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와의 재회 (1)
단유소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최익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돌이켜 보면 단유소가 이 일행의 일에 개입했던 건 딱 두 번이었다.
한 번은 일행이 최대한 뭉쳐야 한다는 의견을 냈을 때였다. 그의 말을 들었다면 일행의 피해는 훨씬 줄었을 것이다. 그 부분은 한설연과 구홍립도 이미 인정하는 바였다.
또 한 번은 아까 시체들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전음으로 알려주지 않았다면 일행은 독안개를 피하지 못하고 대부분 죽었을 것이다.
그런 단유소가 확신하듯 말한 것이다.
이 일행이 어디로 가든 목적지에 도착할 확률이 거의 없을 거라고.
그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심정적으로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튼 소리나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오히려 그가 하는 말이라면 일단 믿고 보는 게 이롭다는 사실을 잘 아니까.
문득 그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우리 일행의 힘으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 때 대협께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오필 그 아이, 꼭 살려서 귀가시켜주십시오.”
그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간 함께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게 있었다.
그것은 아직 이십 대에 불과한 그의 무공이 자신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었다.
평소에 자연스럽게 풍겨지는 분위기도 그랬고, 실제로도 그는 저 어린 나이에 의천각의 비밀감찰단원이었다. 의천각은 맹주전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조직이다. 들어가고 싶다고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짐작에 근거하여 단유소에게 말했었다.
꼭 살리고 싶은 사람이면 자네가 직접 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단유소는, 그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 정도의 위기 상황이라면 누군가는 시간을 벌어야 할 겁니다. 저는 그런 일에 경험이 좀 있습니다. 게다가 최 대협께서는 챙겨야 할 부하들도 있잖습니까.”
그의 표정이 매우 진지했기에 결국 그러마고 대답은 해주었다.
하지만 모르겠다.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발걸음이 떨어질지는.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어느새 야영지에 도착했다.
모닥불 옆에 조용히 눕긴 했지만, 왠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밤이었다.
* * *
다음 날 묘시초(卯時初, 오전 5시).
미리 파둔 구덩이에 어제 수습했던 아군의 시신을 묻었다. 볕이 잘 들 법한 산등성이였고,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구덩이를 흙으로 덮는 내내 모든 일행이 각자의 무기를 든 채로 경건한 예를 취했다. 시종일관 무거운 침묵이 유지되었다. 현재의 여건상 이 정도가 사자(死者)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예(禮)였다.
그리고 반 시진 후, 한설연 일행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목적지는 공동파였다. 짧으면 엿새, 길면 이레에서 여드레 정도 되는 거리였다.
어둡지 않을 때에 최대한 많이 이동한다는 게 일행의 계획이었다. 어차피 며칠 지나면 공동파에서 푹 쉴 수 있을 테니 당분간은 이동 속도를 높이기로 했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일행은 뭉쳐서 움직였다.
이제는 다 합해봐야 오십 명 남짓의 인원만 남았다.
최소한의 정찰은 필요했기에 정찰조 겸 선발조의 개념으로 월혼대원 몇 명을 투입하긴 했다. 그들은 약 한 식경(食頃, 밥 한 끼를 먹을 정도의 시간, 약 30분 전후) 정도의 거리 앞에서 이동 중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그야말로 최소한의 간격만을 유지하게 한 것이다.
“놀랍지 않아요, 단 형? 여태 우리와 동행했던 그 현월곡의 주요 인사가 바로 한설연 소저였다니! 세상에!”
오필은 한껏 들떠 있었다.
이해는 되었다. 강호의 유명 인사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한설연이니까. 오필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유명 인사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광스러운 일일 테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건 새벽의 일 때문이었다. 장사를 지내는 과정에서 한설연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자리에서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오필은 그 여인이 한설연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송채령이나 한설연 중에서 한 명일 거라는 강한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일로 옆에서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방금 전에 이동 상황 점검 차, 최익이 다녀갔다.
그때 오필이 최익에게 당돌하게 물었던 것이다.
송채령이거나 한설연일 것 같은데 둘 중 누구냐고. 이쯤 되었으니 적어도 자신이 누구를 모시고 있는지는 알고 싶다고.
그러자 단유소는 살짝 당황한 최익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최선을 다해 오필을 살릴 생각이지만, 앞으로의 상황이 어찌 될지는 모른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필도 알 자격이 있었다.
만약의 불상사가 생길 경우, 적어도 자신이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아야 할 테니까.
어차피 오필만 모르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천망단원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결국 최익이 얘기해주었다. 일급 기밀임을 철저하게 주지시키면서.
그게 방금 전이었다. 그래서 오필이 이렇게 들떠 있는 것이다.
“그러게. 놀랍네.”
“으잉? 무슨 반응이 그래요? 그게 어디 놀란 사람의 반응이에요?”
“놀라운 건 놀라운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변하는 것도 없잖아.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서로 볼 일은 거의 없을 거고.”
“그래도 한설연 소저씩이나 되는 사람과 동행이라도 한다는 게 어디에요?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다른 세계 사람이야.”
“와! 진짜 매번 느끼는 거지만 단 형은 너무 현실적이라니까? 낭만이 없어, 낭만이.”
“낭만 같은 소리 한다.”
두 사람이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때였다.
저만치 앞서 말을 타고 가던 천망단원, 두의광과 이태가 말을 돌려서 다가왔다.
“잠시 정지. 앞쪽에 사소한 문제가 생긴 것 같소. 약간 이르긴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일단 휴식을 취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소.”
한설연이 타고 가던 마차의 한쪽 바퀴가 갑자기 부서진 건 오시초(午時初, 오전 11시) 무렵으로, 일행이 출발한 지 두 시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위험할 수 있는 사고였지만 안에 타고 있던 구홍립과 한설연은 다행히 다치지 않았다. 위험을 감지한 순간에 문을 박차며 경신법을 써서 공중으로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고수다운 대처였다.
마침 오르막이었기에 마차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마차를 몰던 월혼대원이 자책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노상의 장애물들을 번번이 못 피한 탓입니다. 제가 마차를 몰아본 경험이 부족하여…….”
“아니, 그래도 이 사람아! 조심 좀 할 것이지……!”
구홍립의 언성이 높아진 이유는 자칫 한설연이 다칠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구홍립을 막아선 사람은 다름 아닌 한설연이었다.
“그만하세요. 이분 탓이 아니잖아요, 구 대주님.”
구홍립을 진정시킨 한설연이 월혼대원에게 말했다.
“우린 괜찮아요. 다치지도 않았고. 그러니 자책할 필요 없어요. 다친 덴 없으시죠?”
한설연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월혼대원이 대꾸했다.
“예, 소공녀님. 다시 한번 송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 떨리고 있었다.
이전까지 한설연의 마차를 몰아왔던 월혼대원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어제 그 일 때문이었다.
그래서 임시로 다른 대원으로 하여금 마차를 몰게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확실히 기마술과 마차를 모는 일은 다른 모양이었다.
월혼대원이 물러가자 한설연이 구홍립에게 말했다.
“이왕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중식을 좀 앞당겨서 먹을 겸, 모두를 쉬게 하는 게 좋겠어요. 이참에 마차 상태도 확인하고요.”
“그렇게 이르겠습니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와 한설연의 마차를 가만히 살피던 최익이 말했다.
“마차 바퀴가 완전히 파손되었습니다.”
“바퀴라면 여분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최익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앞바퀴 축과 지지대 부분이 완전히 나갔습니다. 상태를 보아하니 고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듯합니다.”
“으음…….”
면사로 가려진 한설연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길을 재촉하기도 바쁜 시간에 하필이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냥 시간을 축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최익의 말에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었다. 어젯밤과 같은 일이 언제고 또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낮이든, 밤이든.
한설연의 분위기를 살피던 최익이 말했다.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한 소저께서 마차를 바꿔 타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예?”
한설연이 무슨 뜻이냐는 어조로 되물었다.
“저희 비마대의 마차 말입니다. 현월곡의 수송 마차와는 달리 작은 마차인 데다가 가죽 가림막으로 천장을 덮을 수도 있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충분히 남들의 시선을 가릴 수 있을 겁니다. 조금 불편하긴 하겠으나, 간이 좌석도 갖춰진 다용도 마차입니다.”
한설연을 생각해서 한 말이었다. 마침 이렇게 되었으니 단유소가 끄는 마차를 탄다면 그녀도 더 안전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근거리에 절정 급의 고수가 한 명 더 배치되는 거니까.
그러자 한설연이 물었다.
“그 마차에는 짐이 실려 있지 않나요?”
한설연은 최익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꺼려졌다. 그 마차를 몰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단유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음도 불편했다.
마차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적습을 받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죽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 않아도 괜히 이번 일에 얽힌 꼴이 된 단유소였다. 대놓고 그런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육포와 건량 따위였는데,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각자의 몫을 미리 배급하여 무게를 줄여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러자 옆에서 구홍립이 거들고 나섰다.
“어쩔 수 없습니다. 최 대협의 의견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그게…….”
한설연이 뭐라고 말하려 할 때 구홍립이 곧바로 최익에게 물었다.
“전에 보니 그리 큰 마차는 아니더군요. 저까지 타기는 힘들겠지요?”
“예. 아무래도 한 소저만 타시고 구 대주께서는 말을 이용하셔야 할 듯합니다.”
“상황이 이런데 어쩌겠습니까. 저는 상관없습니다. 제가 말을 타고 마차의 앞에 위치하면 되겠군요. 그 비마대원들, 마차는 잘 몰지요?”
“허허허. 비마대원들은 기본적으로 밥 먹는 것보다 마차 모는 게 더 쉬운 사람들입니다. 입맹하면 마차 모는 교육부터 중점적으로 받지요. 여러 상황에 대비한 모의 훈련도 필수고요.”
농담조로 말했지만 최익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 말에 구홍립이 웃으며 수긍했다.
“허허. 하긴, 그렇겠군요.”
“다만, 대원 한 명은 입맹한 지 오래 되지 않은 신입이라 경험이 아직 부족합니다. 본맹에서 파견을 나온 대원에게 마차를 맡기고 신입은 말을 이용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본맹에서 파견 나온 대원이라면 전에 그 의견을 제시했다던…….”
“예, 그렇습니다.”
최익이 대꾸하자 구홍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이 근처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라니 더 믿음직합니다.”
그렇게, 한설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론이 내려졌다.
마차에 싣고 있던 육포와 건량을 천망단원들에게 분배한 후에 오필이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요? 마차를 버리고 걸어서 이동이라도 하겠다는 걸까요?”
“글쎄다.”
단유소로서도 따로 아는 게 없었다. 두의광이 와서 지시를 전달했고, 그 지시에 따를 뿐이었다.
“설마 우리도 무사님들과 함께 뛰어가라는 건 아니겠죠? 적어도 말이라도 몰게 해주겠죠?”
“정확한 지시가 내려와 봐야 알지.”
“걸어서 이동하는 거라면 정말 자신 없는데…….”
오필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경신술을 펼치는 무인들을 두 다리로 쫓아가야 하는 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에게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단유소가 말했다.
“설령 그런 상황이라도 알아서 배려해주시겠지. 설마 떼놓고 가기야 하겠냐.”
“참 태평하셔, 우리 단 형은. 매사가 무사태평이셔. 오래 사시겠어, 아주. 걱정할 일 없어서.”
“이 자식이……!”
“푸헤헤! 농이에요, 농!”
두 사람이 그러고 있을 때였다.
마차의 전방에서 세 사람이 다가왔다.
단유소가 보니 앞장선 두 사람은 최익과 구홍립이었다. 면사를 착용한 한설연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윽고 세 사람이 단유소와 오필 앞에 섰다. 최익이 말했다.
“먼저 인사부터 하지. 이분이 현월곡의 월혼대주 구홍립 대협이시고 뒤에 계신 분이 한 소저시네.”
“단유소라 합니다.”
단유소가 짧게 자신을 소개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두, 두 분을 뵙게 되어 여, 영광입니다. 오, 오필이라 합니다.”
오필은 크게 긴장하여 연신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구홍립이 대꾸했다.
“반갑네. 구 모라고 하네.”
그의 뒤에 서 있는 한설연은 공손히 고개만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간단한 소개가 끝나자 최익이 말했다.
“부탁할 게 있네.”
입을 연 최익이 짧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서 유소 자네가 그 일을 맡아줘야겠네.”
짧은 순간, 단유소와 최익의 시선이 마주쳤다. 단유소는 최익의 의도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이윽고 단유소가 짐짓 결연한 척 대꾸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