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첫 전투
어느새 단유소가 도착한 곳은 최익의 야영지였다.
그가 어둠 속에 숨어서 야영지를 살폈다.
여느 때라면 최익이 천망단의 무인들 몇 명과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확인을 마친 단유소가 다시금 신법을 펼쳤다.
이윽고 그의 눈에 또 다른 야영지가 보였다. 야영지의 가장자리에 마차도 보였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한설연이 타는 마차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일행에 마차는 세 대뿐이기 때문이다. 현월곡의 수송대에서 한 대, 무림맹 비마대에서 한 대 그리고 한설연의 마차가 한 대.
눈앞의 야영지도 비어 있었다.
집중하여 주변의 기척을 감지해보았음에도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단유소가 어둠 속에서 나와 야영지를 살폈다.
수십 명이 어디론가 이동한 흔적이 보였다.
예정 경로상의 전방이었다.
단유소의 몸이 튕기듯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
얼마간을 달렸을까.
멀리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단유소가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나아갔다.
채쟁! 챙! 챙!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단유소가 속도를 줄이며 기척을 감췄다. 곧 그의 몸이 전장이 보이는 덤불 뒤의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두 무리가 한데 엉켜 싸우고 있었다.
한 무리는 동일한 복장이었다. 흑의를 입고 동색의 복면을 착용한 자들이었다.
다른 한 무리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거의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그들이 바로 현월곡의 무인들과 천망단원일 것이다. 최익도 그들의 중간에서 맹렬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상황이 좋지 않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이 전투에 개입했겠지만 가만히 보아하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전세가 이미 아군 쪽으로 기울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의 머릿수 자체는 비슷했지만 아군이 차분하게 대처하며 흑의인들의 숫자를 빠르게 줄여가고 있었다. 특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숫자를 따지면 흑의인들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차피 일행의 실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파악해둬야 했다. 차분히 관찰할 기회는 흔치 않았다.
단유소의 시선은 어느새 최익에게 머물러 있었다. 친분이 있는 사이인 만큼 가장 먼저 눈이 갔다.
최익이 검술을 펼치는 모습과 싸우는 모습은 정석에 가까웠다. 정파인의 검술이 보여주는 정석이라고 해야 할까? 강렬함과 부드러움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검술조차도 그의 성격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유소가 판단할 때 최익의 경지는 절정의 초입 정도로 보였다. 현 강호에서는 보통, 검기를 일으키는 경지를 일류, 검에 맺힌 기운을 발출할 수 있는 경지를 절정이라 불렀다.
절정 고수는 강호의 어디에서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고수들이다. 최익이 무림맹 절강지부의 천망단에서 숨은 실력자로 통한다는 오필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것 같았다.
단유소가 시선을 옮겼다.
백 명을 훌쩍 넘는 인원들이 얽혀 있는 전장에서 최익과 함께 발군의 실력을 뽐내고 있는 사람이 두 명 더 있었다.
한 명은 챙이 넓은 죽립을 쓰고 있는 사내였다. 움직이는 도중에 잠깐씩 드러난 그의 얼굴 아랫부분을 보니 삼십 대 후반쯤으로 추정되었다.
그 사내의 검은 매우 날카롭고 실전 지향적인 느낌이었다. 실상 그 사내의 검에 의해 흑의인들이 가장 많이 쓰러져 나가고 있기도 했다.
‘확실한 절정 고수.’
그게 단유소의 평가였다.
현월곡에서 강자로 유명한 사람은 네 사람이다.
현월곡주 단목수헌, 대공자 진소학, 월혼대주 구홍립 그리고 비월단주 엄주평이다.
네 사람 모두를 한 번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일단 단목수헌과 진소학은 아니었다. 아마도 구홍립과 엄주평 중 한 사람일 것 같았다.
마지막 한 사람은 나비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춤추듯 검을 휘두르고 있는 가냘픈 인영이었다. 흑색의 면사를 쓰고 있는 그녀가 바로 한설연일 것이다.
역시나 그녀는 실전 경험이 가장 부족해 보였다. 하긴, 그녀가 언제 실전을 경험해봤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위태로운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기초가 탄탄히 잡힌 검술이었다. 응용력도 좋아 보였다.
단유소가 볼 때 그녀도 최익처럼 절정의 초입 정도로 보였다.
초입이라도 절정의 경지에 오르는 건 운 따위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어렸을 때부터 영약을 밥 먹듯이 먹었다 해도, 아무리 오성이 뛰어나다 해도 쉽게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피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한설연의 나이는 아직 이십 대 초중반이라 했다. 그 어린 나이에 절정의 초입에 올랐다면 그만큼 독하게 수련했다는 증거였다.
여러 면으로 빼어나다던 그녀의 능력 중에 적어도 무공에 관한 부분만큼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설연으로서는 첫 실전이었다.
아직 흑의복면인들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보아하니 그들은 일류와 이류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상대하기가 버겁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곡의 무사들이 많이 쓰러졌다. 죽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다.
그게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촤앙―
한설연이 정면에 있던 흑의인의 가슴에서 검을 뽑자마자 몸을 낮추었다.
머리 위로 적의 도가 스쳐 지나갈 때 그녀가 몸을 반 바퀴 회전하며 검을 횡으로 그었다.
스악!
흑의인의 옆구리가 갈라질 때 그녀는 이미 낮게 도약하며 측면을 향해 검을 찌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이 빛무리를 머금었다가 사라졌다 싶은 순간.
슈욱―
검기가 측면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그 직후, 세 걸음 떨어져 있던 적의 가슴이 뚫렸다.
“큭!”
적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니 흑의인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 있었다.
끝이 보인다는 생각 때문인지 곡의 무사들도 더 맹렬하게 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제발 더 이상은 죽거나 다치지 말아요.’
한설연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그녀를 향해 세 명의 흑의인들이 달려들었다.
정면에서는 도(刀)가 한설연을 양단할 듯 수직으로 베어오고 있었고 좌측후방에서는 검이, 우측후방에서는 창이 찔러오고 있었다.
삼면 협공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범상치 않았다.
한설연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일단은 포위 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녀가 정면으로 나아가며 양단해오는 도를 흘리듯 피했다.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스윽―
그 순간, 도의 진행 방향이 바뀌었다.
도가 속도를 유지한 채로 그녀의 허리를 양단할 듯 쫒아왔다.
창과 검으로 공격해오던 흑의인들도 빠르게 이동하며 다시금 한설연을 포위했다. 그 상태로 창과 검이 각각 그녀의 상체와 하체를 찔러왔다.
한설연이 검을 세워 휘둘러지는 도를 가로막았다. 그 반동을 이용해 빠져나가려는 심산이었다.
카앙!
검과 도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헙!”
한설연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도에 실린 힘이 컸기 때문이다. 검을 쥔 그녀의 손목이 틀어졌다.
당황한 찰나 양측 후방에서 창과 검이 찔러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직 찔리지도 않았는데 아찔했다.
얼떨결에 그녀가 허공으로 높이 도약했다.
아래를 보니 어느새 구홍립과 최익이 다가와 있었다.
그들이 발출한 검기에 의해 창과 검을 찔러오던 두 흑의인이 쓰러지고 있었다. 이어서 도를 휘두르던 흑의인의 가슴에 구홍립의 검이 박혔다.
착!
한설연이 착지했을 때 최익이 서둘러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예? 예, 괜찮아요.”
그러자 흑의인의 가슴에서 검을 뽑으며 구홍립이 물었다.
“다친 덴 없으시고요?”
“예. 없어요. 두 분, 감사해요.”
최대한 태연한 척 대꾸했지만 심장은 아직도 쿵쾅거리고 있었다.
찰나의 방심, 잠깐의 당황.
그리고 그 대가.
첫 실전이 한설연에게 준 뼈저린 가르침들이었다.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로 겪어보는 것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을 두 번이나 생각하게 되는 오늘이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나가는 것 같습니다.”
최익이 전장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남아 있는 흑의인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현월곡과 천망단의 무사들이 협공하여 안전하게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구홍립이 외쳤다.
“생포할 수 있으면 생포하도록!”
그 말에 최익과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흑의인들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한 의도이리라.
아직까지 흑의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몰랐다.
선봉대와 합류하자마자 갑자기 맞닥뜨린 자들이었다. 다짜고짜 공격해오기에 전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잠시 후,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구홍립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말했다.
“비월단이 경계를 맡고 월혼대와 천망단이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한다. 생포한 자들은 이쪽으로 데려오도록.”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구홍립도 마음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리하긴 했지만 일행의 피해 또한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모든 과정 동안 한설연은 말이 없었다.
마지막 즈음에 위험에 처했을 때 놀랐던 가슴은 이미 진정된 상태였다. 다만 지금 그녀가 입을 열지 못하는 이유는, 전장에 쓰러져 있는 일행들 때문이었다.
차가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무인들 중에는 얼굴이 익숙한 사람도 많았다. 곡에서 인사를 나누며 지내던 식구들이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괴로웠다.
‘나 때문이야…….’
다들 누군가의 자식이었을 것이고, 남편이었을 것이고, 아버지였을 것이고, 소중한 친구였을 것이다. 그 소중한 사람들이 한순간 사자(死者)가 된 것이다.
곡의 식구들이 저렇게 되었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이 소식을 들은 유가족이나 친구들의 마음은 오죽할까.
‘사부님의 말씀을 들었어야 했어……. 내가 나서지 않았어야 했어…….’
어차피 그랬어도 누군가는 진소학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을 것이고 누군가는 죽었을 것이다. 현월곡이든 무림맹이든.
하지만 지금의 한설연에게 그런 사실 따위는 상관없었다. 자책감만이 온 정신을 지배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충격이 더 큰 것이다.
최익과 구홍립도 한설연을 말없이 바라볼 뿐,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강호에 속해서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 두 사람도 겪은 과정이었다. 위로는 잠시 미뤄두고 그녀가 스스로 이겨낼 시간을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생포된 흑의인은 세 명이었다.
월혼대원과 천망단원들이 전장을 분주히 오가고 있는 가운데, 혈도를 집혀 움직이지 못하는 그들을 구홍립과 최익이 문초하는 중이었다.
이미 그들이 치아 사이에 자살용 독단을 숨겼는지까지 확인했다. 독단은 없었다.
구홍립이 이미 몇 가지를 물어봤음에도 세 명의 흑의인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냐. 네놈들이 정녕 무서운 꼴을 당해봐야 입을 열 모양이로구나. 어디,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자.”
그 말에 흑의인 중 한 명이 비릿하게 웃었다.
구홍립의 눈에 살기가 담겼다.
“웃어? 허! 그래, 계속 웃을 수 있는지도 보겠다.”
구홍립이 그 흑의인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대주님! 이상합니다!”
근처에 있던 월혼대원 한 명이 그렇게 외쳤다.
구홍립과 최익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적 시신의 피부색이……, 점점 붉어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차피 근처였으니 구홍립이 그에게 다가갔다.
“보십시오. 아까는 옅은 홍조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빠르게 붉어지고 있습니다. 살펴보니 적 시신들이 다 그렇습니다.”
구홍립이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그랬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태가 날 정도였다.
그때 생포된 자들을 주시하고 있던 최익이 말했다.
“으응? 그러고 보니 이들의 피부도 점점…….”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최익의 귀로 한 줄기의 전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단유소입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신속히 그 자리를 이탈하라 하십시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지금 즉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