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2화 (12/200)

12화. 대처

한설연과 구홍립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자세히 말해보게!”

구홍립의 말에 월혼대원이 즉시 답했다.

“벌써 세 시진째 정찰조에서 연락이 없답니다! 선봉대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물어왔습니다!”

정찰조의 지휘부는 하루 반 거리 앞에 있었다. 최소 두 시진마다 선봉대에 연락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선봉대에서 내용을 정리하여 본진의 구홍립에게 알리는 식이었다.

현월곡을 출발한 후로 사십여 일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구홍립이 월혼대원에게 말했다.

“알았네. 일단 대책을 상의해야 하니 가서 최 대협을 모셔 오게.”

“옛!”

그로부터 반각 후, 최익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오면서 대강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게 대체 어인 일이란 말입니까?”

“저희들도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상의를 드리려 최 대협을 급히 모신 겁니다.”

구홍립의 말을 끝으로 세 사람 사이에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한설연이었다.

“아직 정확한 상황을 모르지만, 그렇기에 정찰조의 단순한 실수나 착오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그들이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는 가정하에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한설연이 말한 최악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전멸 내지는 그에 준하는 상황. 바로 그것이었다.

구홍립이 말했다.

“정찰조는 월혼대와 비월단에서 가장 날랜 무인들을 차출하여 구성했습니다. 모두가 일류 고수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소공녀님께서 말씀하신 상황에 처했다면…….”

그러자 최익이 입을 열었다.

“만약 적의 실력이 그 정도라면 문제가 매우 심각해집니다.”

“그런 상황이라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자는 뜻이에요. 그리고 빠른 대처가 필요해요.”

한설연의 말에 구홍립과 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홍립이 한설연에게 말했다.

“하면 선봉대에게는 일단 정찰조의 행방을 쫓지 말고 대기하라고 회신하겠습니다.”

“선봉대에게 일단 이리로 퇴각하라고 회신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최익의 질문이었다.

한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 대협의 말씀이 옳다고 판단돼요. 그들을 이쪽으로 퇴각하게 하고, 거기에 더해서 우리도 그들 쪽으로 빠르게 지원을 가는 게 좋겠어요. 주변에 있는 호위대원들에게도 집결을 지시하고요.”

“예, 소공녀님.”

구홍립이 대꾸하자 한설연이 최익에게 말했다.

“최 대협께서도 천망단의 무사님들을 서둘러 모아주세요. 퇴각할 가능성이 높으니 후방에 있는 수송대에게는 일단 그 자리에서 은밀히 대기하라 이르시고요.”

최익이 생각하기에도 한설연의 판단이 옳았고 대처도 매우 적절해 보였다. 그녀가 얻은 명성이 괜한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송구하나…… 선봉대를 구하러 가다가는 오히려 한 소저께서 위험해지실 수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제 안전을 걱정해주신 최 대협의 배려, 정말 감사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 안전만을 위한다면 이대로 퇴각하는 게 옳은 판단일 거예요. 다시 섬서 쪽으로 피신했다가 상황을 봐야겠죠.”

고개를 끄덕이는 최익을 향해 한설연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봉대는 지근거리에 있어요. 아직은 안전한, 하지만 곧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 우리 식구들을 그냥 놔두고 갈 수는 없어요. 설령 그게 천망단이었다 해도 저는 같은 판단을 내렸을 거예요.”

“소저의 깊은 뜻, 알겠습니다. 얼른 가서 단원들을 모으겠습니다.”

구홍립과 최익이 빠르게 사라졌다.

혼자 남은 한설연의 표정에 염려가 가득했다.

만약 자신이 가정했듯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온통 어지럽혔다.

곡에서 책으로 공부만 할 때는 이 세상이, 이 강호가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자신이 나서기만 하면 설령 문제가 있더라도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자신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장 정찰조와 연락이 안 되는 것뿐인데도, 직접 겪는 실제 상황의 무게는 각오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문득 사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더 이상 책에서 배울 게 없다며 세상으로 나갔다. 사형이 왜 그랬는지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은, 현실은, 이렇게 달랐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단유소.

최익을 통해 일행이 최대한 간격을 좁혀야 한다고 의견을 제시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론적으로는 그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은 꼴이 되어버렸다.

그 생각을 하던 한설연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일단은 이 사태를 수습하는 게 우선이야.’

무슨 일이 발생한 건 분명하겠지만, 아직 정찰대원들이 최악의 상황을 당했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움직이는 것뿐이다.

‘정신 차리자, 한설연.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자신이 바로 이 일행의 책임자였다. 자기가 조금만 삐끗해도 일행 전체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냉철해져야 해.’

* * *

타닥, 탁, 탁.

단유소가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오필이 다가왔다.

“흐음. 이상하네.”

야영지 근처에서 수련을 하고 오겠다던 그였다. 수련에 열심인 만큼 그는 서늘한 날씨에도 아직 땀이 식지 않은 모습이었다.

“또 뭐가.”

단유소가 턱을 괸 상태로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무료함이 잔뜩 묻어 나왔다.

“두 무사님과 이 무사님 말이에요.”

두의광(杜義鑛)과 이태(李泰)는 단유소와 오필을 지키기 위해 함께하고 있는 천망단의 두 무인이었다. 선임인 두의광이 사십 대 초반, 후임인 이태가 삼십 대 후반이었다.

“그분들이 왜.”

“수련을 마치고 오면서 보니까 천망단의 다른 무사님 한 분과 이야기 중이시더라고요. 내용 자체는 듣지 못했는데 두 분의 표정이 심각했거든요.”

그 말에 단유소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분들 표정 심각한 게 하루 이틀이냐.”

사십 일이 넘도록 함께 지냈지만 두의광과 이태는 단유소나 오필과 거의 말을 섞지 않았다. 단유소나 오필이 먼저 말을 걸어도 짧게 대꾸하고 대화를 끝내는 식이었다.

숙소를 잡을 때나 야영을 할 때도 줄곧 넷만 함께였는데도 그랬다. 붙임성 좋은 오필도 두 사람과 친해지는 일은 포기했을 정도였다.

그 두 사람은 현재 단유소가 비밀감찰단원으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에요, 단 형.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니까요? 뭔가에 놀란 표정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무슨 일 있냐고 여쭤봤더니 대답도 안 해주시고.”

“그래?”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고 있었지만 단유소도 속으로는 슬슬 궁금해지고 있었다.

오필은 붙임성이 좋은 만큼 다른 이들의 눈치도 잘 살폈다. 오필이 저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뭔가가 있긴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야행을 할 수도 있다던데요? 그러니 언제고 출발할 수 있게끔 준비 철저히 해놓으래요.”

중요한 부분은 항상 늦게 말하는 게 오필의 언어 습관이었다.

“그래? 다른 말은 없었고?”

“모닥불도 꺼야 할 거래요. 바로 출발할 수도 있다고.”

이에 단유소가 눈매를 찡그리며 말했다.

“낮에도 많이 이동했는데 무슨 밤에도 또 이동이래.”

“그러게 말이에요. 감숙만 지나면 목적지인 청해니 빨리 가고 싶은 건가.”

단유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산보 가시게요?”

단유소는 일정한 시간이 되면 혼자 산책하는 것을 습관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필이 그렇게 물은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실제로 산책을 하기도 했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무공을 수련하기도 했다. 물론 최익과 몰래 만나기도 했다.

“응.”

“다녀오세요.”

“참! 그리고 내가 전에 알려준 호흡법, 꾸준히 하고 있지?”

“하고는 있어요. 근데 그거 별로 하기 싫던데.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힘들기만 하고.”

“내가 본맹에 있는 무사님들한테 싹싹 빌어서 배워 온 거라니까.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더 효과적이라고 하셨다고. 무사가 되겠다는 녀석이 호흡법을 하기 싫어해서 쓰겠어?”

그러자 오필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단 형도 가만 보면 본맹 출신이라고 은근히 자부심 드러낸다니까.”

“예라이! 지 생각해서 가르쳐줬더니.”

그 말에 오필이 씩 웃었다.

“다녀와요.”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돌아섰다.

그가 오필에게 가르쳐준 호흡법은 사실 대연둔형심법(大然遯形心法)이라는 것으로, 이백 년 전에 강호에서 실전된 심법이었다.

당시에도 은신술과 잠입술이 생명인 첩자나 자객 같은 자들 사이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심법이었다는 게 사부의 설명이었다.

그런 심법을 오필 정도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심법 전체를 가르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호흡법의 원리만 따와서 가장 쉬운 방식으로 오필에게 가르쳤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오필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만약의 상황에 처해도 몸을 숨긴 채로 대연둔형심법의 호흡법만 운용하면 기척을 조금이라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호흡법을 꾸준히 익히게 되면 오필도 축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연둔형심법의 속성상, 축기가 되어도 겉으로는 태가 나지 않을 것이다. 오필의 안전을 위해서나 꿈을 위해서나 그게 최선이었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단유소가 이윽고 숲 속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야영지에서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지자마자 단유소가 대라유유선공을 끌어올렸다. 그 상태로 차분하게 주변을 살피던 그는 가장 높은 나무의 상단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다음 순간, 단유소는 작은 새들이나 앉을 법한 얇은 나뭇가지 위에 서 있었다.

단유소가 안력을 돋우니 어둠 속에서도 그의 가시거리가 서서히 넓어졌다. 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단유소가 그 상태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단유소가 나뭇가지를 박찼다.

그의 몸이 사선으로 쭉 솟구쳤고, 정점에 이르자 포물선을 그리며 크게 떨어져 내렸다.

탓!

땅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단유소가 한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목적지는 나무 위에서 단유소가 확인했던 시야의 끝 부분이었다.

슈슈슈슈슈슉―

단유소의 몸이 바람처럼 나아갔다.

산속이라서 곳곳에 장애물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아가는 속도에는 거의 변함이 없었다.

이윽고 목표했던 지점에 다다른 단유소가 멈춰 서서 대라유유선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는 동시에 기운을 넓게 펼쳤다.

주변의 기척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단유소가 그 상태로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 오필이 머무르고 있는 야영지를 중심으로 넓게 원을 그리며 빠르게 신법을 펼치는 중이었다.

물론 처음에 나무 위에서 충분히 먼 곳까지 확인했었다.

그때 시야에 걸리는 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시야로 확인했던 가장자리 부근을 달리며 더 넓은 범위를 확인코자 하는 것이다.

슈아아악―

단유소의 몸이 마치 공간을 압축하듯 나아갔다.

“후우우우…….”

약 일각 후, 단유소는 어둠 속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오필의 안전을 위해 반경을 돌며 확인해본 결과 주변에서 별 위험은 느껴지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단유소가 또다시 어둠을 가르며 전방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는 전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차례였다.

원래는 즉시 전방으로 달려갔어야 했다.

실제로 그러려고 했었다.

오필의 안전을 위해 소모한 일각이라는 시간은 전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미 큰일이 벌어져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우려가 있었지만 억지로 그러지 않았다.

전방에 있는 사람들이 만약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해도, 그건 그들이 자처한 일이기 때문이다. 감숙 땅부터는 위험해질 수 있으니 일행이 최대한 간격을 좁히고 뭉쳐야 한다고 분명히 의견을 전달했었다.

무시한 건 그들이었다.

만약에 일행이 뭉쳐 있었다면 이렇게 일각이라는 시간을 허비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최익에게서 전해 듣기로, 일개 마부의 의견임을 알게 되자 그들의 표정이 굳었다고 했었다.

아니, 마부고 고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쪽 상황에 더 밝은 사람의 조언이라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수렴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게 아닌가.

결국 그 후로 며칠이 지나기까지 자신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렇게 스스로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각 동안도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이 일행으로는 어차피 미래가 없다. 이들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거나, 적이 터무니없이 강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적어도 지금의 심정은 그랬다.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단유소는 최대한의 속도로 전방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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