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출곡(出谷)
“당장은 신룡대에 대기 인원이 없다더구나. 임무를 마치는 인원들이 조만간 생기니 곧바로 준비하겠다고 확답을 해왔다.”
“아.”
한설연이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신룡대가 약간 늦게 합류한다고 해도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별문제가 없을 테니까.
신룡대는 온 강호가 알아주는 최고의 실력자들이다. 그들이 투입되면 자신도 훨씬 더 안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신룡대의 투입은 단순히 그 정도의 차원에서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신룡대의 합류를 무림맹주가 승인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 신룡대는 무림맹주 직속의 비밀 임무 수행 단체다. 그렇기에 신룡대는 무림맹주의 승인하에서만 움직이게 되어 있다.
즉,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이 일에 무림맹주가 개입하고 있음을 언제든 밝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로운 점들에 대해서는 굳이 머릿속으로 셈을 해볼 필요도 없다.
무림맹주 백리우가 괜히 이 강호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존재인 게 아니니까. 그가 괜히 천하제일인으로 불리는 게 아니니까.
단목수헌이 말했다.
“무림맹주 백리우와 문상 제갈윤도 이 사안이 어쩌면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 충분히 똑똑한 사람들이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목수헌이 한설연에게 말했다.
“약속하거라. 절대 무리하지 않겠노라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너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시하겠노라고. 헤쳐 나가기 힘든 위험이 있거든 모든 것을 단념하고 곧바로 곡으로 돌아오겠노라고.”
“약조하겠습니다, 사부님.”
한설연이 대꾸하자 이번엔 단목수헌이 구홍립에게 시선을 보냈다.
“구 대주도 약속하시게.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설연이 이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겠노라고. 그러면서 구 대주 자신의 안전도 굳게 챙기겠노라고.”
“약조합니다, 곡주님. 소인의 목숨을 던져서라도 소공녀님을 지킬 것입니다.”
차분하게 말하는 그의 각오가 더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단목수헌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설연에게 말했다.
“이리 오련. 한번 안아보고 싶구나.”
한설연이 묵묵히 단목수헌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의 품에 안겼다. 단목수헌이 묵묵히 그녀의 등을 쓰다듬을 때 한설연이 말했다.
“사부님, 건강하셔야 해요. 뭐든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단목수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포옹을 풀자 이번에는 송채령이 한설연을 안았다.
“사매,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사부님과 같아. 아무리 사형을 위해서라지만 절대 무리해서는 안 돼. 사마매저 위험해지면 나는, 나는…….”
송채령이 울먹이더니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명심할게요, 사자(師姉, 사문의 언니). 사자가 사부님의 곁에 있으니까, 든든하니까 저도 이럴 수 있는 거예요. 제가 얼마나 사자를 좋아하는지 아시죠?”
송채령도 한설연을 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두 사람도 포옹을 풀었다.
단목수헌이 말했다.
“이제 출발들 해. 날 밝으면 다 허사야.”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이별의 시간을 질질 끌어봐야 마음만 더 안타까워질 뿐이니 이만 정리하고자 하는 뜻이었다.
한설연이 단목수헌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럼 다시 뵈올 때까지 강녕하십시오, 사부님.”
* * *
마차 한 대가 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는 그 마차는 눈에 띌 정도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세 필의 말이 마차 앞에서 길을 열며 달리고 있었고 다섯 필의 말이 마차의 뒤를 따랐다.
한설연 일행이었다.
마차 안에는 인피면구를 쓴 한설연이 앉아 있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한 면사도 착용했다. 다만 지금은 면사를 머리 위로 젖혀둔 상태였다.
그녀의 반대편에 앉아 있는 인물은 구홍립이었다. 그의 옆에 챙이 넓은 죽립이 놓여 있었다.
마차의 앞뒤에서 말을 몰고 있는 평범한 복장의 사내들은 모두가 월혼대원이었다. 월혼대원들 중에서도 상위 팔위까지의 최고수들이었다.
한설연과 구홍립까지 포함하면 열 명이 전부인,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일행.
분명히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정찰조가 하루 앞 거리에서 이동 경로상의 위험을 면밀하게 수색하는 중이었다. 정찰조의 지휘부는 그 중간인 여섯 시진 거리 앞에 있었다. 정찰조는 대부분 약초꾼이나 사냥꾼 등으로 위장한 상태였다.
선봉대는 오십 리 앞에서 식사나 휴식을 취할 장소를 철저하게 검증하는 중이었다. 선봉대는 대부분 개별 상인이나 짐꾼으로 위장했다.
호위대는 일대와 이대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한설연을 호위하는 중이었다. 미리 출발한 일대는 한참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지금은 이대가 은밀하게 한설연을 호위하고 있었다.
대원들의 피로도 관리를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설연을 중심으로 이십 리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산과 들을 따라 알아서 이동하고 있었다.
호위대는 일반인으로 위장했다. 농부로 위장한 사람도 있었고 서생으로 위장한 사람도 있었다. 서로가 철저하게 모르는 사람인 척 행동하고 있었다.
후발대는 후방에서 짐마차를 끌고 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군소 상단으로 위장했다. 그들이 싣고 오는 물품 또한 별게 없었다. 대부분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량 위주였다.
최대한 관도를 따라 이동하겠지만 언제든 마차와 말을 버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 경우를 대비하여 모두가 짐을 최소화했다.
마차 안은 조용했다.
한설연은 묵묵히 창밖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고 구홍립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마차 안의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구홍립이었다.
“염려되십니까?”
문득 들려온 구홍립의 목소리에 한설연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아뇨? 그다지요. 여, 염려가 있다면 사형에 대한 염려가 있을 뿐이죠.”
그러자 구홍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로 한설연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다 알고 있으니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빛.
결국 한설연이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포기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에휴. 하여간 구 대주님은 못 속이겠다니까요? 예. 솔직히 염려돼요.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과연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그 모든 게.”
그제야 원하던 대답을 들었다는 듯 구홍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곡에서 오랜 세월을 봐온 두 사람이었다.
표정이나 분위기만으로도 상대의 심정을 가늠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붙임성 좋은 엄주평과의 관계처럼 사석에서 숙부, 조카 하는 사이까지는 아니었지만.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구홍립이 입을 열었다.
“소공녀님, 앞으로 저한테만큼은 솔직해지셔야 합니다.”
그러자 한설연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저는 늘 구 대주님에게 솔직했어요. 모르셨나 봐.”
“허허. 압니다. 다만 제가 방금 말씀드린 솔직함의 의미는 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데요?”
“먼저 하나 여쭙겠습니다. 지금 책임감과 중압감, 많이 느끼고 계시지요?”
구홍립이 눈매를 가늘게 하고 그렇게 묻자 한설연이 흠칫했다. 구홍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소공녀님은 분명히 그럴 분이시거든요. 그럼에도 소공녀님은 절대로 걱정이나 고민을 토로하지 않으시겠지요. 저 또한 소공녀님이 어렸던 시절부터 곁에서 지켜봐 온 사람 중 하납니다. 제가 소공녀님을 모르겠습니까?”
“하아…….”
한숨을 내쉰 한설연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 보였다.
구홍립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렇게 그가 말했다.
“앞으로 우리 앞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소공녀님과 제가 서로를 끝까지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한테만큼은 솔직해져야 한다는 말씀은 그런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아시겠지요?”
구홍립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한설연이 묵묵히 구홍립을 응시했다.
사실, 평소의 구홍립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다는 건, 그만큼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다는 뜻.
고맙고 든든했다.
“구 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한설연이 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마치 월혼대원들이 구홍립에게 예를 취할 때처럼 주먹을 가슴에 대며.
그녀의 발랄한 모습에 구홍립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외모만 예쁜 게 아니라 하는 짓도 예쁜, 이게 바로 한설연다운 모습이었다.
구홍립이 말했다.
“현재 본곡의 인원들 모두가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후발대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우리를 주시하는 움직임도 없었답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죠. 그러자고 짠 계획인데.”
“아시다시피 당분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절강은 어차피 현월곡의 영역인데다가 다음에 지나칠 지역들도 정파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너무 긴장하고 계실 필요는 없지요. 지나친 긴장은 오히려 독입니다. 마음을 편하게 갖되 최소한의 긴장감만 유지하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구 대주님.”
한설연이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그렇게 대꾸했다.
“오늘 저녁에는 동려현에서 숙박할 계획입니다. 무림맹 절강지부의 인원들도 그쪽에서 합류할 겁니다. 천망단 소속의 정예 고수 서른 명이 은밀히 합류할 예정인데, 소공녀님께서는 책임자와 인사만 나누시면 됩니다.”
“책임자는 누구래요?”
“원래의 책임자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 결국 교체되었답니다. 바뀐 책임자가 누군지는 아직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알겠어요. 가보면 알겠죠.”
한설연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구홍립이 말했다.
“그럼 눈 좀 붙이십시오. 앞으로는 쉴 수 있을 때 최대한 쉬어놔야 한다는 걸 잊지 마시고요.”
“그럴게요. 단, 구 대주님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신다면요.”
말뜻을 알아들은 구홍립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곧 의자 뒤의 벽면에 뒤통수를 대고 눈을 감았다.
“저 지금 모범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자 한설연도 웃는 얼굴로 눈을 감으며 마차의 옆 벽면에 몸을 기대었다.
지금껏 불편하게만 느껴졌던 마차의 덜컹거림이 어느 순간부턴가 기분 좋은 진동으로 변해 있었다.
* * *
그날 저녁.
동려현에 도착한 한설연이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 구홍립이 들어왔다.
“아까 말씀드렸던 절강지부 천망단의 책임자가 도착했습니다. 지금 아래층에서 대기 중입니다.”
“아, 그래요? 모셔 오세요.”
그러자 구홍립이 잠시 한설연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 모습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제 모습이요? 아! 인피면구.”
방금 전 세안을 하기 위해 잠시 인피면구를 벗어뒀었다. 세안을 마치고 아직 쓰지 않은 상태였다. 구홍립이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한설연이 말했다.
“이 방에서 그분 한 분 뵙는 거니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은데요? 어차피 널리 알려진 얼굴이잖아요? 무림맹의 공식 행사 때마다 이 얼굴로 가기도 했었고.”
구홍립도 수긍했다.
“하긴, 소공녀님의 정체를 알고 있는 데다가 앞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분인데 억지로 다른 얼굴을 할 필요는 없겠지요.”
잠시 후, 구홍립이 한 명의 사내를 대동하고 한설연의 방에 들어왔다.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호남형의 사내였다. 첫인상만으로도 듬직해 보이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 사내도 그런 경우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자신의 본모습을 보고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눈빛과 기도였다. 눈앞에서 막상 자신을 마주했을 때 그 첫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내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첫인상은 매우 좋았다. 요즘 들어 흔치 않은, 정파인 다운 정파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정중하게 포권하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이렇게 한설연 소저와 함께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림맹 절강지부의 최익입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응? 이름이 왠지 낯익은데?’
뇌리에 의문이 든 순간 자동적으로 양금영이 연상되었다.
‘헉! 그럼 이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