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3화 (3/200)

3화. 한설연

강호에는 수많은 문파와 단체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문파나 단체들의 성격도 천차만별이고 추구하는 목적도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 두뇌의 역할을 자처하는 단체들도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는 전통의 제갈세가를 꼽을 수 있겠다.

제갈세가는 무림맹이 생겼을 때부터 대대로 문상의 역할을 맡아왔을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 최고의 두뇌들이었다.

모든 세가들이 그렇지만, 세가의 성격은 혈연 중심이며 폐쇄적이다. 그렇기에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는 다른 인재들이 제갈세가에서 뜻을 함께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강호에는 제갈씨 이외의 뛰어난 두뇌들이 따로 모인 단체들이 여럿 존재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한곳을 꼽을 것이다.

현월곡(玄月谷).

현 강호상에서 제갈세가만큼이나 유명한 두뇌 집단이 바로 절강의 현월곡이었다.

제갈세가주와 견줄 만한 지식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 현월곡주라는 사실도 유명하지만, 지금의 강호에서 현월곡이 유명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강호제일미 한설연(韓雪蓮).

현월곡주의 셋째 제자인 그녀에 대한 수식은 그 한마디로 정리된다.

한설연이 유명한 건 단지 그녀가 강호 제일의 아름다움을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학다식한 머리에 수준급 무공 실력.

현월곡이라는 탄탄한 배경에 고운 심성까지.

한설연이 그런 재녀이다 보니 그녀는 강호상의 모든 사내들에게 있어 선망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한설연 친위대였다. 그녀를 선망하는 사내들이 일찌감치 모여서 그녀를 지키겠다며 사시사철 현월곡 아래에 머물고 있다.

오죽하면 현월곡을 지키는 건 현월곡의 무사들이 아니라 한설연 친위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일까.

“뭐어? 주선여어어언?”

한설연이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그렇게 되묻자 침상에 누워 있던 여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 언니…….”

그러자 한설연이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금영아. 내가 몇 번을 말해. 기본적으로 모든 사내들은 한심하다고. 주선연 같은 거 나오는 사내들이라고 해봤자 더 한심한 인간들뿐이라고.”

“한심할 거까지 뭐 있어요. 서로가 스스로 인연을 찾지 못하니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좀 받는 것뿐인데.”

“얘가, 얘가! 그래서 한심하다는 거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괜찮은 사내면 주변 여자들이 가만히 놔뒀겠어? 주선연 같은 게 필요하겠냐고.”

“그 말씀은 바꿔 말하면 저도 한심하다는 거네요.”

“아니지. 넌 다르지! 네가 얼마나 괜찮은 여잔데!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그래서 그런 한심한 사내들 만나지 말라고 이러는 거잖아.”

한설연의 말에 양금영이 질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양금영에게 있어 한설연은 일생의 은인이었다.

고아였던 자신을 현월곡으로 데려가 준 사람이 바로 한설연이었다. 현월곡에서도 친자매처럼 대해줬고, 독립할 시기가 되자 일자리까지 구해줬다.

양금영이 현재 일하고 있는 곳은 여수금장의 총관부였다. 한설연이 오랜만에 놀러 왔는데 마침 자신이 발목을 심하게 삐끗해서 부목을 댄 채 누워 있는 상태였다. 다친 건 어젯밤이었다.

최소한 이 주 정도는 이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게 의원의 진단이었다.

양금영이 말했다.

“알아요. 언니가 저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한설연을 바라보는 그녀의 미소는 따뜻했다.

“알면 됐어, 요것아.”

“그래도 어떻게 해요. 당장 오늘 오후가 주선연인데.”

“나가지 마. 그 몸으로 어딜 가. 미루던가.”

“이 주간이나 미룰 수는 없어요. 그분도 멀리에서 오셔서 그렇게는 안 돼요.”

“그럼 취소해.”

“주선해주신 무림맹 절강지부의 최익 대협은 우리 금장의 중요한 고객이세요. 평소 자주 뵙는 사이고 좋은 분이라서 제가 먼저 주선연을 부탁했었어요. 가뜩이나 그쪽 주선자도 최익 대협의 중요한 지인이라며 제게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셨는데…….”

“아, 정말. 그럼 어떻게 해! 네가 나갈 상태가 안 되고, 그렇다고 누굴 대신 내보낼 수도 없잖아!”

한설연의 그 말에 양금영이 눈을 번쩍 떴다.

“언니.”

양금영의 표정에서 낌새를 눈치챈 한설연이 곧바로 대꾸했다.

“너, 너어……. 안 돼!”

“부탁해요, 언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

“저 때문에 우리 금장에 피해가 가게 할 수는 없어요. 최익 대협이 거래하는 금장이라도 바꿔버리면 저는 정말 장주님 뵐 낯이…….”

“그만둬, 그러면.”

“장주님이 저한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어떻게 그래요.”

하지만 한설연은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러자 양금영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언니가 이런 사람이라는 거,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떨까요? 성품 곱기로 유명한 한설연 소저가 사실은 내숭 고수에, 사내들을 무시하고 깔보는…….”

한설연이 눈을 번쩍 떴다.

“너어어어!”

“현월곡 아래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진을 치고 있는 친위대가 알면 또 어떨까요?”

“너 지금 날 협박하겠다는 거야?”

그러자 양금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건 협박이라고 하지 않죠. 친한 사이끼리의 애정 어린 부탁이라고나 할까.”

“이걸 그냥!”

“게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하고.”

그 말에 한설연이 들어 올렸던 손을 다시 내리며 눈을 흘겼다.

그러자 양금영이 여우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언니는 항상 인피면구 준비해서 다니잖아요. 여기 왔을 때도 쓰고 왔고. 그 인피면구 쓰고 나가면 되겠네. 내 친구라고 해요. 내가 지금 이런 상황이라서 부탁을 받고 대신 나왔다고 하면 될 거예요. 그 인피면구의 모습이면 상대방도 실망하지 않을 거고.”

“얘가 정말.”

“언니가 그렇게 한심하게 여기는 주선연, 직접 겪어보고 평가하는 거예요. 언니가 겪어봤는데도 한심하다면 저도 앞으로 주선연 안 할게요. 언니나 곡주님이 맺어주는 사람이랑 혼인하든 하지, 뭐.”

양금영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언니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잖아요? 현월곡주님의 셋째 제자이자 강호제일미라는 유명인으로 살면서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요? 언니더러 그 사람하고 계속 만나라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대신 한 번 나가달라는 것뿐이잖아요.”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한설연은 연신 고개를 젓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그녀의 고운 입에서는 그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중이다.

아무리 친자매처럼 지내는 양금영의 부탁이었다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결국 자신이 이 한심한 놀음에 놀아나고 있다니.

주선연에 가기 위해서 호위 무사들까지 따돌리는 수고를 해야 했다. 호위 무사들을 따돌리는 일이야 어차피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현월곡의 영역이니 큰 문제도 없었다.

“게다가 옷이 이게 뭐야.”

얼핏 보면 조신한 듯 보이지만 적당히 몸매를 짐작할 수 있는 옷이었다.

양금영의 성화로 결국은 입고 말았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옷이 예뻐서 못 이긴 척 입은 것이지만.

“미쳤어. 미쳤어, 내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한설연은 생소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사내일까?

궁금했다.

양금영에게서 들은 것이라고는 두 가지뿐이었다.

무림맹 본맹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이름 정도.

단유소라 했다.

단유소(端幽嘯).

그윽한 휘파람 소리라…….

누가 지은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름만큼은 제법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인상이 비호감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기대를 하지 않겠다고 내심 계속 다짐하면서도 일말의 설렘은 존재하는, 이게 주선연에 나가는 사람들의 심정인가 싶었다.

“언니, 적어도 한 가지는 주의해야 해요. 주선자인 최익 대협의 체면을 생각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줘야 해요. 알았죠?”

나오기 전에 양금영이 당부했던 말이었다.

“쳇. 알 게 뭐냐.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사내란 한심한 자들일 뿐이야.”

그러는 사이, 그녀의 걸음은 어느새 약속했던 다루의 정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 * *

단유소의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일단 상대의 얼굴은 미녀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중(中中)에서 중상(中上) 사이는 되는 것 같았다.

사실, 여인의 외모를 구등분(九等分)하여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로 평가를 매기는 건 바람둥이인 서백풍의 습관이었다.

왜 갑자기 서백풍의 여분구등법이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앞의 여인은 그쯤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여인의 자태였다.

늘씬한 키에 꼿꼿한 허리.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주는 단아한 목소리.

조신한 듯 입었지만, 충분히 짐작되는 굴곡진 몸매까지.

“여자는 몸이 칠이고 얼굴이 삼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조장님.”

눈앞의 여인을 보고 있자니 서백풍 그 음란한 놈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 진짜!

근래에 환락마종을 죽이고 왔더니 음란마귀가 씌었나.

정신 차리자, 단유소.

이게 웬 추한 생각이란 말이냐.

그래도 한편으로 서백풍의 그 말 자체가 납득이 가긴 갔다.

그나저나 뛰는 가슴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주선연에서 이 정도의 여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단 앉으시죠.”

아, 젠장. 말을 더듬어 버렸다.

초고수와 싸울 때에는 잘도 유지되는 평정심이 왜 이런 때는 전혀 유지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아, 예.”

여인이 걸음을 옮겨 맞은편에 앉았다.

그 과정에서 여인이 보인 걸음걸이나 앉는 자세까지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마음에 들수록 가슴은 더욱 세차게 뛰었다.

“반갑습니다, 소저. 단유소라 합니다.”

너무 상투적인 인사로 들리지는 않았을까?

인사를 건네며 보여준 미소가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을까?

그런 염려를 하고 있는 사이, 여인이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단 공자님. 그보다……. 제 소개를 하기에 앞서 미리 말씀드려야 할 게 있는데…….”

“아! 예. 말씀하십시오, 소저.”

“양해를 구할 일이 있어서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양해를 구한다고 하니 살짝 불안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드나?

그렇다면 뭐가 마음에 안 든 거지?

차림새인가? 얼굴인가?

정작 여인이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온통 휘저었다.

“아아. 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소저.”

“저는 공자님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던 양금영이 아니에요.”

“예?”

으응?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저는 금영이 친구예요. 사실 금영이가…….”

여인이 이 자리에 나온 경위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상황이 대충 이해가 갔다.

“아아……. 양 소저께서 다치셨군요.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시라니. 부디 쾌유를 빈다고 전해주십시오.”

“꼭 전해줄게요, 단 공자님. 어쨌거나 그래서 제가 대신 나왔어요. 제 이름은 한수련이고요.”

“아, 한 소저시군요.”

“네.”

“하. 하하.”

어색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좀 당황스러우시죠?”

당연히 당황스럽지요.

그래도 소인배처럼 보일 수는 없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했다.

“아! 뭐, 양 소저의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요. 양 소저께서 낫기까지 제가 기다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요.”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 소저께는 신경 쓰지 마시라고 전해주십시오. 충분히 이해한다고.”

“예, 그럴게요.”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할 말이 없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한수련이라는 여인도 말이 없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런 식으로 침묵이 계속 이어지니 더 어색했다.

사실, 한수련이라는 이 여인이 마음에 들지만, 그녀는 주선연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계속 이러고 있기도 애매했다.

“그럼 한 소저는 양 소저의 상황을 대신 전해주러 나오신 것뿐이니 이 자리는 이만…….”

어색한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니 입에서 그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 말에 한수련의 미소가 더 묘한 느낌을 담아갔다.

이윽고 그녀의 고운 입술이 열렸다.

“단 공자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차 한잔 마시면서 저랑 이야기를 나눠보는 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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