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7화 (17/200)

17화. 그와의 재회 (2)

묵룡으로서의 임무는 일단 한설연을 지키는 것.

그렇게 따지면 그녀의 근처에 있게 된 건 매우 잘된 일이었다.

다만,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말한 것과는 별개로, 한설연과 구홍립을 처음 대면한 단유소의 감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이 일행의 숫자가 지금처럼 반 이상 줄어 있는 게 결국은 두 사람 탓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결과는 결과.

돌이킬 수 없다면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어제 최익에게 전해 들었는데, 상황이 발생한 후의 이들의 대처 자체는 썩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그나마 그 정도라도 믿고 나아갈 수밖에.

한설연으로서는 단유소의 얼굴을 보는 게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살짝 반가움 비슷한 마음도 들었다.

간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했다.

주선연 당시에 보았던 모습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당시에 자신의 앞에서 보였던 어정쩡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무림맹의 비마대원으로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적어도 여태껏 자신에게 각인되어 있던 인상과는 분명히 달랐다.

“오르시지요.”

단유소의 말에 한설연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마차에 올랐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꺼내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혹시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봐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아아! 이럴 것 같아서 어지간하면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건데! 괜한 마음에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쓸 것 같아서!

게다가 마음도 편치 않았다.

자신의 주변에 있던 일행들이 희생된 건 이제 가정이 아닌 현실이었다. 단유소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직접 얼굴을 대면하고 나니 그 생각이 들어 마음이 더 심란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을 할 때의 단유소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이 자꾸만 떠올라, 괜히 미안한 마음이 더 들었다. 굳이 자신이 미안해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도.

한설연이 마차 안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밖에서 구홍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네 이름이 단유소라 했는가?”

마치 파악이라도 하듯 한동안 단유소를 가만히 바라보던 구홍립의 첫마디였다.

단유소가 대꾸했다.

“예, 대협.”

“무림맹 본맹 소속이라지?”

“그러합니다.”

단유소의 말에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구홍립이 입을 열었다.

“자네였겠군. 일전에 일행이 간격을 좁혀야 한다고 의견을 말했다던 사람이.”

“예. 비마대 동료들 중에 근래 이 부근에서 녹림도와 마주친 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었습니다. 저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그런 차원에서 최 대협께 의견을 말씀드렸던 겁니다. 돌이켜보니 제가 주제넘게 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구홍립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아닐세. 어찌 되었건 자네의 의견을 들었더라면 더…… 좋았을 일이었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인 구홍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 지역의 지리를 잘 안다지?”

“이 넓은 땅을 제가 어찌 다 알겠습니까. 잘 아는 정도는 아니고 익숙한 길이 몇 군데 있을 뿐입니다.”

“그 정도면 많이 아는 게지. 어쨌거나 빠르고 좋은 지름길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주게나. 최대한 반영토록 할 것이니.”

“알겠습니다.”

길지 않은 대화였고 아직은 첫인상 단계지만, 구홍립은 단유소라는 청년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우선 한설연과 자신을 처음으로 마주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은 어떻게든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말이든, 표정이든, 눈동자든 최대한 바꿔가며.

‘아마도 무림맹 본맹에서 근무하는 탓이겠지. 강호의 명숙들을 숱하게 접했을 것이고 실제로 많은 유명인들을 마차에 태워봤을 테니까.’

마음에 든 건 비단 그의 눈빛만이 아니었다.

공손하되 지나치지 않은 그의 어조와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가만히 지켜보니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의 자세도 반듯했다.

사람들이 괜히 무림맹, 무림맹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개 비마대원의 모습이 이 정도면 나머지는 안 봐도 훤했다. 아랫사람을 보면 윗사람을 알 수 있고, 나아가서는 각각의 구성원이 보여주는 모습을 통해 조직 전체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니까.

구홍립이 이윽고 말안장 위에 올랐다.

“이제 슬슬 출발하지. 다른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자네가 알아서 속도를 조절하게. 우리가 맞출 테니까.”

“예.”

단유소가 말고삐를 한차례 털자 마차가 산지의 소로를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오르막을 지난 직후부터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 * *

공동파를 향해 출발한 후로 꼬박 사흘이 지났다.

우려와는 달리 그 기간 동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다. 나흘 전의 참사가 마치 거짓이었다는 듯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전에 연락이 두절되었던 정찰조의 흔적도 살폈다. 선발조도 살펴봤고 본대도 살펴봤다. 하지만 일행의 이동 경로 근처에서는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설연은 이동 속도를 줄이면서라도 수색 범위를 넓히자는 쪽이었다. 최대한 정찰조의 흔적을 찾아보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구홍립과 최익이 반대했다.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저희들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여태껏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들이 무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지금은 남은 인원들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계획했던 대로 무림맹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한번 조사를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한설연이 뜻을 굽혔다.

산속에 어둠이 깔릴 즈음 일행이 이동을 멈추었다.

일각 후 월혼대원 한 명이 마차로 다가와서 야영 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한설연이 마차에서 내렸다. 평소처럼 검은색 면사를 착용한 채였다.

단유소가 그녀에게 목례했다.

“편히 쉬십시오.”

그러자 한설연이 단유소를 향해 말없이 목례하더니 월혼대원을 따라 걸어갔다.

단유소의 시선이 그녀의 뒷모습에 머물렀다.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이상하단 말이야.’

한설연을 마차에 태운 후로 지난 삼 일간, 단유소는 꼬박꼬박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어찌 되었건 지금은 그녀가 윗사람이니 아랫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그때마다 한설연도 정중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한데 그녀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어 대꾸한 적이 없었다. 그녀의 목소리 자체를 아예 들어본 적이 없었다.

구홍립이나 최익과 논의할 일이 있을 때는 일행과 떨어져서 했다. 물론 그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휘부의 회의니까.

혹시나 싶어서 엊저녁에 최익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는 무슨 어이없는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한설연은 말도 잘 할 뿐더러 듣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목소리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앞에서는 한 마디도 안 하니 그게 이상했다.

참고로 몰래 안력을 돋워 면사 안의 얼굴도 이미 확인했다. 알려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아닌 것으로 보아 인피면구를 착용한 모양이었다.

얼굴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가린 상태로 목소리마저 감출 필요가 있나 싶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최대한 신비로움을 유지하려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때문에 한설연이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유소의 시선은 계속해서 그녀의 뒷모습에 고정된 상태였다.

‘저 뒷모습,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단 말이야.’

그녀를 처음 본 날부터 이랬다.

정확히 뭐가 낯익은가 하고 자문해보면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건 단지 느낌이나 분위기 같은 쪽이니까.

잘못 봤겠지. 착각이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렸었다. 초면인 한설연을 익숙하다고 느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

그런데 다음 날에도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다. 사흘째인 오늘은 더했다.

단유소가 연신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그의 시선 끝에 걸려 있던 한설연의 뒷모습이 이윽고 사라졌다.

* * *

단유소와 마주칠 때면 주선연 당시에 그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아마도 일생에 유일하게 겪어본 주선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소저의 눈에 비친 제 모습이 여러모로 부족해 보였을 거라는 점,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여드린 모습들만이 다는 아닙니다. 더 많은 것들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한 소저께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주선연의 마지막 순간에, 계속 만나고 싶다며 그가 했던 말이었다.

그리고 지난 사흘간 그가 끄는 마차를 타본 결과, 적어도 한 가지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모네.’

분명히 좌석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현월곡의 마차가 훨씬 편했다. 게다가 단유소가 모는 마차의 좌석은 간이 좌석이었다. 그럼에도 간이 좌석에 앉아 있는 게 더 편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무림맹 비마대는 강도 높게 이런 훈련을 한다고 들었다. 확실히 다르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마 그는 나를 이상한 여자로 보고 있을 텐데…….’

조심한답시고 여태까지 그의 앞에서는 목소리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

사실, 단유소의 눈썰미가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조심하고 싶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현월곡의 한설연이 무림맹의 이름 모를 비마대원과 주선연을 했다?

만약 들켜서 그게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다.

개망신이다.

그 망신이 자신 안에서만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문제는 현월곡 전체와 사부님에게도 크게 누를 끼치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런 생각에 초반에 조심하며 입을 열지 않았던 건데, 어쩌다 보니 그게 계속 유지되어 온 것이다.

면사 안에서 한설연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불편해애애! 이래서 그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 했던 거라고!’

한설연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는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먼 하늘 위를, 매 두 마리가 고고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매들을 바라보는 한설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 * *

하루의 고된 여정으로 인해 일행 모두가 곤히 잠들어 있는 시각, 단유소가 조용히 눈을 떴다.

누운 상태에서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의 위치를 가늠해보니 자정 전후쯤인 듯했다.

단유소가 잠에서 깬 이유는 감각의 영역에 미세한 살기가 잡혔기 때문이었다.

칠성의 경지를 넘어선 대라유유선공의 효과였다. 굳이 실제로 대라유유선공을 운용하지 않아도 나타나는 지속 효과라고 해야 할까.

완전히 곯아떨어지거나 몸에 이상이 있지 않는 한, 어느 정도의 긴장감만 유지한 채로 잠에 들어도 이렇듯 위험한 기운이 감지되곤 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서 때때로 맹수들의 살기도 감지되어 잠에서 깨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큰 상관은 없었다. 고수가 된 후로 어차피 생각보다 적게 자도 피로가 크게 누적되지는 않으니까.

스윽.

조용히 상체를 일으킨 단유소가 서서히 대라유유선공을 활성화시켰다. 위험한 기척의 정체를 감지하고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는 단유소의 양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기척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아니 백 명이 훨씬 넘는다……!’

그 기척들이 일행의 야영지를 향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눈을 번쩍 뜬 단유소가 옆에서 자고 있던 오필의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필아.”

“으으으음…….”

“일어나, 빨리.”

결국 잠이 가득한 눈매를 찡그리며 오필이 반응했다.

“뭐예요……, 단형…….”

오필이 몸을 일으키자 단유소가 진지한 눈동자로 오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신 차리고 잘 들어. 우리는 곧 위험해질 거야.”

그러자 여전히 잠이 깨지 않아 인상을 찡그린 채로 오필이 말했다.

“아유, 진짜……. 잘 자고 있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그러자 단유소가 양 손바닥으로 오필의 볼을 가볍게 때렸다.

짝!

오필의 눈이 놀람으로 인해 커진 가운데 단유소는 그의 볼에 댄 두 손을 떼지 않았다.

그 상태로 오필의 시선을 고정시킨 후에 단유소가 쏘아보듯 그를 바라보며 빠르게 말했다.

“곧 위험해질 거라고!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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