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맹주와 문상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백리우가 열한 살, 제갈윤이 여섯 살 때였다. 그때는 백리우의 아버지가 무림맹주였고 제갈윤의 아버지가 문상이었다.
그 어린 시절부터 무림맹과 제갈세가를 오가며 붙어 지낸 사이였다. 제갈윤이 작년에 사십 줄에 들어섰으니 벌써 삼십오 년이나 지속된 우정인 셈이다.
그만큼 서로가 편했다.
그렇기에 둘만 있을 때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백리우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걘 중원이 좁다 하고 잘만 놀러 다니더니 왜 위험에 처했대?”
“낸들 압니까. 어쨌든 심각한 모양이에요. 진소학이 보낸 전서가 핏물로 쓰여 있었답디다. 그것도 손가락으로 급하게 휘갈겨서.”
백리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갈윤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다 형님 때문이에요.”
“야!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삼 년 전에 소학이 걔, 부문상 자리에 앉히자고 했잖아요, 내가. 정치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그게 제일 좋은 수라고 했잖아요. 걘 능력도 되니까. 그때 아직 너무 어리다고 형님이 퇴짜만 안 놨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 아닙니까.”
“이야! 그걸 또 그렇게 엮어서 몰아갈 수도 있구나. 재주다! 재주야!”
그러자 제갈윤이 은근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다 형님한테 배운 거 아닙니까.”
백리우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무림맹이 현월곡과 약간 소원해진 것도 다 그때의 일 때문이에요. 이번이 다시 돈독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고요.”
“쩝. 도와달라면 도와줘야지. 현월곡인데. 근데 그런 건 니가 알아서 전력 짜서 지원 보내면 되잖아. 뭘 굳이 그런 것까지 나한테 보고해? 귀찮게.”
그러자 제갈윤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근히 신룡대의 지원을 바라는 눈치예요.”
신룡대와 관련된 사안은 무조건 맹주의 승인이 필요했다. 괜히 맹주 직속 비밀 임무 수행 조직인 게 아니다.
그 말에 백리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신룡대애애? 아니, 신룡대가 무슨 동네 낭인 조직이야? 쓰고 싶다고 맘대로 쓰게? 아무리 현월곡이라도 안 돼! 신룡대는 내 거라고! 내 전용이라고!”
그러자 제갈윤이 무표정한 눈으로 말없이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그 시간이 계속되자 백리우가 흠칫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니……. 무조건 안 된다는 건 아니고……. 하, 합당한 이유 정도는 있어야지. 야, 그보다도 너, 요즘 눈깔에 힘 자주 집어넣는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무섭다고!”
그러자 제갈윤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요인 호위 때문이랍니다.”
“요인? 누구?”
“형님도 아시다시피 현월곡주가 병상에 있잖아요. 그래서 진상을 파악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교월(皎月)이 직접 나선답니다. 그녀가 나선다는 건 아직까지 극비고요.”
그 말에 백리우가 두 눈을 번쩍 떴다.
“뭐어? 교월? 한설연? 내가 갈게! 내가 직접 호위해준다고 해! 바로 전서 날려!”
교월.
희고 밝게 비치는 달.
달로 상징되는 현월곡에서도 가장 밝은 달, 즉 한설연을 이르는 말이었다.
제갈윤이 째진 눈으로 백리우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리우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야, 나도 바람 좀 쐬자, 응? 노상 맹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지루해 죽겠다고. 의욕도 없고 몸에 기운도 없어. 니가 옆에서 봐왔으니까 더 잘 알잖아. 가뜩이나 요새는 실전을 하도 안 치러봐서 몸도 점점 굳는 것 같고 말이야. 솔직히 내가 천하제일인 자리 못 유지하면 너도 곤란해지잖아.”
“형님이 한 번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런 소릴 하십니까? 아니 그 전에, 맹주가 고작 그런 일로 맹을 비우겠다는 발상 자체가 정상이긴 해요?”
“저, 정상이긴 하냐고? 야! 아무리 그래도 너, 너무 막말하는 거 아냐?”
그러자 제갈윤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형님이 여태껏 저한테 했던 갖은 막말들, 폭언들, 다 말씀드려봐요? 어처구니없었던 온갖 억지들까지? 그리고 형님이 지금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 많으신 거, 제가 모를 줄 압니까? 제발 좀 말이 되는 소릴 하십쇼.”
“노, 농이잖아, 농. 뭘 그리 까칠하게 반응해.”
“농을 해도 좀……. 에휴. 어쨌건 빨리 결정하십쇼. 그 사람들 최대한 빠르게 출발할 모양이에요.”
백리우의 표정이 또다시 진지해졌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던 그가 말했다.
“이번 일, 뭐일 것 같냐? 진소학이 왜 그렇게 된 것 같아?”
“아직은 모르죠, 저도.”
“하긴, 근래 강호가 너무 평화로웠지. 너무 평화로워서 두려울 정도로.”
평소의 백리우답지 않게 표정이 매우 심각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순한 사고면 좋겠는데.”
“그러게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면 심각해진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의도적으로 현월곡의 대공자를 건드린 것이다. 그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진소학이나 현월곡이 이 강호에서 갖는 상징성은 매우 크니까.
만약 누군가 애초에 그걸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에 시작했다면, 그리고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면, 강호에는 한차례 해일이 몰아칠 수도 있다.
피의 해일이.
“느낌이 안 좋다.”
제갈윤이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설연이 나섰다는 사실도 결국은 온 강호에 알려지겠지?”
“그렇겠죠. 기밀 유지도 한때니까요.”
“한설연이 너무 위험해지겠는데? 사안 자체도 심상치 않은데 강호제일미까지 나섰으니, 숨어 있던 승냥이들도 이때다 하고 달려들 거 아냐.”
“그렇겠죠.”
한동안 턱을 괴고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던 백리우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역시 내가 나서야겠는데? 그 고운 아이가 다친다는 건 이 강호 차원의 크나큰 손실이잖아?”
그 말에 제갈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유, 진짜! 잘 나가다가 꼭……!”
백리우가 제갈윤의 반응을 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는 아마도 제갈윤의 저런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룡대 각 조 상황은?”
“청, 적, 황, 백 모두 멀리에서 임무 수행 중이에요.”
“그럼 묵룡조만 임무 대기 중이야?”
“묵룡조도 이틀 전에 광서 쪽으로 떠났어요. 부조장 진평이 조원들을 이끌고 갔어요. 아! 연소운은 친누이의 혼사가 있다며 고향에 갔고요.”
“묵룡은?”
“휴가차 항주에 머물고 있어요. 보니까 근 몇 달간 연달아 임무를 수행했더라고요. 그런데 마침 항주에 있다기에.”
“절강지부?”
“네.”
백리우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상황이 급한데 신룡대 최고 고수가 마침 절강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 운 좋네, 한설연.”
현월곡도 절강에 있으니 묵룡의 즉시 합류가 가능하다, 그 얘기였다.
“승인해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일단 절강지부의 천망단에서도 인원 차출해서 묵룡과 함께 보내는 것으로 하면 될 것 같네요. 그다음은 추이를 보면서 대처하고.”
“그러자고. 묵룡조원들한테도 일단 이번 임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라고 해. 아! 다른 조도 현재 임무가 끝나면 일단 임무 대기 상태로 남겨 두고.”
그러자 제갈윤이 백리우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눈동자를 빛냈다.
“이번이 세 번째군요. 형님이 신룡대 전체를 대기시키자고 한 거.”
“그런 걸 또 세고 있었냐?”
“그때마다 형님은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항상 그 중심에는 그가 있었죠. 이번 일에서 정작 형님이 지키고 싶은 사람도 한설연이 아니라 그겠죠?”
“하여간 넌 날 너무 잘 알아. 피곤해, 아주.”
그 말에 제갈윤이 피식 웃었다.
“가서 일이나 처리할게요.”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윤이 짧게 목례하고 돌아서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제갈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리우가 그를 불렀다.
“윤아.”
제갈윤이 돌아서서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왜요. 또 무슨 시비를 거시려고.”
제갈윤의 반응에 웃어 보인 백리우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우리 여태껏 너무 여유 없이 살았지?”
반백 년 이상 강호의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무림맹.
이 거대한 조직을 이끌고 관리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가뜩이나 조직의 정점에 있는 두 사람이니,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일정이 빽빽했고 삶이 빡빡했다.
그런 상황에서 툭하면 조직의 어느 부분에 문제가 생기거나 강호 어딘가에서 사건이 터졌다. 예기치 못한 또 다른 문제도 수시로 발생했다.
그럴 때마다 며칠씩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그런 삶의 연속이었다.
마침 선대의 맹주와 문상이 바로 두 사람의 부친들이었으니, 비교당하며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쉬운 입장이었다. 떠들어대기 얼마나 쉬운가. 역시 아버지만 한 아들은 없다는 식으로.
그런 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이를 악물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중압감과의 싸움이었다.
청춘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고 장년기는 얼굴에 주름만 남긴 채 사라졌다. 앞만 보고 달렸고 서로만을 믿고 의지하며 버텨왔다.
“그랬죠. 형님 덕분에.”
제갈윤이 대꾸하자 백리우가 빙그레 웃었다.
“우리, 이제 좀 즐기면서 살자.”
이에 제갈윤이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없이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렇죠, 형님? 이번 진소학 사건, 결코 느낌이 안 좋은 정도에서 끝날 것 같지가 않죠?
“그럽시다.”
웃으며 그렇게 대꾸한 제갈윤이 문을 나섰다.
혼자 남은 백리우가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눈 아래 펼쳐진 정원에는 가을꽃들이 하나둘씩 꽃봉오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뒷짐을 진 백리우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묵룡과 교월이라…….”
백리우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달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은근한 달빛이 사방에 깔린 어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달이 완전히 구름에서 벗어났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네 뜻을 지켜주려 지금껏 어둠 속에만 두었는데 빛나는 달이 기어이 너를 세상 앞에 비추려 하는구나.”
* * *
해가 서산에 반쯤 걸친 시각, 항주 외곽의 인적 없는 깊은 산속.
아름드리나무의 굵은 가지 위에 한 청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단유소였다.
항주에서 보낸 시간은 며칠뿐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를 남겨주었다.
한수련이라는 여인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상처로 인한 자괴감을 극복하고 그녀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우려 며칠간 술만 마셨다.
밥 생각도 나지 않았다.
술만 있으면 되었다.
억지로 내공을 이용하여 주독을 몰아내지도 않았다.
그냥 취해서 살았다.
어차피 휴가 중이고 이곳에서는 신경 쓸 일도 없으니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곽승추의 말마따나 마지막에는 그녀가 심했던 부분도 있었다. 그녀에 대한 억하심정이 아직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나날들을 보내다 보니 문득 스스로가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 말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곽승추를 보내놓고도 실제로는 이러고 있다는 게 한심했다.
사랑하다가 헤어진 것도 아닌데.
고백했다가 차였을 뿐인데.
그래서 나선 길이었다.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스으으으―
대라유유선공(大羅流流仙功)을 운용하여 체내의 진기를 회전시키자 단유소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봄바람이라도 만난 듯 팔랑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연무가 발산되었다.
연무는 곧 살랑이는 바람을 타고 아지랑이처럼 흩어졌다.
그 현상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며칠간 쌓여 있던 주독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원래 가르쳐줬던 심법을 갑자기 버리라 하고 대라유유선공을 익히게 했던 건 사부였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담는다는 건 말이 쉽지, 실제로 깨닫고 적용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라유유선공이 그 길을 밝혀줄 게야. 일정 경지 이상 익히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게다.”
사부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일단 익히기는 했는데 당시에는 참으로 의아했었다.
진기의 운행 속도가 너무 느린 데다가 축기(蓄氣)도 더딘, 답답하고 복잡한 심법이었기 때문이다. 들인 노력에 비해 그 효과는 미미한,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을 보여주는 심법이었다. 심법 수련의 초중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그런 생각이 바뀐 건, 심법 수련의 경지가 육성을 넘어섰을 때부터였다.
그때부터 대라유유선공은 여태까지의 비효율을 비웃기라도 하듯 엄청난 효율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 줌의 진기만으로도 쉽게 일주천을 할 수 있었고 운기행공에 걸리는 시간도 급격하게 단축되었다. 축기의 양도 늘어났다. 가장 큰 효과를 보일 때는 진기를 다시 회복할 때였다. 그때 채워지는 진기의 양이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나 육성에 진입한 후에 대라유유선공이 보여준 가장 큰 효능은 따로 있었다.
바로, 자연 치유력의 증가였다.
“대라유유선공은 무위(無爲)에 기반을 둔다. 인위를 최소화하고 천지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려는 성질을 지녔다. 천지자연은 스스로 균형을 찾아간다. 네 안의 소우주도 준비를 마치고 이제 천지자연, 나아가서는 우주만물과 균형을 맞추어가기 시작한 게야. 자연 치유력이 높아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사부의 말마따나 심법을 운용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처가 더 빨리 치유된다는 사실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내상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작은 산새들이 날아와 단유소의 주변에서 놀고 있었다. 두 마리는 아예 단유소의 몸 위를 걸어 다녔다. 한 마리는 허벅지 위에, 한 마리는 머리 위에.
조화의 묘리를 담은 대라유유선공이 활성화되니 단유소 자체가 자연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라유유선공은 이제부터 내가 네게 전수해줄 심법을 보완해주기 위해 필요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 직후, 사부는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했었다.
“그 심법의 이름은 혼원태극공(混元太極功). 참고로 현 강호의 분류법에 따르면……, 마공(魔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