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1화 (11/200)

11화. 발발(勃發)

“왠지 이름이 익숙하기에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자네였군. 그 이름이 흔한 이름은 아니지.”

다음 날, 이른 새벽.

단유소와 오필이 머물고 있는 숙소에 갑자기 찾아온 사람은 최익이었다. 오필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한 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최익이 다시 말했다.

“나도 그 주선연에 대해 이야기는 대강 들었네. 양 소저가 다리를 다쳐서 친구가 대신 나왔었다지?”

“예, 대협.”

“그 친구와는 잘 안됐다고?”

“예, 제 부족함의 소치입니다.”

단유소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하자 최익이 말했다.

“어쨌건 미안하게 되었네. 이쪽의 사정으로 일이 그렇게 된 것이니.”

“그, 그런 말씀 마십시오. 최 대협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잖습니까. 제가 그때의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 생각해주니 고맙네. 뭐,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 주선연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양 소저나 그 친구나 둘 다 자네와는 인연이 아니었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시게.”

“그러고 있습니다.”

단유소의 말에 최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잠시 단유소를 바라보던 최익이 말했다.

“자네, 대단한 사람이더군.”

최익의 갑작스러운 말에 단유소가 살짝 놀란 척 되물었다.

“예?”

“실제로는 비밀감찰단원이라지?”

그 말에 단유소가 더 놀란 척하며 대꾸했다.

“어인…… 말씀이신지.”

최익이 왜 저런 얘기를 하는지 대충 짐작되는 바는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상황을 알기 전까지는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최익이 웃으며 말했다.

“허허. 하긴, 자네로서는 무조건 감춰야 하는 입장이겠지. 하지만 이제 나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네. 사실, 자네는 본맹에 소속된 사람이 아닌가.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 절강지부에서 마음대로 차출할 수 없는 사람이지. 그래서 차출 건으로 본맹에 공문을 보내려 했더니 이미 자네를 포함시키라는 공문이 날아왔더군. 그것도 의천각 부각주님의 이름으로.”

무림맹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조직은 다름 아닌 맹주전(盟主殿)이다.

그 다음으로 서열이 높은 조직은 의천각(義天閣)과 무혼각(武魂閣)이다. 의천각의 책임자는 문상이었고 무혼각의 책임자는 무상(武相)이었다.

최익이 전서를 내밀자 단유소가 받아서 확인했다.

최익의 말마따나 ‘의천각 소속 비밀감찰단원 단유소’를 이번 임무에 포함시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문서를 본인에게 직접 확인시키라는 내용까지 함께.

‘이래서였군.’

최익 정도 되는 사람이 겨우 주선연 문제를 사과하기 위해 일개 비마대원을 찾아올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뭔가 다른 용건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이 일 때문이었던 것이다.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되는 신룡대원이니만큼 상부에서는 이런 식으로 신분을 위장시키고 조력자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특히 비밀감찰단원이라는 위장 신분은 자주 사용되었다. 기본적으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은 감찰이라는 말에 민감하니 귀찮은 상황을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단유소가 진지한 척하며 물었다.

“제 정체에 대해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절강지부장님과 나뿐일세.”

“기밀 유지에 대해 따로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물론일세.”

“앞으로 최 대협께 도움을 청할 일이 종종 생길 듯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게나.”

“감사합니다.”

단유소가 그렇게 대꾸하자 최익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비밀감찰단원이라면 무공 실력도 상당하겠지? 아, 오해는 말게. 혹시 자네가 위험해질 상황을 가정하여 따로 내가 대비를 해야 하는지를 묻는 걸세.”

“그런 상황에서 제 한 몸 빼낼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최익이 다시 물었다.

“현월곡과 함께하게 될 이번 임무에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자세히는 모릅니다. 다만 교월이 참여하고 있다는 정도만 압니다.”

“승추 그 사람도 자네가 감찰단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단유소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모릅니다.”

“알겠네. 앞으로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하게 될 테니 다른 이야기들은 차차 나누도록 하지.”

최익이 그렇게 말한 후 방을 벗어났다.

그가 나선 방문을 묵묵히 바라보던 단유소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너무 많이 알려졌어.’

최익은 물론이고 절강지부장도 자신을 주목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이름으로 엮인 사람도 많아졌다.

아무래도 이번 임무가 끝나면 이름과 위장 신분이 대대적으로 바뀔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출발점인 절강은 대륙의 동쪽 끝에, 목적지인 청해는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

절강에서 출발하여 안휘, 하남, 섬서, 감숙을 거쳐 청해로 진입하는 게 바로 한설연 일행이 계획한 경로였다. 그야말로 대륙을 횡단하는 먼 길이었다.

한설연 일행은 이미 섬서 땅을 거의 지나고 있었다. 이제 하루 이틀만 더 가면 감숙이었다. 그리고 감숙을 지나면 목적지인 청해에 진입하게 된다.

여태까지 한 달하고도 열흘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그 기간 동안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일행이 거쳐온 지역들 자체가 모두 호북과 인접한 곳으로, 무림맹의 영향력이 매우 큰 곳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곳들이기도 했다.

세인의 이목을 끌지 않고자 했던 일행의 노력도 아직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다.

강호는 조용하기만 했으니까. 만약 한설연이 나섰다는 사실이 어떤 경로로든 퍼져 나갔다면 절대 이렇게 조용할 리 없었을 테니까.

그 기간 동안 단유소는 단 한 번도 한설연을 본 적이 없었다.

일단 마주칠 수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행렬의 위치 자체가 달랐다. 한설연은 중진에 위치해 있었고 단유소는 후발대 쪽에 위치해 있었다.

후발대와 중진은 반나절 거리를 유지하는 게 원칙이었다. 다만 중진에서 때때로 지시가 내려오면 거리를 약간 좁히거나 늘리기도 했다. 물론 거리가 아무리 좁아져도 본진과 만나는 일은 없었다. 본진과 후발대가 일부러 경로를 달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듯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한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또한, 한설연의 일거수일투족은 철저한 보안하에 관리되었다. 시가에서 묵을 때에도 그녀가 어디에서 묵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야영을 하는 경우에도 항상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었다. 야영 시에 필요한 게 있으면 무인들이 마차에 와서 미리 가져가는 식이었다. 현월곡 쪽이나 천망단 쪽이나 같았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오필 같은 경우에는 본진에 있는 중요한 인물이 한설연이라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단유소는 이 일행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해 이미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최익을 통해서였다. 임무에 따라 한설연을 지키려면 필히 알아둬야 할 문제였다.

단유소가 볼 때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고 한설연을 보호하기에 나쁘지 않은 대비였다.

다만 앞으로는 변화가 필요해 보였다.

일행이 서서히 섬서의 서부 산지를 지나 감숙에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섬서는 화산파와 종남파가 있는 정파의 영역이자 호북에 인접한 무림맹의 영역이다. 땅따먹기 식으로 영역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향력이 그만큼 강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감숙은 달랐다.

아무리 감숙에 명문인 공동파가 있다 할지라도 그곳은 실질적인 정파의 영역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감숙에서도 몇 차례 작전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신경 쓸 만한 대단한 적의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충분히 누군가가 뭔가를 꾸밀 수 있는 곳이긴 했다.

게다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산지나 황무지가 많고 인구가 적은 지역들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점점 좋은 상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의 간격을 좁혀야 한다는 게 단유소의 판단이었다. 이렇게까지 서로 간의 간격이 먼 상황에서는 위기가 닥쳤을 때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각개격파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정찰조를 포함해서 모두가 간격을 최대한 좁혀야 했다. 뭉치면 뭉칠수록 좋고 그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제는 세인의 이목을 가리는 쪽보다는 적습에 대비하는 쪽에 중점을 둬야 하는 것이다.

새벽에 몰래 만난 최익에게 그 의견을 말했더니 그도 공감했다.

“내가 오늘 한 소저와 구 대협에게 이 의견을 전하겠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최익은 한설연과 구홍립을 만나고 있었다.

“최 대협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한동안 고민하던 구홍립의 대답이었다.

일단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 구홍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시기적으로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당장이라니요. 산지가 많다고는 하나, 감숙은 그 유명한 공동파가 있는 곳입니다. 요새 섬서의 화산파, 종남파와 더불어 감숙의 공동파도 성세를 구가하고 있다는 점은 최 대협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예, 압니다. 그렇다 해도 감숙 땅의 모든 곳이 공동파의 영역이고 정파의 영역인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가 앞으로 통과해야 할 지역들의 경우에는 실질적인 정파의 영역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그런 상황까지 고려한다 하더라도 간격을 좁혀서 위험에 대비하는 게 좋은가, 아니면 지금처럼 이목을 끌지 않는 게 좋은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건 어떤 방식이 소공녀님의 안전에 더 도움이 되느냐 하는 것. 저는 당분간은 지금의 대형을 유지하는 게 낫다는 쪽입니다.”

구홍립의 말인즉 지금까지 그랬듯 최대한 이목을 끌지 않는 쪽에 중점을 두고 이동하는 게 더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최익의 표정을 보니, 구홍립은 자신이 너무 완고하게 의견을 피력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 오해는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최 대협. 저 또한 최 대협의 의견에는 분명히 공감합니다. 다만 여러 정황을 놓고 봤을 때 아직은 시기상조가 아닌가 하는 점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지금까지처럼 세인의 이목을 피하면 위험해질 일도 없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러자 최익이 대꾸했다.

“예. 구 대주님의 말씀도 틀리지 않다고 봅니다. 뭐, 애초에 답이 정해진 문제는 아니니까요. 다만 우리 측 인원 중에 이쪽의 환경과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의견인데, 저 또한 어느 정도 공감이 되어 두 분께 말씀드려 본 겁니다.”

“아! 천망단원 중에요?”

한설연의 물음에 최익이 대꾸했다.

“우리 단원은…… 아닙니다.”

“천망단원이 아니시라면…….”

“비마대원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겁니다. 본맹에서 파견 근무를 나왔다가 이쪽에 합류했다던.”

그 말에 구홍립이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솔직히 언짢았다.

이 일행에 합류한 비마대원이라면 마부인데 그런 사람의 의견 때문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너무 심각해졌던 것이다.

아니, 마부가 느끼는 위험성과 현월곡의 정예가 느끼는 위험성이 어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들의 말을 심각한 것처럼 전한 최익이 오히려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우리가 여태껏 보여준 모습들이 그리도 어설퍼 보였단 말인가? 일개 마부의 의견이 신경 쓰일 정도로?’

무시당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자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구홍립이 구홍립대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설연은 내심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본맹에서 파견근무를 나왔다는 그 비마대원이라면 당연히 단유소였다.

‘에휴, 조용히 좀 있을 것이지.’

가만히 있으면 될 일에 괜히 나섰다가 화를 당하는 곳이 바로 강호다.

지금만 해도 벌써 구홍립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래서 본인에게 득 될 게 뭐가 있겠냐는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한설연이 최익에게 말했다.

“아무리 비마대원이라도 우리는 모두가 한배를 탄 동료니까요. 누구의 의견이라도 소중하죠. 좋은 참고가 되었으니 시기적절하게 반영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최익은 최익대로 답답했다.

한 달 넘게 접해본 단유소는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청년이었다.

게다가 그는 의천각의 비밀감찰단원으로, 수많은 정보를 접하는 사람이다. 괜히 그런 의견을 제시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단유소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는 것이다.

최익이 속내를 감추고 웃으며 대꾸했다.

“알겠습니다, 한 소저. 어차피 결정은 한 소저와 구 대협의 몫입니다. 저는 그저 참고하시라는 차원에서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뿐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아닙니다, 최 대협. 앞으로도 의견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 * *

그로부터 나흘 후.

감숙으로 진입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

하루의 여정을 마친 한설연과 구홍립이 야영을 준비하고 있을 때 월혼대원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방금 선봉대에서 전서가 날아왔습니다! 정찰조와의 연락이 두절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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