가 긴 꼬리를 남기며 일행의 정면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단유소와 마주 서 있던 홍의(紅衣) 청년이었다.
그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단유소가 그를 막으러 나아가는 중이었다.
단유소가 떠난 후에야 최익이 중얼거렸다.
“반드시…… 지키겠네.”
사실, 처음에 최익보다 더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던 사람은 구홍립이었다.
최익이 갈색 무복을 입은 자 한 명을 상대하고 있을 때 구홍립은 두 명을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유소가 최익을 먼저 도운 이유는 비단 친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구홍립 주변의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기척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기척들이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격한 채로 일행을 따르던 바로 그 기척들이었다. 현월곡주가 한설연을 보호하기 위해 은밀히 보냈을 것이라 짐작되는 바로 그들이었다.
어차피 그들이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최익 쪽으로 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결국 나섰고 구홍립은 일단의 위기를 모면한 모양새였다.
“은월조입니다. 곡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저는 석문이라 하고 나머지는 수하들입니다.”
그 목소리가 들릴 때쯤에는 이미 홍의 청년이 일행의 정면으로 짓쳐들고 있었다.
단유소가 측면에서 그를 막아갔다.
홍의 청년의 검에도, 단유소의 검에도 기운이 잔뜩 맺혀 있었다.
두 개의 검이 부딪쳤다.
콰앙!
고막을 울리는 폭음이 들렸다.
단순한 쇠붙이와 쇠붙이의 격돌이 아니었다. 강력한 진기와 진기의 격돌이었다. 그게 바로 폭음이 발생한 이유였다.
커다란 폭음이었던 만큼 그 여파도 적지 않았다.
거센 풍압이 일행을 휩쓸고 지나간 가운데, 일대에는 흙먼지와 풀잎 같은 것들이 잔뜩 비산한 상태였다.
카앙! 캉! 콰앙!
시야가 가려진 와중에도 그 안에서는 계속해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는 와중에 서서히 시야가 걷혀갔다.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홍의 청년과 단유소는 이미 이십여 합을 주고받은 상태였다. 두 사람 모두 그 정도의 고수들이었다.
싸우는 중에도 홍의 청년은 특유의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단유소를 보는 그의 눈빛에는 흥미로움만이 가득했다. 여유로웠다.
그 여유만큼이나 청년은 강했다.
내공, 기술, 속도, 실전 감각 할 것 없이, 모든 게 제대로 갖춰진 고수였다.
쾅!
다시 한번 격돌한 후에 단유소와 홍의 청년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를 벌렸다. 탐색전은 끝났으니 이제 승부를 내야 할 때라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홍의 청년이 검을 옆구리 사이에 끼더니 그 상태로 단유소를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역시 대단해!”
단유소는 묵묵히 홍의 청년을 응시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홍의 청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직접 붙어보니까 진심으로 탐나는데? 어때? 우리 쪽에 합류하는 건? 당신 정도면 뭐든 해줄걸? 쥐꼬리만 한 무림맹 봉급하고는 차원이 다를 거야. 인생이 완전 달라진다고.”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한가하게 대화나 나누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뒤에서 추격해오던 수백 명의 적들이 당도하여 후방에서도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은월조라고 스스로를 밝힌 자들도 갈색 무복의 적들에게 밀리는 형국이었다.
결국 눈앞의 홍의 청년을 빨리 처치하는 것이 일행을 돕는 길이었다.
단유소가 씩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솔깃하군.”
“그렇지? 당신은 역시 말이 통하는……. 헙!”
청년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놀랐다.
단유소가 갑자기 움직였기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다. 그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니까.
청년이 놀란 정확한 이유는 단유소의 말도 안 되는 빠르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파악했던 단유소의 속도와 지금의 속도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그야말로 눈 깜빡한 순간, 그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슈아악―
단유소의 검이 홍의 청년의 가슴을 찔러갔다.
청년이 급하게 신형을 뒤로 뽑으며 자신의 검으로 단유소의 검을 쳐내려 했다.
검과 검이 닿는 순간, 단유소의 검신에 검은 기운이 맺혔다가 사라졌다. 혼원태극공의 효과였다.
챙겅―
옆에서 쳐내려던 홍의 청년의 검이 오히려 단유소의 검에 의해 잘려 나갔다.
그에 반해 단유소의 검이 나아가는 경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단유소의 검이 청년의 가슴을 찔렀다.
푹!
홍의 청년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단유소가 검을 뽑았다.
청년의 신형이 그대로 무너졌다.
풀썩!
그의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가 순식간에 땅바닥을 적셨다.
“후, 후후…….”
청년은 땅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도 웃고 있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저 미소라니.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던 단유소가 이윽고 돌아섰다. 그가 막 한 걸음을 떼었을 때 뒤에서 청년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시작에 불과…….”
단유소가 눈을 감았다.
그의 말이 허언일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결코 허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눈앞의 위기를 넘겨야 할 때.
검을 검집에 넣은 단유소가 또다시 두 자루의 묵색 소검을 꺼내었다. 곧 단유소의 신형이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 * *
전투가 끝날 때쯤, 그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시체를 비롯하여 얼마 남지 않은 흑의인들의 피부색이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설연 일행은 그 즉시 전장을 이탈하여 달렸다. 충분히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까지 달린 후에야 구홍립이 일행을 멈추게 했다.
그곳에서 남은 일행을 세어보니 스물한 명이었다. 그나마도 은월조를 합한 숫자였다.
은월조라고 해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타날 때는 일곱 명이었는데 남은 인원은 세 명이었다.
“일단 대기하며 휴식.”
구홍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행 모두가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고수, 하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모두의 시선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단유소였다.
이제 단유소를 일개 비마대원으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싸우는 모습을 모두가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때마침 구홍립이 단유소에게 다가갔다.
“잠시, 나 좀……, 보세.”
그 말에 단유소가 순순히 일어섰다. 그러자 최익도 얼른 일어나 두 사람 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에도 한설연은 멍하니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소공녀님.”
구홍립이 낮은 음성으로 한설연을 불렀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구홍립이 조용히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최익과 단유소가 그 뒤를 따랐다.
근처의 공터에 다다르자 구홍립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는 그 상태로 서서 한동안 묵묵히 단유소를 바라보기만 했다.
단유소도 말없이 구홍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구홍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든 걸 젖혀두고……, 일단은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네. 자네가 우리 모두를 구했네. 진심으로 고맙네. 이 한마디 말로 감사를 표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지금은 그 말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으이.”
말하는 내내 구홍립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단유소가 대답 대신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단유소를 잠시 바라보던 구홍립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